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누구나 한계를 가진 존재로 살아갑니다. 완벽하지 않기 때문에 결핍 속에서 살아가고, 스스로가 결핍이라고 생각하는 부분을 채우고자 하는 갈망을 꿈으로 생각하며 살아가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 앞에서 자신의 한계를 느끼며 도움을 줄 수 있는 누군가를 바라봅니다. 그때 바라보게 되는 존재가 그 사람의 “신”으로 자리매김하게 되는데, 이런 면에서 신앙은 결핍에 대한 인간의 반응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그 결핍을 채우는 방식이 대부분 올바른 방향으로 향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우상을 만들어 내는 존재'라고 하듯 자신이 결핍을 느끼는 것에 따라 얼마든지 그에 맞는 신을 만들어 냅니다. 물질에 결핍을 느끼면 돈을 신처럼 여기기도 하고, 자존감에 결핍을 느끼면 인정과 성공을 신처럼 섬기기도 합니다. 태양, 바다, 나무, 돌 등은 우상숭배의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은 근본적으로 사람들이 자신의 필요에 맞게 만들어서 섬기는 것들입니다.
우상숭배는 사실 어떤 특별한 신을 섬기는 것이 아닙니다. 스스로가 느끼는 결핍에 의해 잠재되어 있던 욕구가 튀어나와 추상적이거나 실질적인 대상을 만들며 형성이 된 것들입니다. 그래서 우상숭배는 본질적으로 자신의 욕구를 섬기는 것, 즉, 자기 숭배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자기 숭배를 하는 일은 어찌보면 욕심의 구덩이를 파는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무엇인가를 더하며 나의 목마름을 채우는 것 같이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그 정도로 만족하지 못하는 상태로 자신을 만드는 것이며, 더 큰 것에 만족할 수 있도록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삶을 위해서, 참 생명을 위해서 신앙은 언제나 점검되어야 합니다. 내가 실제로 믿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돌아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믿는 일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은 다양한 경로를 통해 하나님을 알아가고, 하나님을 믿게 되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 믿음도 때로는 본질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펼쳐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사람들은 자신의 욕심을 채우는 도구로, 자신을 숭배하는 도구로 하나님을 이용하려고도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루스드라에서의 전도에 관한 내용이 펼쳐집니다. 이고니온에서 전도하던 바울 일행은 그들을 모욕하며 돌로 치려고 달려드는 일행을 피해 도망치게 되었는데, 그곳이 바로 루스드라였습니다. 루스드라는 굉장히 한적한 곳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바울 일행은 가장 번성한 곳에서 도망쳐 가장 낙후된 지역으로 오게 된 것입니다. 루스드라는 당초 계획에는 없었던 것 같습니다. 이고니온에서 도망쳐 나오다가 들리게 된 도시였을 것입니다. 바울 일행은 도망쳐서 나오긴 하였지만 숨어있거나 소극적인 태도로 있지 않았습니다. 이곳에서도 그들은 복음을 전했습니다. 앞서 구브로섬에서도 비시디아의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도 복음은 누군가에게 무엇을 채워주는 일이라기 보다는 먼저 그들의 정체성과 실체를 낱낱이 밝히는 일로 이어졌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그 일은 마찬가지로 이어집니다.
오늘 우리는 바울 일행이 루스드라에서 복음을 전하여 발생된 벌어진 일을 살펴볼 것입니다. 이 내용을 살펴보는 동안 함께 예배하는 우리 모두가 우리의 신앙은 무엇을 향해 있는지 점검해 볼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또한 그와 함께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허락하신 복음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살펴보고, 그 목적에 맞게 회복을 꿈꿀 수 있는 은혜의 시간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바울 일행이 도착한 루스드라에는 복음을 기다리고 있던 준비된 영혼이 있었습니다. 조금의 물기라도 빨아당길 수 있는 마른 스펀지와 같이 복음을 듣기만 하면 받아들일 수 있을 정도로 준비된 한 앉은뱅이가 있었습니다. (8절)성경은 "나면서 걷지 못하게 되어"(행14:8) "걸어 본 적이 없는 자"라고 설명을 하며 이 앉은뱅이의 상황이 얼마나 절박한지에 대해 구체적으로 표현합니다. 이 일은 사도행전 3장에 기록된 성전 미문에 있던 앉은뱅이를 일으킨 사건과 거의 비슷합니다. 저자 누가는 의사였는데 이런 치유의 일에 대해 관심이 많았던 것 같고, 또 그때의 일과 비슷한 일이 바울을 통해 펼쳐지는 것을 기록하며 베드로와 같은 사도권이 바울에게도 있음을 나타내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듭니다.
아무튼 바울이 한참 복음을 전할 때 발을 쓰지 못하는 사람, 나면서 걷지 못하게 되어 걸어 본 적이 없는 사람이 눈에 들어 왔습니다. 바울의 눈에 들어온 것은 그의 특별함이나 그의 장애가 아니었습니다. 아마도 그는 남다른 태도로 듣고 있었던 것 같고, 바울은 그의 모습에서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9절)
부부가 결혼을 해서 모든 것을 내어줄만큼 배우자를 사랑한다 하더라도 상대방에 대한 의심이 있다면 그 모든 것이 삐딱하게 보여지며 아무것도 누릴 수 없게 됩니다. 그처럼 주는 편에서 아무리 대단한 것을 주어도 받는 편에서의 믿음이 없으면 온전히 누릴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신의 아들을 내어주실 만큼 사랑을 주신 것은 사실이며 진리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모두가 누리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을 받아들이는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 사람에게서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성전 미문의 앉은뱅이에게 베드로가 명하였던 것처럼 바울도 그 사람에게 "너의 발로 바로 일어서라"고 큰 소리로 명하였습니다.(10절) 그 사람은 명령에 순종하였고, 성전 미문에 있던 앉은뱅이와 같이 일어나 걸었습니다. 만약 여러분들이 이 현장에 있었고, 이런 일을 목격하게 된다면 어떻게 반응하시겠습니까? 눈앞에서 이런 기적이 펼쳐진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절망적인 상황에서 살아가던 누군가에게 지나가던 어떤 사람이 숫자를 6개 알려주었는데, 그 사람이 로또 1등에 당첨이 되었다면 어떤 반응을 하겠습니까?
루스드라 사람들에게는 전혀 뜻밖의 반응이 이어졌습니다. 우리 11절부터 13절까지 말씀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11 무리가 바울이 한 일을 보고 루가오니아 방언으로 소리 질러 이르되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우리 가운데 내려오셨다 하여 12 바나바는 제우스라 하고 바울은 그 중에 말하는 자이므로 헤르메스라 하더라 13 시외 제우스 신당의 제사장이 소와 화환들을 가지고 대문 앞에 와서 무리와 함께 제사하고자 하니" 여러분, 이 반응은 좋은 반응일까요? 나쁜 반응일까요?
얼핏보면 굉장히 긍정적인 반응처럼 보입니다. 여러분 오병이어 사건을 아시죠?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그곳에 모인 남자 장정의 수만 오천명이 정도가 되는 엄청난 숫자를 배불리 먹이셨습니다. 그냥 먹이시고 끝난 것이 아니라 그들을 먹이고 남은 조각이 열두 바구니에 찰 정도였으니 실로 엄청난 기적을 행하신 것입니다. 그 기적을 경험한 자들은 이렇게 반응을 하였습니다. 요한복음 6장 14절입니다. "그 사람들이 예수께서 행하신 이 표적을 보고 말하되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라라 하더라"(요6:14)
사람들의 반응은 엄청 호의적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무엇인가 일을 하려고 하였다면 이만한 기회가 어디있겠습니까? 대통령이 되려고 하면 당장에라도 당선 될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분위기였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이렇게 반응하셨습니다. 15절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이 와서 자기를 억지로 붙들어 임금으로 삼으려는 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 가시니라"(요6:15)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하나님 나라의 복음, 태초에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의 질서를 회복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저 밥 한끼 넉넉하게 떠 먹여주는 일에 빠져 예수를 왕으로 삼으려 한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반응이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아니라 밥 한끼 먹여주는 우상으로 생각하고 있음을 알고 있으셨기에 그 자리를 떠나시고, 기도하러 산으로 올라가신 것입니다.
루스드라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의 반응이 굉장히 호의적인 것 같이 보이지만, 아주 강력한 어둠의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사람들은 제우스와 헤르메스가 나타난 것이라고 호들갑을 떨었습니다. 말로만 그런 반응을 보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제우스 신당의 제사장들은 제사를 위해 소를 준비하였고, 바나바와 바울에게 씌울 화환까지 가지고 왔습니다. 도시의 성문에서부터 제우스 제단까지 퍼레이드, 행렬을 하기 위해 준비를 한 것입니다.
목회자가 조심해야 할 것이 돈과 여자라고 하는데 그러한 것은 정말로 당연한 일이고, 저는 이런 일이야 말로 목회자가 정말로 경계하고 조심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을 띄워주고, 대우를 해주면 그러한 것들이 얼마나 달게 느껴집니까? 하지만 그러한 것들은 자신을 죽이고, 교회를 죽이는 마약과 같은 것입니다.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특별하다는 착각, 남들보다 대단한 자리에 있다는 착각, 대단한 일을 하고 있다는 착각, 대단한 것을 알고 있다는 착각을 버려야 합니다. 그러한 일이야말로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도록 교묘하게 장벽을 세우는 일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에게 주어졌던 가장 큰 문제는 그곳에서 그들이 하나님처럼 되고자 하며 주인 노릇을 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정착했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 인도해 주셔서 거저 들어간 곳이었지만, 그들은 그곳에 정착하자 하나님을 잊고 자신들이 주인 노릇을 하였습니다. 복음도, 교회도 주께서 허락하신 것이고, 주의 은혜로 말미암아 거저 주어진 것들이지만, 그 은혜를 누린 자들이 주인 노릇을 하는 것은 굉장히 꼴 사나운 모습입니다.
베드로가 고넬료를 만났을 때, 고넬료가 엎드려 절을 하자 베드로는 고넬료를 일으켜 세우며 "나도 사람이라"고 합니다.(행10:26~27절) 이어지는 본문 14~15절을 보면 바나바와 바울도 마찬가지입니다. 옷을 찢고 무리 가운데 뛰어 들어가서 "여러분이여 어찌하여 이러한 일을 하느냐 우리도 여러분과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 지금 이렇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이와 같은 모습을 버리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함이라"(행14:14~15)고 하면서 소리를 질렀습니다. 바나바와 바울은 특별한 대우 받기를 거절하였습니다. 오히려 불쾌해했습니다. 자신들을 특별하게 보느라 정작 그들이 봐야 할 하나님을 보지 못하게 될까봐 걱정을 하였습니다. 바울은 이어서 자신들이 신적인 존재로 추앙받아서는 안 되는 이유를 설명합니다. 자신이 아닌 하나님을 봐야 하는 이유를 설명한 것입니다. 하나님만이 우리의 창조주이시고, 하나님만이 우리에게 선한 일을 허락하시는 분이시며, 하나님만이 우리를 만족케 하시는 분이심을 알려주었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들을 증거하고 전달하는 사람일 뿐 특별한 신적인 존재가 아님을 밝혔습니다. 그들의 제사를 막는 일이 쉽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설교는 성공적이었습니다. 겨우 막을 정도로 그들은 열성적이었지만, 그들은 제사를 멈추었습니다. 인간을 향한 숭배가 일차적으로 멈추어진 것입니다.
하지만 이때 또 다른 문제가 발생하였습니다. 바울의 뒤를 추격하던 자들이 나타났습니다.(19절) 안디옥과 이고니온의 유대인들이었습니다. 루스드라에까지 바울 일행을 쫓아왔고, 바울을 돌로 쳐서 시외로 끌어 내치기까지 하였습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신적인 존재로 숭배받고 있었지만, 이제는 돌에 맞아 시신으로 간주 되어 버려지게 되었습니다. (20절)얼마 정도의 시간이 지난 후 바울은 어느 정도 회복되었습니다. 바울은 죽을 뻔한 위기를 경험하였던 그 성에 다시 들어가 하루를 지냈습니다. 이튿날 바울은 바나바와 함께 더베로 갔습니다. 그곳에서 또 복음을 전하고 많은 사람들을 제자로 삼았습니다. 바울일행은 안디옥을 떠나 구브로 섬을 들렀다가 비시디아 안디옥을 거쳐 이고니온과 루스드라를 거쳐 바울의 고향인 다소 쪽으로 향하는 것이 나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놀랍게도 루스드라와 이고니온과 안디옥 왔던 길로 되돌아갑니다. 긴 여행을 떠나야 하는 엄마가 집에 남겨진 아이가 걱정되어 먹을 것을 챙겨주러 오듯이 거쳐왔던 지역들을 다시 살펴봅니다. 쫓겨 난 곳, 도망친 곳, 죽을 뻔한 곳으로 다시 돌아가 그들의 마음을 굳게 하였습니다. 바울이 그들에게 아주 중요한 권면을 하는데 우리 22절 말씀 같이 읽겠습니다.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행14:22)
한글 번역에는 생략되어 있지만 이 문장에는 원래 “반드시 ~ 해야 한다.”를 의미하는 조동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조금 더 정확하게 해석을 하면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환란을 받는 일이 이어질 수 있으니 단단히 각오하십시오.’ 정도가 아니라 "환란을 받는 일은 받드시 따라오게 됩니다."의 의미로 환난이 뒤따라 오는 것은 필수임을 알리는 것입니다. 지난 날의 삶을 돌이켜 우상을 섬기며 살던 삶을 청산하고, 세속적인 가치관을 벗어나게 된다면 당연히 어떤 형태로든 복잡한 일들이 이어지게 됩니다. 정의롭게 살아가는 것,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이 어디 쉬운 일입니까? 이런 일은 불편함 속에 자신을 내던지는 것 아닙니까? 십자가를 지고 살아가는 것은 장난이 아닙니다. 바울은 바로 복음의 그러한 진리를 그들에게 다시 상기시킨 것입니다.
바울은 그 일까지를 마치고 다시 온 길을 돌아와 안디옥 교회로 향합니다. 1차 선교의 마무리에서 사도행전에서는 독특한 표현이 등장합니다. 26절 27절 같이 읽겠습니다. “26 거기서 배 타고 안디옥에 이르니 이곳은 두 사도가 이룬 그 일을 위하여 전에 하나님의 은혜에 부탁하던 곳이라 27 그들이 이르러 교회를 모아 하나님이 함께 행하신 모든 일과 이방인들에게 믿음의 문을 여신 것을 보고하고”(행14:26~27) 교회의 시작도, 선교의 시작도 하나님이심을 밝히며, 그들의 선교는 하나님께서 친히 행하신 일이었으며, 함께 행하신 일이었음을 보고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본문은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게 되어 걸어 본 적이 없는 자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쩌면 그 사람의 모습은 루스드라에 있던 특별한 한 명의 모습이 아니라 루스드라의 시대적 분위기, 그 사회의 분위기를 대표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루스드라에 있던 사람들은 복음을 기준으로 나면서부터 영적으로는 걸어 본 적이 없는 자였습니다. 무엇이 자신을 기쁘게 할 수 있는지를 모르던 자였고, 자신이 인생이 무엇으로 온전해 질 수 있는지도 알지 못하던 자였습니다. 주어진 인생 속에서 자기 욕심을 숭배하던 우상숭배를 떠날 수 없던 자였으며, 그들의 인생이 우상숭배인지도 모르며 살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복음이 전해졌습니다. 복음은 먼저 그들이 어떤 모습으로 우상숭배를 하고 있었는지 낱낱이 밝혀내었습니다. 제우스, 헤르메스 등의 이름이 나오기는 하지만, 결국에는 그 신들을 통해 무엇인가를 얻고자 하였던 그들의 마음속 깊은 곳의 본질을 밝혀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복음이 가져다주는 능력은 동일합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복음은 우리 스스로가 느끼는 결핍 의 충족을 목적으로 하지 않습니다. 우리 스스로는 잘 깨닫지 못한다 할지라도 우리가 잃어버린 더 근본적인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잃어버린 것은 태초에 하나님께서 창조하실 때 허락하셨던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그리스도 안에서 예정하신 뜻이며, 에덴동산을 누릴 수 있는 질서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지켜야 할 질서, 허락하신 인간 관계 속에서 지켜야 할 질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세상을 살아가는 질서입니다. 그것을 잃어버린 채 다른 것을 채우는 일은 더러워진 잔에 물을 채우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회복해야 할 것은 우리 스스로가 결핍을 느끼는 부분이나 무너졌다고 생각하는 삶의 한 부분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처음 우리에게 허락하신 그 거룩한 질서, 그리스도입니다. 신앙은 결핍을 채우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신 본래의 자리를 되찾는 회복의 여정이기 때문입니다. 바라옵기는 오늘 함께 예배하는 모든 분들이 결핍을 느끼는 그 자체를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 더 근본적인 결핍을 채우시는 하나님을 주목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당장은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 환난처럼 느껴질 때도 있겠지만, 주께서는 그 모든 일을 생명으로 심으셔서 위대한 나무로 자라나게 하셨음을 기억하고, 우리의 삶 속에서도 하나님이 함께 행하신 일이 드러날 수 있도록 순종의 걸음을 걸어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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