사도행전 강해

<사도행전 강해38>예루살렘 회의1(사도행전 15:1~11)

남편, 아빠...그리고 목사 2026. 7. 16. 23:29

  신학대학교를 다닐 때 들었던 한 강의가 있었습니다. 그때 교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자녀는 내 것이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맡겨주신 생명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결혼하기 전이어서 그런지 저는 그때 그 말이 참 이상하게 들렸습니다. ‘아이를 내 것으로 생각하는게 이상한 것 아닌가?’ ‘뭘 저렇게 당연한 소리를 대단한 것처럼 이야기하지?’라고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하나님께서 나에게 맡겨주신 생명으로 생각하라는 말’은 마음에 남겨지게 되었습니다. 그땐 그 말의 의미를 잘 이해하지 못하였는데, 요즘 들어 그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조금씩 알 것 같습니다.

 

  저희 첫째가 지금 6학년입니다. 어둠의 기운이 스멀스멀 올라오는 사춘기에 접어들었는데, 귀엽기만 했던 딸 아이가 달라지는 모습을 보며 아빠로서 고민을 많이 하게 되더라구요. ‘이 아이를 어떻게 교육해야 하나?’도 고민이지만 ‘나는 이 아이에게 어떤 아빠가 되어야 되나?’는 더 큰 고민이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그때 들었던 ‘하나님께서 나에게 맡겨주신 생명으로 생각하라.’는 말이 떠올랐습니다. 저는 요즘에 이 말이 ‘자녀는 자라는 동안 하나님 안에서 잘 자랄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잠시 맡겨주신 생명으로 생각하라.’는 의미로 마음에 새기고 있습니다.

 

  모든 자녀는 부모의 품을 거쳐갑니다. 부모의 보살핌 아래 성장의 시기를 거쳐갑니다. 홀로 독립을 할 수 있을 때까지 그 삶을 뒷받침하는 것은 부모에게 주어진 절대적인 책임입니다. 하지만 목적은 분명해야 합니다. 부모의 생각, 부모의 판단, 부모의 경험의 틀에 넣어놓고, 부모의 방법대로 아이를 양육하는 것이 되지 않아야 합니다. 언젠가 이 아이가 부모의 품을 떠나 독립을 해야 할 때 건강한 생각을 하고, 건강한 관계를 이루며 건강하게 자라갈 수 있도록 잘 도와주어야 합니다. 하나님 안에서의 양육은 이 아이가 독립을 할 때, 주어진 일을 하나님 안에서 선한 모습으로 잘 자랄 수 있도록 돕는 것이어야 하겠죠.

 

  우리는 계속해서 사도행전을 살펴보며 특별히 ‘선교’에 대한 내용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혹시 여러분은 ‘선교’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선교라는 말을 들으면 어떤 장면이 떠오르십니까? 누군가에게는 선교로 인해 발생된 문제점들이 떠오르며 부정적인 생각들이 자리잡혀 있을 수도 있고, 또 누군가에게는 선교에 큰 빚을 진 대한민국을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방법적으로 생각하면 다양한 모습이 떠오를 수 있겠지만, ‘선교’는 본질적으로 한 방향으로 흘러가게 되는데 어린아이와 같은 사람들, 어린아이와 같은 민족들, 어린아이와 같은 나라들을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으로 보살펴주는 것입니다. 즉, 선교의 대상이 건강하게 독립할 수 있도록 부모의 역할을 자발적으로 감당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선교는 외적으로 드러나는 어떤 일을 지칭하기 보다 먼저는 우리 모두의 신앙에 흘러가고 있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확인하는 중요한 방향성이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사도행전에서 공식적으로 선교가 인정되는 회의, 예루살렘 회의에 대한 내용을 살펴볼 것입니다. 바라옵기는 오늘 함께 예배하는 우리 모두가 이 내용을 통해 각 개인과 공동체 속에 선교의 본질이 어떻게 심어지는지를 살펴볼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또한 아버지의 마음을 더 알아가고, 아버지 마음으로 살아가는 삶의 모습들이 우리 모두에게 심어질 수 있는 은혜의 시간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받지 못하리라 하니"(행15:1)

 

  바울과 바나바는 1차 선교여행을 마치고 안디옥 교회로 돌아왔습니다. 안디옥 교회는 바울과 바나바에게 선교의 전초 기지 같은 본부 교회이기도 하지만, 예루살렘 교회와는 달리 이방인들 중심으로 세워진 교회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안디옥 교회에 문제가 발생하였습니다. 유대로부터 온 어떤 사람들이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않으면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하며 안디옥 교회의 사람들에게 가르치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된 것입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지금까지 선교여행을 통해 하나님이 행하신 일들을 경험하였고, 이방인들에게 믿음의 문을 여신 것을 보고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에게는 이 일이 아무 소용 없는 일, 의미 없는 일처럼 여겨진 것입니다. 무엇보다 지금 바울과 바나바가 있는 곳은 안디옥 교회, 이방인들의 교회입니다. 유대인들이 안디옥 교회에 와서 그와 같은 가르침을 이어가는 것은 단순히 이방인 선교에 대해 부정하는 정도가 아니라 안디옥 교회의 시작과 안디옥 교회로부터 이어져 오는 모든 일에 대해 부정하는 것이었습니다.

 

"바울 및 바나바와 그들 사이에 적지 아니한 다툼과 변론이 일어난지라 형제들이 이 문제에 대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및 그 중의 몇 사람을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에게 보내기로 작정하니라"(행15:2)

 

  바울과 바나바에게 그 일은 굉장히 힘 빠지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단순히 힘이 빠지는 정도가 아니라 열 받게 되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유대에서 온 사람들과 적지 아니한 다툼과 변론이 일어났습니다. 사실 바울은 그때까지도 다른 사도들에게 온전한 사도의 권위를 인정받지 못하였습니다. 다른 사도들은 예수님을 직접 따라다니며, 직접 가르침을 받았기에 증인으로서의 조건을 갖추었지만, 사울은 예수를 따르기는커녕 예수 믿는 자들을 핍박하고 박해하던 유대교의 권위자였기 때문입니다.

 

  선교여행을 통해 바울이 감당해 온 일은 좋은 일이었지만, 좀 더 확실하게 그 일이 옳은 일인지에 대한 검증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바울과 바나바, 안디옥 교회에 속한 성도들을 예루살렘 교회의 사도와 장로들에게 보내기로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길에 특별한 경로를 선택합니다. 바울 일행은 선교 여행에서도 루스드라와 더베에 이르렀을 때 곧바로 안디옥 교회로 갈 수 있었지만, 선교 여행을 통해 만난 사람들, 세워진 교회를 돌아보기 위해 온 길을 되돌아가는 선택을 하였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로 내려갈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들은 그저 편하게, 쉽게 가는 방법을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교회의 전송을 받고 베니게와 사마리아로 다니며 이방인들이 주께 돌아온 일을 말하여 형제들을 다 크게 기쁘게 하더라" (행15:3)

 

 복음의 씨앗이 뿌려진 이방인들, 특별히 유대인들이 멀리하였던 베니게와 사마리아를 거쳐 가는 길을 선택하였습니다. 바울 일행은 그곳에 세워진 교회에 지금까지의 선교의 일들을 나누었을 것입니다. 힘들게 이어온 선교의 일들은 바울과 바나바, 안디옥 교회에만 기쁜 소식이 아니었습니다. 베니게와 사마리아에 있던 모든 형제들에게도 큰 기쁨으로 이어졌습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실 때 양을 치던 목자들에게 천사들이 나타났습니다. 천사들은 두려워하는 목자들에게 이런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누가복음 2장 10절입니다.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눅2:10)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소식,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소식은 큰 기쁨의 좋은 소식 즉, 복음입니다. 그런데 이 복음은 특별한 누구에게만 기쁜 소식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입니다. 복음을 통해 큰 기쁨으로 말미암아 사도가 된 바울과 바나바, 그들은 자신들에게 충만한 기쁨을 채워주었던 복음을 가지고 선교여행을 떠났습니다. 선교여행 속에서 그들은 복음을 전하였고, 복음을 전해 듣게 된 선교여행의 모든 발자취에는 큰 기쁨이 채워졌습니다. 그렇게 세워지는 교회들을 보며 안디옥 교회도 기뻐하였고, 이제 그 소식을 듣게 된 베니게와 사마리아의 형제들과 교회들도 기뻐하게 되었습니다. 모든 이들이 기뻐하게 된 이 소식을 가지고 이제 바울과 바나바 일행은 예루살렘 교회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이르러 교회와 사도와 장로들에게 영접을 받고 하나님이 자기들과 함께 계셔 행하신 모든 일을 말하매"(행15:4)

 

  예루살렘 교회에서 이들은 사도와 장로들에게 그동안의 일을 나누었습니다. 그동안의 일은 다른 이들 모두를 기쁘게 한 소식이었지만, 예루살렘 교회에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당시 예루살렘 교회에는 바울과 같이 유대교에서 개종한 사람도 있었던 것 같은데, 유대교 중 제일 강경하다고 할 수 있는 바리새파 중에서 회심한 사람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바울 일행의 이야기를 들은 바리새파의 어떤 사람이 “이방인에게도 할례를 행하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고 하는 것이 마땅하다”(행15:5)고 주장하였습니다. 이것은 아무리 이방인이라 하더라도 구원을 받았다고 하면, 유대교의 전통 속으로 들어와야 한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할례, 율법 준수와 같은 일은 전통적인 유대인들에게 단순히 그냥 넘길 수 있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유대인들에게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택하셨다는 선민 사상이 너무나도 깊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율법과 할례 같은 것들은 구원받을 또 구원받은 사람들에게 허락하신 특별한 것이라고 생각을 한 것입니다.

 

  그동안 유대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구원을 얻기 위해 얼마나 최선을 다했습니까? 특히 바리새인들 같은 경우에는 잘못된 방향이긴 하였지만, 누구보다도 율법을 알기 위해 또 지키기 위해 힘써왔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 구원은 지금까지 수고해 왔던 일의 보상처럼 느껴졌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방인들은 어떻습니까? 유대인들이 생각하기에 이방인들은 아무런 수고 없이 거의 공짜로 구원이라는 큰 선물을 받은 자들이라는 생각이 들었을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이와 같은 일은 모든 이들을 품으시는 인자하시고 자비하신 하나님으로 여겨지기보다는 그들이 현재 누리고 있는 구원의 희소성이 떨어지는 것으로 생각하게 된 것 같습니다.

 

"사도와 장로들이 이 일을 의논하러 모여 많은 변론이 있은 후에 베드로가 일어나 말하되 형제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이 이방인들로 내 입에서 복음의 말씀을 들어 믿게 하시려고 오래 전부터 너희 가운데서 나를 택하시고"(행15:6~7)

 

  이 문제를 정리하기 위해 예루살렘에서 사도들과 장로들이 모여 회의를 하게 되었습니다. 회의에서는 많은 이야기들이 오간 것 같습니다. 많은 변론이 있은 후에 사도들 중 대표라고 할 수 있는 베드로가 발언을 하였습니다. 베드로에게도 이방인을 만난 특별한 경험이 있었습니다. 어쩌면 지금의 이 일을 위해 하나님께서 특별하게 허락하신 일이 아닐까 생각도 듭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환상을 따라 베드로는 이방인 백부장 고넬료를 찾아갔고, 그의 친척, 친구들이 모인 자리에서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영문도 모른 채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뿐이었는데, 놀라운 결과가 이어졌습니다. 오순절 사도들이 처음 성령을 경험한 그때처럼 성령께서 말씀을 듣는 이방인들에게 내려오는 장면을 목격하였습니다. 그리고 오순절 성령을 경험한 사도들과 같이 방언을 말하여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베드로는 이방인에게도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을 직접 경험하였습니다. 율법도, 할례도 받지 않았지만, 하나님은 복음을 전해 듣게 된 그들에게 친히 찾아와주셨고, 자신들에게와 같이 은혜로 새로운 삶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여기서 ‘구원’이라고 하는 것은 단순히 인생에서 성공하거나, 장수의 축복을 누리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담배나 술, 음란을 끊게 되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를 향한 새로운 방향성, 자신의 욕심과 자신의 뜻대로 살아가던 사망을 향한 삶에서 설교 초반에 언급한 하나님 아버지 마음으로 살아가는 삶, 누군가를 더 멋지게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섬겨주는 새로운 삶으로 변화된 생명의 삶, 소유에서 나눔으로, 높음에서 낮아짐으로, 욕심에서 사랑으로, 죄에서 의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삶의 방향성이 온전히 전환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들은 계속해서 뻗어져 나가야 되고, 모두에게 전해져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지금 유대인들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다고는 하지만, 선교의 본질, 아버지의 마음을 품지 못하여 생명의 일을 이어가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부모가 모든 것을 다 내어줄 정도로 사랑하며 양육을 하는데, 주변 사람이 우리 부모님을 안다고 하며 “야! 너 이번에 성적 이만큼 안 올리면 엄마 아빠가 너 안 사랑해! 너네 엄마 아빠는 니가 공부 잘 해야 예뻐해!” “너 이번에 이거 못하면 엄마 아빠가 용돈도 안 줄걸?”이라고 말하는 것과 비슷한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더 잘 알고 있던 베드로가 생각하기에 그들의 모습이 어떻게 보였겠습니까?

 

  베드로는 그렇게 생각하는 유대인들을 심하게 질책하며 결론을 짓습니다. 우리 11절 말씀 같이 읽겠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우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 받는 줄을 믿노라 하니라”(행15:11) 우리는 부모님의 사랑 안에서 자랍니다. 그리고 이렇게 멋진 성인이 되지 않았습니까? 부모님의 사랑을 온전히 누리는 것은 어떤 조건이 아닙니다. 잘 생겼기 때문에, 무엇인가를 잘하기 때문에 사랑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조건과는 상관없이 부모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부모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믿음입니다. 그 믿음 안에서 부모님의 사랑을 온전히 누릴 수 있고, 또 그 사랑 안에서 온전히 거함으로 건강하게 자랄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자라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조건을 따지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에덴동산의 아담과 하와처럼 스스로가 하나님처럼 되고자 발버둥 치고, 내 마음과 내 생각으로 선과 악의 기준을 삼아 사망의 길을 향할 때, 하나님을 기억하지 못하고 나 자신도, 함께하는 사람도, 사회도 무너지게 만드는 인생을 살아갈 때,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주셨고, 그리스도를 통한 사랑의 소식, 구원의 소식이 우리에게 이어지게 해주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잊어버렸지만 주님은 우리를 기억하셨고, 우리는 주님을 기다리지 않았지만 주님은 우리를 기억하셨으며, 우리는 주님을 찾지 않았지만, 주님을 우리를 찾아주셨습니다. 어떠한 조건도 없이 오직 사랑으로 우리를 찾아주셨으며 우리를 만나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구원의 은혜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마태복음 20장을 보면 예수께서 천국의 모습을 이야기 하기 위해 포도원 품꾼들을 비유로 든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천국은 마치 품꾼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 주인과 같으니 그가 하루 한 데나리온씩 품꾼들과 약속하여 포도원에 들여보내고 또 제삼시에 나가 보니 장터에 놀고 서 있는 사람들이 또 있는지라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내가 너희에게 상당하게 주리라 하니 그들이 가고 제육시와 제구시에 또 나가 그와 같이 하고 제십일시에도 나가 보니 서 있는 사람들이 또 있는지라 이르되 너희는 어찌하여 종일토록 놀고 여기 서 있느냐 이르되 우리를 품꾼으로 쓰는 이가 없음이니이다 이르되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하니라"(마20:1~7)

 

  어느 포도원 주인이 포도원에 일을 시키기 위해 한 데나리온의 품삯을 약속하고 먼저 아침 6시에 나가서 사람들을 데리고 옵니다. 조금 있다가 9시에 나가보니 또 사람들이 있길래 같은 약속을 하며 포도원에 들여 보냈고, 또 12시에도 3시에도 나가 그와 같은 행동을 합니다. 저녁 6시가 되면 모든 일을 마쳐야 하는데, 저녁 5시에 나가보니 그때도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포도원 주인은 그들에게 왜 종일토록 놀고 여기에 서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들은 “놀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우리를 품꾼으로 쓰는 이가 없어서 여기에 서 있었던 것입니다.”라고 대답을 하였습니다. 포도원 주인은 그들도 포도원에 데리고 가서 일을 시켰습니다.

 

  곧 6시가 되어서 주인은 나중에 온 자부터 품삯을 주기 시작했는데, 조금 전 저녁 5시가 넘어서 온 사람에게 주인이 한 데나리온씩 주는 것이었습니다. 먼저 온 자들은 ‘자신들에게 조금 더 주지 않을까?’ 기대를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인은 모두에게 한 데나리온의 품삯을 똑같이 지급을 하였습니다. 먼저 온 사람들 중에 어떤 사람이 주인을 원망하며 따져 물었습니다. ‘저들과 우리가 똑같이 받는게 말이 되나요? 일한 양이 다른데 저들보다 우리가 더 많이 받는 게 당연한 거 아녜요?’

 

  여러분들이 이런 상황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주인은 그들에게 이렇게 말을 합니다. “난 너희에게 약속한 만큼을 주었고, 저들에게는 또 나의 마음대로 그들에게 베푼 것이다.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하는 것이 뭐가 문제가 있느냐? 지금 내가 한 일은 선한 일인데 너희들은 왜 나의 행동을 악하다고 생각하느냐?”(마 20:13~14)  그리고 예수께서는 이 비유에 대해 이렇게 정리하십니다. 마태복음 20장 16절 말씀은 같이 읽겠습니다.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마20:16)

 

  오늘 본문의 유대인의 모습은 이 비유의 먼저 온 품꾼과 비슷합니다. 사실 나중에 온 사람은 누구에게도 불려 갈 수 없을만큼 보잘 것 없는 인생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그날도 빈손으로 집에 돌아가면 가족들을 굶기게 될까봐 아무도 불러주지 않을 그 시간에도 계속해서 기다렸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에게 포도원 주인이 불러주는 것은 두 말 할 것 없이 은혜입니다. 이들의 달라진 삶은 둘째 날 더욱 분명하게 나타날 수 있을 것입니다. 첫날 포도원에 먼저 왔던 사람은 둘째 날 오후 늦은 시간에 혹시라도 불러주지 않을까 기웃거렸을 것입니다. 하지만 나중에 왔던 사람은 주인이 베푼 은혜에 감사한 마음으로 누구보다 포도원에 먼저 나와 있었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은혜를 은혜로 누린 자와 은혜를 자신의 공로로 바꾸었다고 생각하는 자의 차이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떤 은혜를 누린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누군가에게 베풀어지는 선을 시기하고, 누군가가 살아나는 모습을 경계하며 내 것만을 누리는 삶으로 우리의 삶을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내가 손해 보는 일처럼 느껴진다면 누군가를 살리는 일, 누군가가 살아나는 일도 가로막으려고 하는 이기적인 욕심이 여전히 우리 안에 살아있지는 않습니까? 나의 노력, 나의 최선, 나의 능력을 자랑하며 자신이 무엇인가를 더 가졌다는 생각으로 비교하며 우월감을 가지고 있지는 않습니까?

 

  선교는 나중에 온 이들이 따뜻함을 누리게 됨을 함께 기뻐하는 것이고,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으로 그들에게 자리를 내어주는 것입니다. 바라옵기는 오늘 함께 예배하는 모든 이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말미암은 선교의 심장을 가질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으로 사랑하고, 품어주며, 하나님 안에서 거룩한 모습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거룩한 복음의 사람들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