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퍼스타K, KPOP스타, 싱어게인 등 오디션 프로그램이 크게 유행이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저는 이런 오디션 프로그램을 아주 재미있게 봤었는데,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지만 꿈을 이루기 위해 한 노력들을 보는 것도 재미있었고, 음악을 좋아하는 한 사람으로서 전문가들이 각자의 기준으로 평가를 하는 것도 재미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프로그램을 보다보면 특별한 점이 하나 있었습니다. 거기에 나온 사람들은 가수라는 꿈을 이룰 수 있는 일생 일대의 기회를 어떻게 해서든 붙잡기 위해 간절한 마음으로 나온 것이었지만 심사위원들의 평가는 아주 냉정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한 프로그램에서 심사위원 중 한 사람이 나누어주는 이야기를 듣고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를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사람들 중 현재의 실력이 가수를 기준으로 생각해보면 현저하게 떨어지는 사람이 있는데, 심사위원이라면 그런 사람들에게 헛된 꿈을 갖게 만들어 희망고문을 하면 안 되고, 가혹하게 느껴질 정도로 냉혹한 평가를 하여 그 꿈을 접던가, 아니면 새롭게 태어나는 마음으로 정말로 독하게 노력하던가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개인적인 의견이 전혀 없을 수 없겠지만, 심사위원들은 전문가의 입장으로 냉정한 평가를 해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던 것입니다.
제가 자녀를 키워보니까 아버지로서 무엇을 해줘야하는지 고민이 많이 되더라구요. 만일 여러분들에게 자녀가 있고,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무엇을 해주겠습니까? 두 가지 중에 한 번 골라볼까요? 1번 죽을 때까지 쓰고 남을 돈, 2번 언제 어디서든지 바르게 살아갈 수 있는 지혜 둘 중 어떤 것을 해주시겠습니까? 저는 그럴만한 돈이 없기도 하지만, 만일 그럴만한 돈이 있다 하더라도 저의 아이들에게는 어디가서 손가락질 안 받고, 함께 하는 이들에게 기쁨이 되는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는 지혜를 가르쳐주고 싶습니다.
'복음'은 하나님께서 아버지의 마음으로 우리에게 허락하신 것이라 생각됩니다. 이 땅에서 부족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저 같은 아버지와는 비교할 수 없는 하늘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것인데, 단순히 잠깐 기쁨을 누리거나 희망고문과 같이 긍정적인 마음만 느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창조하신 세상 속에서 가장 완전한 기쁨을 누릴 수 있도록 예정하신 질서, 즉, 그리스도 안에서 예정하신 명백한 기준을 하나님의 지혜로 알려주신 것이며, 그것을 회복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계속해서 바울의 사역에 대해 살펴볼 것입니다. 바라옵기는 이 내용을 살펴보는 가운데, 복음이 우리에게 가져다 주는 것이 무엇인지를 함께 고민해 보고, 복음이라는 명백한 기준 앞에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도 돌아볼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은혜로 허락하신 예배의 시간 복음의 목적에 맞게, 또 복음에 합당한 모습으로 조금 더 성장할 수 있는 은혜의 시간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바울은 비시디아 안디옥 회당에서 구약의 역사와 함께 다윗의 자손인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선포하였습니다. 회당에서 바울의 설교를 들은 사람은 더 듣기를 원하였고, 바울과 바나바를 따르는 사람도 생겼습니다. 하지만 복음은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는 일로만 이어지지는 않았습니다. 복음은 기쁜 소식이긴 하지만 모든 이들이 좋게 받아들이지는 않습니다. 복음은 사람의 마음을 즐겁게하는 소식이 아니라 태초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실 때의 기준에 대한 내용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 속에서의 진리와 비진리, 빛과 어둠, 선과 악을 구분하는 정확한 기준에 대한 내용이 복음인 것입니다.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누군가는 바울의 설교를 듣고 기쁨과 성령에 충만해졌지만, 유대인들 중에는 바울의 무리를 보며 시기가 가득한 자들도 있었습니다. 바울의 설교를 반박하고 비방하기도 하였으며, 결국에는 사람들을 동원하여 바울과 바나바를 그 지역에서 쫓아내었습니다. 바울 일행은 이제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동쪽으로 약 160km떨어진 이고니온으로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전과 같이 그곳에서도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 복음은 전하였습니다. 유대와 헬라의 허다한 무리가 믿게 되었지만, 비시디아 안디옥에서처럼 모두가 다 믿었던 것은 아닙니다. 역시 마찬가지로 유대인들 중에는 이방인들의 마음을 선동하여 형제들에게 악감을 품게하는 자들도 있었습니다.
사도들은 그들의 태도에 굴하지 않았습니다. 그와 같은 반응은 전혀 의외의 일이 아니었고, 쌩뚱맞은 일도 아니었습니다. 복음이 전해지는 곳에서는 어디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으며, 당연하고도 자연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사도들은 그곳에서 오래 머물며 주를 힘입어 담대히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인간적인 감정으로는 무너질 수 있고, 피할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사도들은 주께서 말씀 하신 일에 집중하고 있었고, 그들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습니다.
우리나라의 초기 선교 역사를 살펴보면 우리나라는 선교하기가 정말로 힘든 나라 중 하나였습니다. 조선은 서양 문물에 대한 경계심 때문에 폐쇄적인 나라였는데, 서양인들이 조선 땅에 발을 붙이는 것은 물론이고, 언젠가 설교에도 말씀드린 것처럼 서양 신으로 불리는 하나님의 '하' 예수의 '예'자만 꺼내도 죽이는 나라였습니다. 서울 합정역 양화진 옆에는 절두산 순교자 묘지라고 있는데, 병인박해라고 해서 조선 말 흥선대원군이 천주교 신자들을 박해하며 목을 잘라 처형한 곳입니다. 1866년부터 1872년까지 6년간 박해가 이어졌다고 하는데, 1870년까지 몇 명 정도가 죽었을까요? 천주교의 기록에 의하면 8천명 정도가 죽었다고 합니다.
누군가의 눈에는 무서운 나라, 무식한 나라, 끔찍한 나라로 비춰졌겠지만,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다르게 보였습니다. 불쌍한 나라, 안타까운 나라, 긍휼이 필요한 나라, 사랑과 은혜가 필요한 나라로 비춰졌습니다. 그런 끔찍한 역사가 있었지만 하나님은 조선을 포기하지 않으셨고, 하나님의 마음을 가진 자들도 대한민국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죽음을 각오하고 이 땅을 찾아왔으며, 이 땅에 자신이 누리는 안정과 평안보다 조선 땅에 흘러야 할 안정과 평안을 먼저 생각하였습니다. 그런 선교사님들의 모습이 바로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도들의 모습입니다. 비록 현실은 두렵고 떨렸지만, 그들은 그땅이 잃어버리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보았고, 그곳에서 무엇을 해야하는지 더욱 분명히 보게 되었습니다. 모든 조건과 상황, 환경을 뛰어넘어 사도들은 자신들이 해야 하는 일에 집중하였습니다.
그런데 이곳에서 특별한 일이 이어졌습니다. 우리 3절말씀 같이 읽어볼까요? "두 사도가 오래 있어 주를 힘입어 담대히 말하니 주께서 그들의 손으로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여 주사 자기 은혜의 말씀을 증언하시니"(행14:3) 잠깐 사도행전 4장으로 거슬러 올라가겠습니다. 사도행전 4장에서는 베드로와 요한이 공회에 잡혀갔다가 돌아온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전 미문의 앉은뱅이를 일으킨 일과 사도들의 가르침 때문에 사람들이 따르는 것을 보고 유대인 지도자들은 베드로와 요한을 붙잡아왔습니다. 하지만 공회에서는 그들의 잘못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처벌할 방법을 찾지 못하던 관리들은 결국 베드로와 요한을 놓아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공회에서는 베드로와 요한을 놓아주었지만, 다음에 또 이런 일이 발생하면, 즉, "예수"를 전파하다가 걸리면 죽을 줄 알으라는 협박이 있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풀려나 교회로 돌아와 자신들에게 있었던 상황을 알렸습니다. 당연히 "예수"의 이름을 전하다가 걸리면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렸겠죠. 그런데 교회가 이렇게 반응합니다. 사도행전 4장 29~30절 같이 읽겠습니다. “29 주여 이제도 그들의 위협함을 굽어보시옵고 또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시오며 30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시옵고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하더라”(행4:29~30) 바울이 회심하기도 훨씬 전이었던 이때의 기도가 지금 사도행전 14장에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 기도와 같은 결의 믿음으로 사도들은 사역을 하고 있었고, 성령께서는 그때의 기도에 응답하듯이 사도들을 통하여 주의 일을 행하고 계십니다.
다시 3절의 표현을 보면 하반절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께서 그들의 손으로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여 주사 자기 은혜의 말씀을 증언하시니"(행14:3下) 여기에서 중요한 표현이 하나 등장합니다. 바로 '주께서 행하게 하여 주사'라는 표현입니다. 종종 사역을 하시는 분들 중 치유, 예언 등 표적과 기사를 자신의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처럼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통해 알 수 있듯이 그런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어떤 특별한 능력 때문에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주께서 행하게 하여주시는 일에 순종함으로 나타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런 일을 통해 나타나는 결과는 한 가지인데,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난 하나님 은혜의 역사입니다.
복음이 분명하게 전해질수록 이고니온의 분위기는 비시디아 안디옥에서처럼 반감은 더욱 거세어졌습니다. 복음은 교양강좌나 종교적 담론, 자기 계발 이론과 같은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정확한 기준으로 각자의 실체를 드러내는 것이며, 각자의 소속을 밝혀줍니다. 대한민국의 독립 소식을 한 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독립은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기뻐해야 할 소식이지만, 모두가 기뻐하지는 않았습니다. 개중에는 독립이 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고, 독립운동하는 자들을 방해하는 자들도 있지 않았습니까? 처음에는 확실하게 자신의 입장을 밝힌 사람만 정체성이 드러났겠지만, 독립의 일이 진행되면 될수록 숨어있던 자들의 실체도 분명히 드러났을 것입니다.
복음이 전해질 때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복음이 전해지기 전에는 서로의 정체성에 대해, 또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사람들은 깊이 고민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을 통해 이고니온에 선명한 복음이 전해지자 이고니온은 둘로 갈라졌습니다. “유대인을 따르는 자와 두 사도를 따르는 자”(4절)의 두 부류로 나뉘어졌습니다. 복음은 분명 둘로 나뉘어졌던 것을 하나 되게 하는 은혜의 소식이기도 하지만, 하나 될 수 없던 것, 하나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을 구분 짓고 떼어놓는 거룩한 소식이기도 합니다.
복음의 소식을 들은 자들 중에는 두 사도를 모욕하며 돌로 치려고 달려드는 자들도 있었습니다. 비시디아 안디옥에서는 나름 곱게 추방을 당했지만, 바울 일행은 이고니온에서 도망쳐서 나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단순히 이 모습만 보면 선교의 실패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결과가 어떻습니까? 우리 6~7절 말씀 같이 읽어볼까요? “6 그들이 알고 도망하여 루가오니아의 두 성 루스드라와 더베와 그 근방으로 가서 7 거기서 복음을 전하니라”(행14:6~7) 안디옥에서 구브로섬을 향했던 바울 일행은 비시디아 안디옥을 거쳐 이고니온으로 갔다가 이제 루가오니아의 루스드라와 더베를 향해 나아갔습니다. 뚜렷한 목적과 계획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자신들에게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다 보니 여러 상황들로 인해 자리가 옮겨졌고, 옮겨진 그 자리에서 바울 일행은 계속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뚜렷한 목적과 계획은 없었지만, 이상하게도 복음은 확장되어져 갔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13장부터 이어지는 전도 여행을 보면 바울 일행은 쫓겨나기도 하고, 도망치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은 그들에게 별로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지금 주어진 상황 속에서 해야 할 일을 감당하는 것이었습니다. 어떤 이유로 자리를 옮기게 되던지 그들은 원망하지 않았고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현재 주어진 상황을 앞날을 위한 수단으로 여기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은 어느 곳에 있든지 복음을 전하였고, 복음의 흔적을 남겼습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과거가 아니었습니다. 또한 자신의 앞날도 아니었습니다. 오늘이었고 지금이었습니다. 영원한 앞날을 향한 푯대를 바라보고 있긴 하였지만, 그 일을 위해서 필요한 것은 현재 주어진 상황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었습니다. 별의별 상황들이 동원되어 그들의 자리는 옮겨졌지만, 옮겨진 조건과 상황에 그들은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그곳이 어디이든, 어떤 곳이든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자리라면 그들은 최선을 다했습니다. 복음은 점점 더 광범위하게 퍼져나갔으며, 하나님 나라는 점점 확장 되어져 갔습니다.
저는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사명이 이와 같다고 생각합니다. 과거에 매여 원망과 불평으로 오늘을 갉아먹지 않아야 합니다. 미래를 위한 수단으로 오늘을 이용하지 않아야 합니다. 무엇보다 현재 주어진 것들을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최선으로 여기며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허락하신 뜻에 순종함으로 지금을 또 오늘을 채울 수 있어야 합니다.
저는 함께 예배하는 모든 형제님들이 그와 같은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군복무 역시 정말로 특수한 환경 속에 있는 것 아닙니까? 강원도 홍천 11사단에 오게 될 것이라고 계획한 분들도 없었을 것입니다. 어쩌다보니 삶의 자리가 옮겨지게 되었고, 전혀 계획에 없던 이곳에서 1년 6개월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이곳에서 우리가 감당해야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가장 본질적인 것은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 안에서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구별하여 해야 할 일을 하고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주어진 지금과 오늘에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어진 상황에서 어떤 일을 하며 지금과 오늘을 보내고 있습니까? 바라옵기는 오늘 함께 예배하는 모든 형제님들이 주의 복음이 확장될 수 있도록, 하나님 나라의 기쁨과 충만함이 확장될 수 있도록 순종하는 믿음의 백성들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우리에게 허락하신 지금과 오늘을 통해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알려주신 선함이 확장되고, 하나님의 의가 확장되며, 생명이 확장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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