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루살렘에 있는 교회를 박해하고, 다메섹에까지 나아가 예수를 따르는 자들을 잡아오려고 하였던 사울은 거의 다메섹에 이르렀을 때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하나님은 아나니아를 바울에게 보내시며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니"(행9:15~16)고 하셨습니다.
그후 사울의 인생이 멋지게 펼쳐진 것은 아닙니다.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하나님의 그릇이긴 하였지만, 다메섹에서 전도를 하다가 유대인들에게 쫓겨 예루살렘으로 피신을 하였고, 예루살렘에서도 복음을 증거하다가 쫓기는 신세가 되어 고향인 다소에까지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고향 다소에서 사울은 약 10년 정도 지냈습니다. 그곳에서 무엇을 하였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그 이후 사역과 서신서를 통해 부르신 사명을 이루기 위해 전념하지 않았을까 어렵지 않게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다소에서 10여년 간 지내던 사울은 바나바의 요청에 의해 안디옥 교회에서 동역하게 되었고, 그곳에서 한 명의 지도자로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감당하며 최선을 다해 교회를 섬겼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성령께서 안디옥 교회의 지도자들에게 임하셨습니다. 성령께서는 안디옥 교회의 지도자들에게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안디옥 교회에서 바나바와 사울이 빠지는 것은 정말로 큰 일이었지만, 안디옥 교회는 순종하였습니다. 금식하며 기도하였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냈습니다. 성경에서 공식적으로 선교사를 처음 파송한 기록입니다.
사실 얼핏 보면 성경 장수로도 몇 장 안 넘어가기에 하나님께서 사울을 부르시고 곧바로 그 일을 이루어가신 것처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울이 부르심을 받고 선교사로 파송되기까지는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흘렀습니다. 부르심을 받고 지금까지의 일이 진행될때까지 사울의 마음이 어땠을까요? 여러분들에게 이와 같은 일이 일어나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대단한 사람이 ‘나랑 함께 하지 않을래?’라고 해서 기대하고 있었는데, 일 년이 가고, 이 년이 가고, 오 년이 가고, 십 년이 지나간다면 그래도 그 약속을 잘 붙들 수 있겠습니까?
과거 저의 경우에는 예전에 함께 사역하고 싶었던 목사님이 함께 할 수 있도록 곧 자리를 만들테니까 조금만 기다리라고 하셨던 적이 있었습니다. 딱 군교회 사역을 시작하기 전이었는데 마침 코로나가 터지고, 여러 상황들이 겹치면서 일이 잘 진행되지 못하였습니다. 그분의 말을 듣고 기다리던 처음 1~2년은 희망고문처럼 느껴지더라구요. 그런데 저도 군교회 사역에 집중하게 되었고, 시간이 지나다보니까 자연스럽게 잊혀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사울은 그 약속을 잘 붙들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아마도 그를 부르신 분이 세상 사람이 아닌 변함없는 신실하심으로, 그것이 언제가 되었든지 약속하신 것을 하나님의 때에 지어 성취하실 수 있는 하나님이심을 기억하였을 것입니다. 구약의 기록 속에서 아브라함의 하나님, 요셉의 하나님,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약속하신 것을 곧바로 이루시진 않으셨지만 수 년이 흐르고 수십 년이 흐르더라도 정확하게 하나님의 때가 되면 약속 대로 이루시는 분이심을 믿었을 것입니다.
성경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일하심은 일방적으로 무엇인가를 이루어가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온전히 믿는 하나님의 사람과 함께 그 일을 이루어가려고 하셨습니다. 사울은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 동안 계속 마음과 믿음을 지켜갔습니다. 그리고 그때가 언제일지는 몰라도, 하나님께서 자신을 부르실 때를 기다리며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감당했습니다. 미움 받기도 하고, 쫓겨다니기도 하고, 갇히기도 하며 사도로서의 모습을 갖춰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드디어 사울에게 하나님의 때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울을 통해, 또 사울과 함께 땅끝까지 복음이 퍼져나가는 일을 시작하셨습니다.
사도행전 13장부터 본격적으로 사울의 이야기가 시작되며 공식적으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그 이름, 바울로 불려집니다. 오늘 이 시간, 바울의 사역, 선교의 사역을 함께 살펴보는 가운데, 성도와 교회에 허락하신 선교적 사명이 무엇인지 함께 고민해 보고, 선교는 과연 무엇인지, 어떻게 해야 되는 것인지에 대해서도 답을 찾아갈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무엇보다 이 모든 일들을 통해 우리의 부르심과 우리 교회의 부르심에 대해 정리해 볼 수 있는 은혜의 시간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바나바와 바울의 첫 선교지는 ‘구브로 섬’이었습니다.(4절) 구브로는 여기 지도를 보면 지중해 동쪽 끝에 있는 섬입니다. 지금은 키프로스 또는 사이프로스 공화국으로 불리는 곳인데, 아주 유명한 관광지입니다. 이 섬은 지중해의 섬들 중 세 번째로 큰 섬이며, 제주도의 약 5배 정도 크기라고 합니다. 구브로는 안디옥 교회의 지도자였던 바나바의 고향이기도 하였고, 안디옥 교회의 성도들 중에서도 이곳 출신들이 있었는데 아마도 이런 연유들로 해서 첫 선교지로 정해지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아무튼 바나바 일행이 제일 먼저 도착한 곳은 구브로 섬의 동쪽 해안에 있는 ‘살라미’라는 도시였습니다.(5절) 그들이 거기서 맨 처음 찾은 곳은 그곳에 있던 유대인의 회당이었습니다. 여기서 잠깐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바울은 선교일을 이어갈 때, 어떤 지역에 도착하면 늘 유대인 회당을 찾았는데, 왜 유대인 회당을 찾은 것일까요? 사실 유대인들의 눈에 띄지 않는 것이 신상에 도움이 되기에 어쩌면 가장 늦게 찾아야 되는 곳 아니었을까요? 그리고 유대교 사람들은 예수 믿는 사람을 싫어하고, 멀리하며, 박해하던 자들이었는데, 왜 굳이 그들을 찾아간 것일까요?
그것은 신앙의 시작 또는 전환에서 나타나는 독특한 특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언젠가도 말씀드렸듯이 신앙은 결핍에 의한 반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연약함 또는 한계를 느끼는 지점에서 그것을 충족시켜줄 초자연적인 누군가를 찾게 되는 것이죠. 사람들이 돈을 찾고 권력을 찾는 이유도 다 그 때문이고, 그들에게는 그것이 종교로 자리매김하게 된 것입니다. 바울이 유대교 회당을 가장 먼저 찾게 된 이유는 그들의 결핍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과거 유대교의 일원이었으며 유대교의 미래를 책임질 촉망받던 인재였고, 유대교와 유대인에 대해서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메시아, 즉, 그리스도를 기다린 그들이 예수를 그리스도로 왜 받아들이지 못했는지, 그들이 어떤 부분에서 하나님을 떠나게 되었는지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누구보다 유대인의 결핍, 유대인의 소망을 잘 알고 있었고, 유대인들에게 필요한 복음이 무엇인지 그는 잘 알고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살라미에 있던 유대교의 회당에서 복음을 전할 때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또 어떤 결실이 있었는지 성경은 기록하지 않습니다. 아마도 이전에 그랬던 것처럼 쫓겨났을 가능성이 큽니다. 아무리 대단한 복음을 전한다 하더라도 받아들이는 것은 또 다른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바울의 부족함이나 사역의 부족함, 복음의 부족함을 증명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곳에서 열매를 거둘 수는 없습니다. 어느 곳에서는 밭을 갈아야 하고, 어느 곳에서는 씨를 뿌려야 합니다. 바울은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 속에서 그 일에 순종하며 나아가는 중입니다. 아무튼 바나바 일행은 살라미를 떠나 온 섬 가운데로 지나서 바보라는 곳에 이르게 되었습니다.(6절) 일단 이름이 재미있죠? 우리나라에도 부산 기장의 ‘대변리’, 전북 순창의 ‘대가리’, 충주에는 ‘야동리’와 같은 곳이 있는데, 주일학교 아이들이 참 좋아하는 지명이기도 합니다. 지도를 다시 보면 성경에 바보라고 불리는 이곳은 파포스라는 곳으로 살라미의 정 반대편, 구브로 섬의 서쪽 끝에 있는 도시입니다.
사도행전의 저자는 살라미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또 구브로 섬을 가로지르는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록하지 않습니다. 기록할 만한 큰 사건이 없었던 것일 수도 있고, 바보에서의 사역을 부각시키기 위해 의도적으로 기록하지 않은 것일 수도 있습니다. 아무튼 성경은 과정만 소개하며 바나바 일행이 바보라는 곳에 이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곳에서 바나바 일행은 두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바예수’라는 사람과 ‘서기오 바울’이라고 하는 사람입니다.
‘바예수’는 예수의 아들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예수’, ‘여호수아’, ‘호세아’는 다른 것처럼 보이지만, ‘구원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같은 단어입니다. 즉, ‘바예수’는 구원자의 아들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진짜 구원자의 아들이었겠습니까? 성경은 그가 유대인 거짓 선지자인 마술사라고 소개합니다. 마술사는 주술을 부려 치료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었는데, 거짓 선지자라는 말이 덧붙여 진 것으로 보아 지금으로 생각하면 ‘사이비 교주’ 같은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유대인들이 이 사람을 그냥 두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 사람이 어떻게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는지는 다음 절을 보면 어렵지 않게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바예수가 당시 구브로 섬을 총괄하던 총독 서기오 바울과 함께 있었다고 합니다. 총독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어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특이한 일이 이어졌습니다. ‘서기오 바울’에 대해 ‘지혜 있는 사람’이라고 설명하며, ‘바나바와 사울을 불러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였다’고 합니다.
여기 있는 ‘지혜’는 올바른 지식을 구하는 신중한 태도를 의미하는 말입니다. 서기오 바울은 아마 구브로섬을 통치하는 일에도 올바르게 잘 해왔던 것 같고, 자신의 인생에 대해서도 올바른 것에 대한 갈망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서기오 바울을 통해 ‘지혜 있는 사람’의 중요한 특징을 하나 발견할 수 있는데, ‘들으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지혜 있는 사람은 자신의 생각만을 고집하며, 자신의 생각만을 내세우는 사람이 아닙니다. 자신을 더욱 확장하기 위해 들으려고 하고, 배우려고 하는 사람입니다. 서기오 바울은 바예수와 함께하며 바예수의 말을 들으며 지내왔습니다. 하지만 서기오 바울은 그것이 전부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서기오 바울은 바나바와 바울을 불러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였습니다. 하지만 거짓 선지자인 마술사 바예수는 그 일을 가로 막으려 하였습니다. 자신의 이름처럼 자신만이 구원자의 아들이며, 다른 어떤 이야기도 들을 필요가 없다고 했을 것입니다.
사실 이 일은 우리 모두에게 주어지고 있는 영적 전쟁의 모습입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옆에 ‘바예수’와 함께 살아갑니다. 돈, 권력 등 행복을 채워줄 것 같이 우리를 속여 매이게 하는 것들에 마음을 빼앗기며 살아갑니다. 그러한 것들이 진짜 들어야 할 것들을 듣지 못하게 방해합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서기오 바울’이 가지고 있었던 ‘지혜’입니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을 전부로 여기며 선입견과 편견으로 귀를 닫고, 마음을 닫지 말아야 합니다. 자신을 확장 시키기 위해서는 일단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배워야 합니다. 그래야 건강한 분별력이 주어지며 판단은 그 후에 해도 늦지 않습니다.
이제 아주 중요한 내용이 펼쳐집니다. 성경에서 공식적으로 바울이라는 이름으로 처음 부르는 장면이자, 바나바보다 바울 중심으로의 내용이 시작되는 장면입니다. 우리 9절~11절 말씀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바울이라고 하는 사울이 성령이 충만하여 그를 주목하고 이르되 모든 거짓과 악행이 가득한 자요 마귀의 자식이요 모든 이의 원수여 주의 바른 길을 굽게 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겠느냐 보라 이제 주의 손이 네 위에 있으니 네가 맹인이 되어 얼마 동안 해를 보지 못하리라 하니 즉시 안개와 어둠이 그를 덮어 인도할 사람을 두루 구하는지라”(행13:9~11) 이것은 선교의 현장에서 선포하는 바울의 말이 처음 등장하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이상하지 않습니까? 선교의 현장에서 누군가에게 전하는 메시지라고 하면 축복의 내용이 어울리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바울의 말에는 축복이 아닌 저주가 담겨 있습니다. 눈먼 자를 보게 해도 모자랄 것 같은데, 바울은 멀쩡하게 보던 사람을 맹인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그런데 이 일에는 또 하나의 일이 숨겨져 있습니다.
사실 맹인이 되는 것은 바울이 예수를 만날 때 먼저 경험했던 일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알고 있는 것과 행하는 일을 최고로 또 최선으로 여기며 살아왔었습니다. 자기만큼 눈이 밝은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며 살아가던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를 만나게 되며 눈이 멀게 되었습니다. 눈이 멀게 되었다기 보다는 어쩌면 눈이 먼 채 살아가고 있던 자신의 실체를 마주하는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즉, 바울은 엘루마 바예수에게도 자신에게 주어졌던 은혜가 임하기를 소망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아무튼 바울의 선포에 의해 바예수의 실체가 적나라하게 드러났습니다. 그러자 특별한 결과가 이어집니다. 우리 12절 말씀 같이 읽겠습니다. “이에 총독이 그렇게 된 것을 보고 믿으며 주의 가르침을 놀랍게 여기니라”(행13:12) 지금 이어진 내용 속에서 바울이 무엇인가를 가르친 기록이 있습니까? 아무 것도 가르친 것이 없어 보입니다. 그런데 총독 서기오 바울의 반응을 보십시오. 그렇게 된 것을 보고 믿으며 주의 가르침을 놀랍게 여겼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가 살펴본 이 내용은 선교의 가장 중요한 본질을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선교는 먼저 그들의 인생을 속이고 있는 바예수의 실체, 악한 것의 실체를 드러내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존 파이퍼 목사님은 자신의 책 ‘열방을 향해 가라’에서 선교가 존재하는 이유는 예배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즉, 예배가 없는 곳에 예배가 있게 하는 것이 바로 선교라는 것인데, 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잘못된 예배가 있는 곳에 올바른 예배가 있게 하는 것이 바로 선교라는 말입니다. 잘못된 것을 예배하는 자들이 돌이킬 수 있도록 도와주어 올바른 것을 예배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 다시 말해 바예수를 예배하는 자들이 돌이켜 예수를 주로 믿으며 하나님을 예배하는 삶이 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바로 선교인 것입니다.
사도행전 1장 8절에는 주님께서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하신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님의 증인이 된다는 것은 바로 그들을 통하여 주님의 말씀이 나타나고, 주님의 영광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선교가 교회나 성도에게 주어진 선택적인 일이 아니라 교회나 성도를 통해 당연히 또 자연스럽게 나타나야 하는 일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올바른 선교는 교회의 교회됨을 증명하는 일이며 성도의 성도됨을 증명하는 일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누구의 증인이 되고 있고, 우리를 통하여 어떤 일이 나타나고 있습니까?
바라옵기는 오늘 함께 예배하는 우리가 선교적 성도로, 선교적 교회로 온전히 자라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어느 곳에서든지우리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며 바예수의 실체를 낱낱이 드러내는 인생이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무엇보다 선교적 존재로 살아가는 우리로 인해 지혜 있는 사람들이 예수께로 돌아오며 거룩한 확장을 이루어가는 은혜의 역사가 이어질 수 있기를, 우리 모두가 그 일의 주역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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