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강해

<사도행전 강해31>영원을 누리는 삶(사도행전 12:1~11)

남편, 아빠...그리고 목사 2026. 7. 11. 23:54

  지난 시간 우리는 베드로의 이방인 사역이 예루살렘 교회에서 인정받는 것과 안디옥 교회의 시작에 대해 함께 살펴 보았습니다. 안디옥 교회는 헬라파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는데, 예루살렘 교회에서는 바나바를 파송하여 섬기게 하였습니다. 안디옥 교회는 바나바와 사울의 섬김을 통해 그 수가 점점 늘어났고, '그리스도인'으로 불릴 만큼 거룩하고 온전한 정체성을 가진 성도이자 교회로 성장해 갔습니다. 지난 시간 다 살펴보지는 않았지만, 11장의 마지막에는 한 가지의 사건이 더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루살렘이 기근으로 말미암아 어려움을 겪게 되었는데, 안디옥 교회의 제자들이 각각 그 힘대로 유대에 사는 형제들을 도왔다고 하는 내용입니다. 안디옥 교회가 선한 일을 한 내용으로 생각하며 넘어갈 수도 있지만, 사실 유대인 중심의 예루살렘 교회가 이방인 중심의 안디옥 교회로부터 도움을 받았다는 것은 엄청 큰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먼저는 이방인 중심의 안디옥 교회가 유대인 중심의 예루살렘 교회에게 도움을 줄 수 있을 정도로 성장했다는 것이고, 유대인 중심의 예루살렘 교회가 이방인 중심의 안디옥 교회보다 더 크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과 자신을 구분하는 선민의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그들이 고집하던 선민 사상이 무너지게 되었으며, 새로운 싹이 새로운 모습으로 자라나며 새로운 세상을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예루살렘교회가 기근이라는 고난을 맞이하며 그들의 한계를 보게 되었을 때, 하나님은 말씀의 망치를 예루살렘교회에 대었습니다. 예루살렘교회는 안디옥 교회를 통해 은혜를 입게 되었고, 선민 사상을 뛰어넘어 드디어 이방인들을 품을 수 있는 교회로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주어진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시간, 즉, 영원이라는 시간 속에서 의미를 찾아가는 자들입니다. 오늘의 행복은 앞으로 더 큰 상실감을 가져다 주기도 하고, 오늘의 불행은 앞으로 더 큰 행복을 위한 발판이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오늘의 일만으로는 그 무엇도 결론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 하나의 사건들을 결론으로 여기고 매여 있기보다는 어떤 일이든 우리에게 주어진 일들을 앞 날을 위한 과정들로 여기며 하나씩 선한 마음으로 넘어설 때, 우리는 선한 사람으로 성장해 갈 수 있는 것이며, 하나님의 뜻으로 넘어설 때 하나님의 자녀로서 성장해 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초대교회가 든든하게 서 갈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때에 맞게 시련을 허락하시고, 그 시련들 속에서 말씀의 망치, 은혜의 망치를 대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어쩌면 이 예배의 자리로 나아온 사람들 중에는 고난의 순간을 맞이하고 있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고, 또 앞으로 고난을 맞이하게 될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바라옵기는 오늘 함께 예배하는 모든 분들이 오늘 이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허락하신 삶을 우리 방식대로 결론 내리는 것이 아닌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영원이라는 시간 속에서 그 의미를 찾아가는 지혜가 더해질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오늘 본문 1절 말씀 같이 읽겠습니다. "그 때에 헤롯 왕이 손을 들어 교회 중에서 몇 사람을 해하려 하여"(행12:1) 오늘 본문에는 먼저 헤롯 왕이라는 특별한 인물이 등장합니다. 신약성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헤롯 왕가에 대한 이해를 하면 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잠시 헤롯 왕가에 대해 살펴보고 내용을 이어가겠습니다. 헤롯의 가계도를 보면 제일 위에 헤롯 대왕이 있는습니다. 이 헤롯 대왕은 마태복음 2장에서 등장합니다. 헤롯 대왕은 BC37년 아버지의 뒤를 이어 로마제국으로부터 유대 지역을 다스리는 분봉왕으로 임명이 되는데, 헤롯 대왕의 가장 큰 관심사는 유대인의 반란을 막고 정권을 유지하는 것이었습니다. 헤롯 대왕이 말년을 맞이하게 된 어느 날, 동방박사들로부터 유대인의 왕 예수님이 탄생하셨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헤롯 대왕은 유대의 새로운 왕으로 인해, 또 유대인들의 반란으로 인해 자신의 자리를 빼앗기게 될까봐 베들레헴 인근의 2살 이하 모든 아이들을 죽이라고 명령을 합니다. 마태복음 2장을 보면 헤롯대왕이 실제로 아이들을 다 죽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마2:16 참고) 이 헤롯 대왕이 오늘 본문에 나온 헤롯 왕의 할아버지입니다.

  성경에는 또 한 명의 유명한 헤롯이 있는데, 바로 헤롯 안티파스입니다. 헤롯 대왕이 죽고 난 다음에는 그의 아들 중 세 명이 분봉왕으로 임명이 되어 유대 땅을 나누어 통치하게 됩니다. 그 중 한명이 바로 헤롯 안티파스입니다. 성경에는 안티파스라고 나오지는 않고 헤롯 왕이라고만 나와서 잘 구분이 되지는 않지만, 헤롯 가문이 저지른 악행의 대부분은 바로 이 헤롯 안티파스가 저지른 것이라고 해도 무방합니다. 침례 요한을 죽인 것으로부터 시작해서 예수님께서 심판을 받으실 때도 최고 권력자는 헤롯 안티파스였고, 사도행전에서 나오는 스데반 집사의 순교와 사울이 회심하기 전 기독교를 향해 엄청난 박해를 행할 때에도 집권자가 헤롯 안티파스였는데, 이 헤롯 안티파스는 오늘 본문에 나온 헤롯 왕의 삼촌입니다.

  오늘 본문의 헤롯 왕은 헤롯 가문의 3대 왕으로 헤롯 아그립바라는 인물입니다. 41년부터 44년까지 유대를 다스린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독실한 유대교 신자였으며 로마와의 관계도 좋았고 유대인들에게도 상당히 인기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그가 유대를 다스리기 시작한 첫 해, 교회는 큰 박해를 맞이하게 되었는데 헤롯 왕의 박해로 열 두 제자 중 한 명이자, 요한의 형제였던 야고보를 잃게 되었습니다. 헤롯 아그립바는 철저히 유대교의 편이 되어 유대교를 지지하는 자신의 모습을 유대인들을 향해 드러내고자 한 것이었습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 2절에는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칼로 죽이니"(행12:2), "칼로 죽였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원래 유대교에서 처벌하는 방식은 앞서 스데반 집사에게 행하였던 것처럼 돌을 던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돌을 던지지 않고 칼로 죽였다고 하지 않습니까? 로마의 법대로 처형을 했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헤롯 아그립바가 정치적인 죄목으로 누명을 씌워서 죽인 것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헤롯은 자신이 행하는 잔인한 일이 유대인들에게는 기쁨이 되고 있음을 보았습니다. "유대인들이 이 일을 기뻐하는 것을 보고 베드로도 잡으려 할새 때는 무교절 기간이라"(행12:3) 헤롯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거기서 더 나아가 이제는 베드로도 죽이려고 잡아 가두었습니다. 왕으로서 권력을 정의와 공평이 아닌 대중들의 지지와 인기로 만들려고 하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를 잡아 옥에 가둔 그때가 마침 무교절 기간이었습니다. 무교절은 출애굽을 하며 누룩 없는 빵 먹었던 것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출애굽 사건을 통해 받은 구원을 기억하고, 죄 없는 삶을 살아야 함을 결단하는 절기입니다. 그래서 무교절 기간에는 재판을 하거나 처형하는 일을 유대교 법에서 금하고 있었는데, 헤롯 왕은 베드로를 죽이기 위해 무교절이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성경은 헤롯이 베드로를 감옥에 가두어놓고 얼마나 철저히 감시했는지 잘 기록해 놓았습니다. 4절 말씀입니다. "잡으매 옥에 가두어 군인 넷씩인 네 패에 맡겨 지키고 유월절 후에 백성 앞에 끌어 내고자 하더라"(행12:4) 4명이서 4교대로 총 16명이 베드로 한 사람을 감시했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5장에서 감옥에 갇혀 있던 베드로가 탈출하여 새벽에 성전에 나타나 가르쳤던 희한한 일이 기억이 남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교회를 대표하는 지도자 한 명이 벌써 목숨을 잃었고, 또 한 명의 지도자에게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졌습니다. 아무런 희망도 보이지 않던 상황이었고 교회는 놀랐을 것입니다. 그들의 힘으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그때, 교회는 절망하거나 포기지 않았습니다. "이에 베드로는 옥에 갇혔고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하더라"(행12:5) 교회는 기도를 하였습니다. 순교를 당하고, 옥에 갇히는 일, 이러한 일들은 전혀 생각하지 못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처음 예수를 믿을 때부터, 교회가 처음 생겨날 때부터 이러한 일이 자신들에게 주어질 것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앞서 사도행전 4장에서 베드로와 요한이 공회에 잡혀갔을 때, 공회의 장로들과 서기관들은 예수의 이름으로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고 겁박하였습니다. 그때 교회는 이렇게 기도하였습니다. 사도행전 4:29~30절입니다. “29 주여 이제도 그들의 위협함을 굽어보시옵고 또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시오며 30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시옵고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하더라”(행4:29~30) 기도가 끝나자 하나님은 이렇게 응답하셨습니다. 31절입니다.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행4:31)

  교회가 기도하며 하나님께 구한 것은 지금 당장 당면한 어려움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교회에 허락하신 것도 그러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교회가 하나님께 구한 것, 또 하나님께서 교회에 허락하신 것은 ‘담대함’이었습니다. 이것은 구약 성경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을 향할 때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명하신 것은 대단한 전쟁 기술이나, 무기와 같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또한 눈앞에 펼쳐진 문제를 제거 해주시지도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내가 네게 명령한 것이 아니냐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수 1:9)라고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에 들어갈 때처럼 교회도 두려웠을 것입니다. 야고보가 죽었고,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아무런 희망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베드로가 죽음을 맞이하게 되던, 기적과 같이 살아서 돌아오게 되던 주어진 모든 일을 통해 당신의 가장 선하신 일을 이루어가시는 분이심을 알고 있었고, 믿고 있었습니다. 교회는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흩어지지 않았습니다. 더욱 마음을 합하였고,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베드로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제 다음날 무교절이 끝나고 날이 밝으면 얼마 전 순교한 야고보와 같이 자신도 죽을 것이라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베드로에게는 죽음이 끝이 아니었습니다. 이미 예수님의 죽으심을 보았고, 예수님의 부활하심을 경험하였습니다. 예수 안에서의 인생은 죽음이 끝이 아니라 영원이라는 시간 속에서 새로운 일을 맞이하게 되는 하나의 과정일 뿐이라는 것을 믿고 있었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태평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잠을 자고 있었다고 합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을 애써 피하려고 하는 의도가 전혀 없었음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며, 하나님의 허락하심이라면 죽음까지도 순리로 받아들이려고 하는 태도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때 주의 사자가 나타나 베드로의 옆구리를 쳐서 깨웠습니다. 그러자 쇠사슬이 그 손에서 벗어졌습니다. 그리고 베드로에게 직접 명령을 합니다. 천사가 이르되 띠를 띠고 신을 신으라 하거늘 베드로가 그대로 하니 천사가 또 이르되 겉옷을 입고 따라오라 한대"(행12:8) 천사의 명령에 베드로는 온전히 순종하였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이 상황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고 따라간 것이 아닙니다. 9절 하반절을 보면 “천사가 하는 것이 생시인 줄 알지 못하고 환상을 보는가 하니라”(행12:9下)라고 되어 있습니다. 전혀 계산하지 않고 잠결에, 무의식 중에 순종했다는 것입니다. 잠을 자던지, 깨어 있던지, 정신이 있던지, 없던지, 이해가 되든지, 안 되던지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헤롯의 손과 유대 백성의 모든 기대에서 벗어나게 하시며, 베드로를 원래 있던 자리로 돌려보내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레프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이 작품의 남자 주인공의 이름은 ‘레빈’인데, 톨스토이 자신의 모습을 투영한 인물이기도 합니다. 소설에서 레빈은 그의 부인 키티가 첫 아이를 낳던 날, 어쩌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을 맞이하던 순간 아이러니하게도 ‘어차피 다 죽을텐데 이게 다 무슨 소용인가?’라고 생각하며 절망하게 됩니다. 하지만 어떤 농부를 만나 그가 하는 이야기를 듣고 큰 깨달음을 얻습니다. 그 농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냥 사는 것이고, 선하게 살면 됩니다.’ 사실 이것은 톨스토이가 실제로 회심을 경험하게 되었을 때의 내용이기도 합니다. 전쟁과 평화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어 부귀영화를 누리던 중 톨스토이는 삶의 허무함과 죄에 대한 공포를 가진 채 불안하게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한적한 시골길을 가던 중 시골 농부를 만나게 되는데 농부의 얼굴이 유난히 평안하게 보여 그에게 평안의 비결을 물었다고 합니다. 그러자 그 농부는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선하게 살며, 죽음을 담담히 받아들이는 믿음 안에 살면 됩니다.’라고 답을 하였다고 합니다. 소설 안나 카레니나의 마지막 문장은 이렇습니다. “나의 생활 전체는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든 그것과는 상관없이, 매 순간 순간이 이전처럼 무의미하지 않을 것이다.” 톨스토이는 안나 카레니나를 집필할 무렵 삶의 의미를 상실하여 극심한 우울증과 자살 충동까지 경험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농민과의 만남으로 회심을 경험한 후 자신의 삶 속에 허락된 의미를 찾으며 남은 시간을 보냈다고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왜 야고보는 죽게 두시고, 베드로는 살리셨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저 하나님의 허락하심이 달랐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은 자신에게 허락될 미래가 다르다고 생각하여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언제 어떤 모습으로 어떻게 죽음이 찾아올지 알 수 있었을까요? 그들은 그저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묵묵히 감당하며, 죽음까지도 담담히 받아들이는 믿음 안에서 살았을 것입니다. 그처럼 그리스도인은 영원하지 않은 것들 가운데서 영원한 것을 붙들고 살아가는 자입니다. 이 땅에서의 삶이 어떤 모습의 결과를 맞이하게 되던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생명을 품고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길을 묵묵히 걸어가는 자입니다. 살던지, 죽던지 우리를 허락하신 그 자리에서 씨앗처럼 심어져서 꽃을 피우는 인생인 것이죠. 비록 우리의 인생에서 그 꽃을 직접 마주하는 일이 주어지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예수의 생명은 심어진 그 자리에 반드시 싹이 자라고 꽃이 피며 열매가 맺힐 것입니다.

  바라옵기는 오늘 함께 예배하는 저와 여러분의 인생이 그런 인생이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영원하지 않은 것에 굴복하여 영원한 것을 포기하는 인생이 아닌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감당하며 우리에게 허락된 일들을 담담히 받아들이는 믿음 안에서 허락하신 일들 속에 담겨져 있는 거룩한 의미를 찾아갈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또한 우리에게 어떤 결과가 주어질지는 모르더라도 우리에게 허락하신 자리에서 예수의 생명으로 잘 심어질 수 있는 인생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