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대”라는 말이 있습니다. 한자어로 ‘기쁠 환’과 ‘대할 대’자를 써서 기쁘게 맞이하고 정성껏 대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단순히 손님을 맞이하는 것을 넘어, 손님이 편안하고 소중하게 느끼도록 지속적인 보살핌과 배려를 제공하는 것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사랑’의 가장 핵심적인 요소가 바로 이 ‘환대’입니다. 환대는 그의 사람다움을 확인 해주고, 사람다운 사람의 모습을 갖추어 갈 수 있도록 지지해 주는 일입니다. 사람다움의 권리를 주장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며, 그에게 ‘자리’를 마련해주고, ‘얼굴’을 찾아주는 것이 바로 환대입니다.
과거 여자의 자리는 가정이었습니다. 사회생활을 하거나 운전을 하는 여성들을 향해 “여자가 집구석에서 살림이나 할 것이지”라고 하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할 때도 있었습니다. 미국에서는 흑인들이 백인들의 가게에 들어갈 수 없었고, 남아공에서는 흑인들이 백인들의 교회에 가서 예배할 수도 없었다고 합니다. 거기엔 그들의 자리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교회에서도 ‘돈 없으면 사람 대접 못 받는다.’ ‘돈 없으면 직분을 받을 수 없다.’는 말이 나오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거룩한 사랑으로 말미암은 환대가 있어야 할 자리에 치열한 경쟁 사회 속에서의 차별과 냉대가 동일하게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사람의 조건을 보는 것이 익숙해져 있는 시대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환대는 그렇게 보던 눈을 내려놓아야 시작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존재 속에 담아놓으신 섭리와 계획을 볼 수 있어야 하고, 인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버림받은 인생을 살아가고 있던 여인을 회복하기 위해 유대인으로서는 절대 가지 말아야 할 사마리아 땅을 밟으신 예수님. 이것이 바로 사마리아 여인을 향한 예수님의 환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환대는 사랑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며, 사랑이 있어야 온전해질 수 있는 일입니다. 누군가를 그 가치대로 인정해 주고, 그에 걸맞게 대접해 주어 가치대로의 인생을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 것이 바로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 예수를 통해 우리에게 허락하신 복음은 바로 ‘환대의 회복’입니다. 냉대에 길들어져 있던 우리들, 심지어 하나님의 아들까지도 철저하게 냉대했던 우리들이었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환대하시며 당신의 아들을 십자가로 내어주신 것이 바로 구원의 사건입니다. 구원받은 자의 삶은 이 은혜를 입고, 이 은혜대로 살아가기로 결단한 것이기에 냉대에서 환대의 삶으로 거듭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 이어 우리는 베드로와 고넬료의 만남을 이어서 살펴볼 것입니다. 유대인과 이방인, 사도와 백부장 등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타이틀을 벗어던지고, 그들은 사람 대 사람으로 만나 서로를 환대했습니다. 그리고 이 환대는 곧 이방인을 향한 환대로 확장 되어집니다. 바라옵기는 오늘 이 말씀을 살펴보는 우리도 성령께서 허락하신 회심의 은혜, 거듭남의 은혜를 바탕으로 환대의 삶을 펼쳐가는 은혜가 더해질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욥바에 있던 베드로는 환상을 보고, 성령의 음성을 따라 고넬료가 있는 가이사랴로 향했습니다. 고넬료는 베드로를 하나님의 사자로 생각하여 경배하듯 엎드려 절하였고, 베드로는 그런 환영을 반기기 보다는 오히려 불편해하며 거절하였습니다. 26절 말씀을 보면 “베드로가 일으켜 이르되 일어서라 나도 사람이라 하고”(행10:26)라고 되어 있는데, 베드로는 고넬료를 만나는 순간 먼저는 고넬료를 잡아 일으킴으로 이방인들을 대하던 유대인들의 인습을 버렸습니다.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세워 놓은 장벽을 허문 것입니다. 그리고 고넬료에게 특별한 존재로 대접받는 것도 거절합니다. 서로를 가로막고 있던 편견, 선입견을 내려놓고 사람 대 사람으로 지극히 평범한 만남을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베드로는 고넬료를 만나 집 안으로 들어가 보니 이미 그의 가족, 친척 그리고 친구들까지 모여 있었습니다. 베드로가 온다는 소식은 이미 들어서 알고 있었겠지만, 그들은 유대인과의 직접적인 접촉에 긴장하였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28~29절입니다. “유대인으로서 이방인과 교제하며 가까이 하는 것이 위법인 줄은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께서 내게 지시하사 아무도 속되다 하거나 깨끗하지 않다 하지 말라 하시기로 부름을 사양하지 아니하고 왔노라 묻노니 무슨 일로 나를 불렀느냐”(행10:28~29) 베드로는 지금 하나님의 율법을 어긴 것은 아니지만, 유대 사회의 인습, 유대인의 금기를 깨뜨리고 있습니다. 지금 베드로에게는 전통이나 관습보다 하나님의 지시를 따르는 일이 더 중요했습니다. 그런데 이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특별한 환상을 경험하고, 성령의 음성을 들어 순종하기는 하였지만, 베드로에게도 이방인을 환대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갈라디아서를 보면 유대인이었던 베드로에게 이방인을 향한 인식이 어떻게 자리잡혀 있었는지를 살펴볼 수 있는 하나의 장면이 있습니다. 베드로는 어느날 안디옥 교회에서 이방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유대 그리스도인들이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깜짝 놀라 그 자리를 피하게 되었고, 베드로가 자리를 피한 영향 때문에 그와 함께 있던 유대인들, 심지어 안디옥 교회의 지도자인 바나바까지도 그 자리를 뜨는 사건이 발생하였습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회심으로 인해 하나씩 이겨낸 일들이 쉬워 보일 수 있겠지만, 베드로도 유대인이었기에 이방인과 함께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아무튼 이런 어려운 장벽을 넘어 베드로는 지금 이방인이었던 고넬료를 환대하며 함께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었습니다. 일단 베드로가 성령의 음성을 따라 고넬료의 집에 오기는 하였지만, 여전히 왜 왔는지 그 이유는 모르는 상황이었습니다. 룻다에서처럼 중풍병자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고, 욥바에서처럼 죽은 사람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일단 오기는 왔는데, 그동안의 분위기와는 너무도 달랐습니다. 이방인이긴 하였지만 나름 멀쩡하게 생긴 사람들이 모여 앉아있었던 것입니다.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내게 지시한 것이 있어 부름을 사양하지 않고 오긴 했는데, 무슨 일로 나를 불렀는지 물어보았습니다. 고넬료는 아는 것이 있었을까요? 고넬료 역시 아는 것이 없었습니다. 무슨 할 말이 있어서 베드로를 부른 것이 아닙니다. 멀리서 그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가까이에서 보기 위해 백부장의 자격으로 부른 것도 아닙니다. 이런 것 보면 하나님은 참 짓궂은 것 같습니다. 일반적인 만남도 아니고 굉장히 특별한 만남인데, 이런 만남을 주선 해주시면 뭐라도 좀 알려주셔야 되는 것 아닙니까? ‘너는 욥바에 사람들을 보내서 베드로에게 오라고 좀 하고, 베드로 너는 누가 너를 찾아와서 가자고 하면 같이 가라’이런 식입니다. 소개팅도 이런 소개팅이 어디있습니까?
아무튼 무슨 일로 자신을 불렀냐는 베드로의 질문에 고넬료는 개인적인 관심사 때문은 아니고 천사의 지시를 따라 한 것임음을 말하며 베드로에게 이야기하며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33절입니다. “내가 곧 당신에게 사람을 보내었는데 오셨으니 잘하였나이다 이제 우리는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행10:33) 이 말을 조금 쉽게 풀어보면 “우리가 왜 이렇게 만나야 하는지 저는 모릅니다. 그저 당신이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실 것 같아 가족과 친척, 친구들과 함께 있는 것입니다.”라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고넬료의 대답을 보면 특별한 점이 하나 있습니다. 지금 고넬료는 베드로를 만나고 있습니다. 하지만 자신 뿐만이 아니라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다 하나님 앞에 있다고 합니다. 환상을 보여주신 것도, 보여주신 환상대로 일을 이루어 가시는 것도 모두 하나님께서 친히 이루어 가시는 일이라는 것을 믿고 있었기에, 지금의 이 상황 역시 하나님께서 이루어가시는 일의 한 부분이라고 믿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고넬료의 간절함은 하나님을 향해 있었습니다. 유대인이 자신의 집에 오는 것도, 백부장 자리에 있던 자신이 베드로 앞에 머리를 숙이는 것도 지금 고넬료에게는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고넬료는 그저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다면,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성도, 그리스도인, 예배자 등 저 역시 마찬가지로 말씀을 듣는 태도는 이래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나의 만족을 지키기 위한 말씀, 나의 욕구를 채우기 위한 말씀 같은 것은 없습니다. 모든 것을 내려 놓고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모인 사람들만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선 고넬료의 모습은 베드로의 마음이 더욱 열리게 하였습니다. 이어지는 내용도 한 번 볼까요? 34~35절입니다. “베드로가 입을 열어 말하되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아니하시고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다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행10:34~35) 35절 마지막에 “깨달았도다”라는 말은 이 내용을 지금까지 모르고 있었는데, 알게 되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까지는 내가 하나님에 대해서 잘못 알고 있었는데 이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제대로 알게 되었습니다.’라는 의미입니다. 베드로가 그동안 사람들을 차별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베드로의 차별 없음도 유대인 안에서만 해당되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이 가진 생각의 한계를 인정하고, 이제 그 장벽을 넘어서게 되었음을 이방인들 앞에서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어서 거기 모인 사람들에게 예수님에 대해 차근차근 이야기를 합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에 대해 설명하면서 사용한 단어 몇 가지만 살펴볼까요? 먼저 36절에는 “만유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행10:36)라고 표현을 합니다. 모든 것의 주인 되신 예수, 곧 메시아라는 표현입니다. 그리고 38절에서는 예수님께서 하신 일들을 간략하게 소개하며 그 끝에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행10:38)고 합니다. 생명의 주관자 되신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들이었지만,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예수께서 그 일을 행하셨다는 것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특별히 예수에 대해 강조하여 이야기를 하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고넬료는 하나님을 믿고 있지만, 예수님을 믿을 수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고넬료에게 예수가 어떤 사람입니까? 자기가 가이사랴에서 모시고 있는 상관 빌라도에 의해 십자가에 달려 죽은 로마의 반역자였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은 자유였지만, 예수를 믿는 것은 반역자를 믿는 것이었기에 불법이었습니다. 고넬료의 믿음이 예수께로 향하게 되고 그 일이 발각된다면 백부장 자리는 물론 모든 것을 내어놓아야 할 수도 있는 일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여기서 이야기를 끝내지 않았습니다. 그동안의 모든 이야기는 사실이었다 하더라도 ‘로마의 반역자 중 대단한 사람이 있었다’ 정도로 끝날 수 있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39절부터 41절까지 복음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예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에 대해 설명합니다. "39 우리는 유대인의 땅과 예루살렘에서 그가 행하신 모든 일에 증인이라 그를 그들이 나무에 달아 죽였으나 40 하나님이 사흘 만에 다시 살리사 나타내시되 41 모든 백성에게 하신 것이 아니요 오직 미리 택하신 증인 곧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후 그를 모시고 음식을 먹은 우리에게 하신 것이라"(행10:39~41) 세상에서는 반역자로 심판을 하여 십자가에 매달았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셨다는 것으로 다 끝나는 일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이어서 하나님께서 예수님에게 부여하신 권한에 대해 설명합니다. 42절 말씀 같이 읽겠습니다. “우리에게 명하사 백성에게 전도하되 하나님이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의 재판장으로 정하신 자가 곧 이 사람인 것을 증언하게 하셨고”(행10:42) 즉, 하나님께서 살아있는 자와 죽은 자의 모든 것에 대해 예수를 기준으로 삼으셨다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고넬료는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요? 44절입니다. “베드로가 이 말을 할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행10:44) 성령께서는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들에게 임하였습니다. 45절에는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 받은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 부어 주심으로 말미암아 놀랐다고 되어 있습니다.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 받은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도 3)성령 부어 주심으로 말미암아 놀라니"(행10:45) 거기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다 알 수 있을 정도로 성령께서 임하였는데, 어떤 모습이었는지 우리 46절 말씀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이는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 높임을 들음이러라”(행10:46) 방언을 말하고 하나님을 찬양했다고 하는데, 이 일은 사도행전 2장 오순절 제자들에게 성령의 임하심과 같은 모습입니다.
사도행전 2장 제자들에게 성령의 물꼬가 트이면서 교회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이방인이었던 고넬료와 그의 가족, 친척, 친구들에게 성령의 물꼬가 트이며 이방인 교회의 시작을 알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어서 베드로는 이렇게 말을 이어갑니다. 47~48절입니다. “이에 베드로가 이르되 이 사람들이 우리와 같이 성령을 받았으니 누가 능히 물로 침례를 베풂을 금하리요 하고 명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베풀라 하니라 그들이 베드로에게 며칠 더 머물기를 청하니라”(행10:47~48) 성령께서 이방인들을 자기 백성으로 인정하셨듯이 우리 역시 그들을 한 가족으로 인정하는 것이 옳다고 하며 또 하나의 교회가 시작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고넬료 이야기의 한 단락은 함께 머무르는 장면으로 마무리됩니다. 유대인과 이방인 원래는 서로가 가까이 할 수 없었지만, 환상을 보게 된 그들은 서로를 환대하며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더는 베드로가 이방인 고넬료의 집에 머무는 것이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엄청난 장벽을 넘어선 것입니다. 장벽을 뛰어넘은 교제가 시작되고, 이 교제가 환대가 되어 교회가 되는 이 일은 베드로의 특별함이나 고넬료의 특별함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물론 그들의 특별함도 있었겠지만, 이 일을 가능케 한 특별함은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예수를 통해 허락하신 복음입니다.
이와 같이 복음은 서로의 차이를 넘어서게 합니다. 그것이 비록 유대인과 이방인의 차이라 할지라도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 안에서 예정되었음을 보게 하고, 그리스도 안에서의 관계를 시작할 수 있게하며 또 교회로 함께 지어져 갈 수 있도록 합니다. 서로를 존귀하게 대하고, 또 환대하여 각자의 존재 가치가 더욱 분명해 질 수 있도록 합니다. 이 환대는 먼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아들을 내어주시는 환대가 있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기적이고, 탐욕적인 우리의 인생 가운데 차별과 혐오를 당연하게 여기며, 자신만의 권리를 앞세우던 우리에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내어주셨습니다. 그리스도로 창조된 우리의 존재 가치를 알게 하셨고, 당신의 아들 예수와 같이 생명으로 살아가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해주셨습니다.
베드로와 고넬료에게는 유대인과 이방인이라는 장벽이 서로의 환대를 가로막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장벽을 허무셨고, 서로를 하나님 안에서 존귀한 존재로서 바라보게 하셨습니다. 오늘 우리의 환대를 가로막는 장벽이 무엇입니까? 문화와 전통입니까? 우리의 이기적인 욕심입니까? 바라옵기는 오늘 함께 예배하는 저와 여러분이 환대의 인생으로 나아갈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환대하심으로 허락하신 생명의 원리를 기억하고, 우리와 함께하는 이들에게 생명을 전해주기를 소망합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그렇게 얻게 된 생명을 통해 함께 연합하여 참된 교회로 함께 지어져 가며 더 나은 환대로서 더 많은 이들에게, 어두워져 가는 이 세상 속에서 생명과 빛을 전할 수 있는 믿음의 공동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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