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본문에서 바나바와 바울 일행은 새로운 곳으로 나아갑니다. 안정이 아닌 순종으로 나아가는 이들의 걸음 속에서 어떤 일이 펼쳐지는지를 살펴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들을 통해 전달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살펴보는 것은 더 중요합니다. 오늘 이 시간 거룩한 성령의 행진, 선교의 행진을 살펴보는 가운데, 이 말씀을 듣는 우리도 거룩한 발걸음으로 나아갈 수 있는 믿음의 성도, 믿음의 공동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우리 먼저 13절 말씀 같이 읽겠습니다. “바울과 및 동행하는 사람들이 바보에서 배 타고 밤빌리아에 있는 버가에 이르니 요한은 그들에게서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고”(행13:13) 13절 한 절에는 여러 가지 내용이 담겨져 있는데 잠시 살펴보겠습니다. 먼저는 ‘바울과 및 동행하는 사람들’입니다. 13장 시작(1절)에서 바울은 뒤에 따라오는 이름이었습니다. 안디옥 교회의 지도자를 소개할 때도 제일 마지막에 나오는 이름이었습니다. 하지만 구브로 섬의 바보에서 바울의 이야기가 전면에 드러나더니 이제는 사도행전의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바울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13절에서 바울의 선교팀은 바보를 떠나 배를 타고 밤빌리아에 있는 버가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버가는 여기 지도를 보면 구브로 섬에서 북쪽으로 바다 건너편에 있는 지역입니다.
바울의 일행은 구브로 섬 바보에서 버가로 넘어가 비시디아의 안디옥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비시디아 안디옥은 산악 지대였는데, 버가에서 비시디아 안디옥으로 가는 길은 해발 1000m정도 되는 고원을 넘어 160Km정도를 가야할 정도로 험난했습니다. 또한 가는 경로에는 강도, 산적들이 있던 곳으로도 유명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그런 험난함보다 더 힘든 일이 있었습니다. 바로 마가 요한의 이탈, 요한이 그들에게서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는 것입니다. 마가 요한이 팀을 이탈한 이유에 대해서는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좋게 떠난 것 같지는 않습니다. 사도행전 15장에는 몇 년 후 2차 선교 여행을 시작할 때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나바는 마가라 하는 요한도 데리고 가고자 하나 바울은 밤빌리아에서 자기들을 떠나 함께 일하러 가지 아니한 자를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 하여 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서니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배 타고 구브로로 가고"(행15:37~39)
내용을 잠시 보면 바나바가 요한을 데려가자고 제안을 하였지만, 바울은 밤빌리아에서 자기들을 떠나 함께 일하러 가지 않은 자를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고 합니다. 그냥 거절하고 끝난 것이 아니라 이 일로 인해 바나바와 바울이 심하게 다투고 갈라서는 일로 이어지기까지 합니다. 요한이 팀을 떠나 예루살렘에 돌아간 것에는 분명 좋지 않은 문제가 있었던 것 같고, 바울은 그 일을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던 것 같습니다. 군복무 중에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유격이든, 행군이든, 혹한기든 함께하는 사람들과의 관계가 좋으면 추억이 되기도 하고, 좋은 경험으로 남겨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일단 관계가 틀어지기 시작하면 모든 것이 다 힘들어지는데, 바울의 선교팀은 이와 같은 일로 인해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힘든 상황 속에서 선교의 행진을 이어가게 된 것입니다.
바울 일행은 비시디아 안디옥에 도착했습니다. 역사적 기록에 의하면 B.C. 210년경 유대인 2,000가구 정도가 이곳에 이주하여 회당들이 많이 있었다고 전해지는데, 바울은 안식일에 회당을 향했습니다. 이번에는 이전과 같이 복음전도의 목적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안식일이었음을 밝히는 것으로 보아 회당의 예배를 참여한 것으로 보입니다. 당시 회당 예배는 오늘날 우리가 드리는 예배에서 저와 같이 설교자가 특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회당장이 자유롭게 선정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회당 예배 속에는 권면의 시간이라고 해서 랍비나 방문자에게 요청하여 진행되는 시간이 있었는데, 엄밀히 이야기하면 설교라기보다는 권면의 말씀을 전달하는 것으로 생각하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아마도 그동안의 회당에서 벌어진 일들과는 달리 이곳에서는 회당장이 바울 일행에 관한 소문을 듣고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15절을 보면 "율법과 선지자의 글을 읽은 후에 회당장들이 사람을 보내어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만일 백성을 권할 말이 있거든 말하라 하니"(행13:15) 개역개정에서는 조금 무섭게 말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회당장은 바울 일행에게 아주 공손하게 요청을 하였는데, “두 분께서 혹시 권면할 말씀이 있거든 한 말씀 해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라는 내용입니다.
이제 바울의 첫 설교가 시작됩니다. 바울은 일어서서 손짓까지 하며 설교를 하였다고 하는데, 원래 회당 안에서의 설교는 앉아서 했다고 전해집니다. 하지만 바울은 비시디아 안디옥의 회당에서 웅변가와 같은 모습으로 열정적인 설교를 하였습니다. 엄청 긴 내용인데 제가 간단하게만 소개하며 넘어가겠습니다.
바울은 먼저 출애굽을 시작으로 구약의 이스라엘 역사에 대해 언급을 합니다. 애굽에서의 구원, 광야 생활, 가나안 정복, 사사 시대, 사울 왕, 다윗 왕까지 이야기를 하는데, 바울이 이야기하는 이스라엘 역사의 핵심은 ‘하나님의 주권과 하나님의 인도하심’입니다. 애굽에서 건져내신 것도, 광야에서 그들을 보살피신 것도, 가나안을 정복하고 정착하게 하신 것도, 사사에 이어 왕을 폐하시고 세우시는 모든 일은 하나님께서 친히 주관하신 일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구약의 모든 역사 속에서 하나님 빼고는 어떤 것도 설명할 수 없는 민족이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사울을 폐하신 것에 이어 다윗을 왕으로 세우신 이야기로 이어갑니다. 바울은 다윗에게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하는데,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이며 다윗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다 이루리라고 하신 내용인데(삼상 13:14, 시89:20), 바울은 다음절에 그 내용이 무엇인지를 밝힙니다. 우리 23절 말씀은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대로 이 사람의 후손에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구주를 세우셨으니 곧 예수라”(행13:23)
바울은 이어서 예수를 증거합니다. 다윗의 후손으로 오신 예수는 침례 요한의 증언을 받으시며 이 땅에 오셨습니다. 하지만 유대 지도자들은 구원의 말씀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를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은 말씀이 육신되어 오신 예수를 알아보지 못하였고, 안식일마다 읽는 예언자들의 말도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로부터 아무 죄를 찾지 못하였지만, 그들은 예수를 정죄하였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예수를 죽이는 일이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이라고 여겼을 것입니다. 예수를 죽인 것은 하나님에 대한 불신앙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하나님을 향한 믿음, 하나님을 향한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문제는 그들의 믿음과 마음이 잘못되어 있었다는 것이고, 또한 그들이 그 잘못됨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사랑을 위한다고 하며, 사랑을 이야기하지만 정작 그들이 잃어버리고 있는 것이 사랑이라는 것을 몰랐고, 정의를 위한다고 하며, 정의를 이야기하지만 정작 그들이 잃어버리고 있는 것이 정의라는 것을 몰랐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율법을 위한다고 하며, 율법을 이야기하지만 그들은 말씀이 육신되어 오신 예수를 알아보지 못하고 결국에는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그런데 더 문제는 그런 일을 저지른 그들이 마치 하나님을 방해하는 사탄 마귀를 죽였다고 생각하며 하나님 앞에서 자신들이 잘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이 죽인 예수를 다시 살리셨습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모든 율법의 주인 되신 하나님께서 예수를 죽인 자들과 죽임당한 예수 중 너희들이 죽인 예수가 바로 내 아들이라고 하시며 예수의 손을 들어주신 것입니다. 바울은 이어서 예수의 부활에 대해 아주 구체적이고 세밀하게 설명합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서 하신 일들을 이야기하는 것보다 우리가 어떻게 생각하든지 하나님께서 예수의 손을 들어주셨음을 확실하게 밝히는 것이 지금 상황에서 더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어서 율법이 아닌 믿음을 강조합니다. 이것은 율법이 불필요하다는 것이 아니라 율법만을 향한 잘못된 사랑 때문에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였지만,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신 예수를 믿는다면 의롭다 하심을 얻을 것이라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선지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신 것이 일어나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하며, 지금 내가 한 말을 비웃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누가 무엇을 말할지라도 도무지 믿지 않을 것이라고 하며 교만에 대한 책망으로 마무리합니다.
바울의 설교는 본문 상으로도 꽤 긴데, 실제로는 훨씬 더 길었을 것이라고 추측을 합니다. 많은 내용들을 생략하여서 제대로 전달이 된 것인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바울은 이런 내용을 비시디아 안디옥 회당에서 전했습니다. 바울이 전한 내용은 그들이 흥미를 가지고 있었던 사건이나, 정치, 문화 등의 이야기가 아니었습니다. 예수의 복음, 부활의 복음이었습니다. 42절과 43절에는 유대인 회당에서 설교를 마친 바울이 나갈 때 사람들의 반응이 어떠하였는지를 보여줍니다. 42절~43절 말씀 같이 읽겠습니다. “그들이 나갈새 사람들이 청하되 다음 안식일에도 이 말씀을 하라 하더라 회당의 모임이 끝난 후에 유대인과 유대교에 입교한 경건한 사람들이 많이 바울과 바나바를 따르니 두 사도가 더불어 말하고 항상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으라 권하니라”(행13:42~43)
회당에 있던 사람들은 바울의 설교를 더 듣고 싶어하였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를 따르는 사람도 생겼습니다. 비시디아 안디옥의 유대인 공동체 속에서 새로운 기독교 공동체가 발생하게 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44절에는 그 다음 안식일에 대한 내용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도 같이 읽어볼까요? “그 다음 안식일에는 온 시민이 거의 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여 모이니”(행13:44) 바울의 설교가 성공적이었음을 강조하기 위해 과장해서 표현한 것이라 생각되는데, 비시디아 안디옥의 온 도시가 떠들썩해질 정도로 많은 무리가 바울의 설교를 듣기 위해 회당으로 몰려왔음을 표현하는 내용이라 생각됩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그 모습을 보고 가만히 있지 않았습니다. 시기가 가득하여 바울이 말한 것을 반박하고 비방하였습니다.(45절) 바울과 바나바는 그들에게 굴하지 않았습니다. 자신들이 전해야 할 말씀, 해야 할 일을 분명히 알고 있었으며, 그 일을 분명히 감당하고 있었습니다. 정확하고 명백한 복음을 최선을 다해, 정직하게, 또 담대히 전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자신들의 믿음에 결부시키지 못한다면 문제는 내가 아니라 너희들이라고 합니다.(46절) 먼저 유대인들인 당신들에게 복음을 전했지만, 더 이상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기로 작정하였다고 생각이 들어 이제 우리는 이방 사람들에게 나아간다고 하며 돌아섭니다.
이방인들의 태도는 유대인들과 전혀 달랐습니다. (48절)이방인들은 듣고 기뻐하였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 된 자는 다 믿게 되었다고 합니다. 비시디아 안디옥에 주의 말씀은 계속해서 퍼져갔지만, 그들은 유대인의 시기 때문에 쫓겨나 동쪽으로 120Km 떨어진 이고니온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이곳에서의 사역 결과에 대해 성경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이 충만하니라”(행13:52) 여기 나온 제자들은 바울과 바나바를 통해 기독교인이 된 비시디아 안디옥의 거주자들을 뜻하는 말인데, 초대교회의 모습과 같이 아름다운 모습으로 세워지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복음 전도는 결코 듣는 이들이 원하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알아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왜 그것을 알아야 하는 것인지를 알려주며, 믿어야 하는 분이 누구인지, 그분이 왜 믿을만한 분인지를 가르쳐 줄 수 있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그 모든 것이 자신의 생각이나 견해가 아니라 성경을 통해 전달할 수 있어야 합니다. 바울의 설교에 재미나 감동은 없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전하였고, 깊은 신학을 바탕으로 분명한 복음을 선포하였습니다. 분명 바울의 설교는 대단했습니다. 그런데 대단한 것은 바울의 설교만이 아니었습니다. 그곳에는 들으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자신들이 듣고 싶은 이야기에 반응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들어야 할 이야기에 반응하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히브리서 4:12~13절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너무 유명한 말씀인데 같이 읽어볼까요? “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13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 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히4:12~13)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연약함, 우리의 부족함, 우리의 천박함, 우리의 거짓됨, 우리의 어리석음 등을 드러내며 우리의 모든 것을 찔러 쪼개며 아프게 할 때가 있습니다. 어느 누군가는 그런 자신의 실체가 드러나는 것을 불편해하며 말씀을 멀리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또 다른 누군가는 그런 자신의 실체가 드러나면 정직하게 인정하고, 더 온전한 모습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가기도 합니다.
듣고 싶은 말만 듣는 사람은 결코 온전한 모습으로 성장 할 수 없습니다. 제가 요즘 런닝을 즐기고 있는데 일주일에 4~5회 정도로 약 30km를 뜁니다. ‘런닝’이라고 하면 운동이기 때문에 좋은 것 아닙니까? 그런데 전문가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꼭 그렇지도 않더라구요. 자세가 중요한데, 잘못된 자세로 뛰면 건강해지기보다는 발목, 무릎, 허리가 망가지는 경우도 많다고 합니다. 만일 누군가가 잘못된 자세로 뛰면서 ‘아 무릎이 너무 아픈데? 무릎 건강을 위해서 더 열심히 해야겠다.’고 한다면 어떨까요? 뭔가 이상하지 않습니까?저도 물론이고, 우리 장로님, 권사님, 집사님들도 물론이지만, 무엇보다 20대 파릇파릇한 청년의 시기를 지나는 우리 형제님들이 하고 싶은 일보다 해야 할 일들이 무엇인지를 고민하며, 들어야 할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형제님들이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바라옵기는 혼탁하고 어지러운 이 시대를 살아가는 동안, 이렇게 예배에 참석하며 성경 말씀을 함께 살펴보는 가운데 예수의 복음, 부활의 복음을 통해 우리가 진짜로 알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 믿어야 할 분이 누구인지에 대해 답을 내릴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그리하여 비시디아 안디옥의 제자들과 같이 기쁨과 성령이 충만한 믿음의 백성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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