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라는 말을 많이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이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시나요? 때로는 이 문장에서 이야기하는 ‘사랑’에 대해 너무 감정적으로 접근하여 ‘하나님은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들을 다 해주시는 분’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의 기초는 사랑에 대한 올바른 이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기독교 신앙에서는 ‘사랑’에 대해 올바른 개념 정리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사랑’을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세상 속에서는 ‘어떤 대상을 좋아하다가 그 감정이 더욱 심각해진 상태’를 사랑으로 생각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사랑은 철저하게 대상을 향하여 일어나는 일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즉, 사랑은 나의 만족을 채우기 위해 무엇인가를 가지려고 하는 마음이 아니라, 사랑하는 대상의 기쁨을 위해 희생을 감수하는 것이 진짜 사랑인 것입니다.
이번 주와 다음 주 우리는 베드로와 고넬료가 만난 장면을 두 주에 걸쳐서 살펴볼 것입니다. 유대인과 이방인, 교류 자체가 불가능할 것 같았던 두 사람이었지만, 그들은 서로를 가로막고 있던 장벽을 넘어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진솔한 교제를 나누었습니다. 베드로는 고넬료를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랑하며 진심으로 대하였고 고넬료 역시 하나님의 사랑으로 베드로를 대하였습니다. 모습은 서로 달랐지만, 하나님의 사랑을 신뢰하며 그 사랑 안에서의 생명의 교제를 이어가게 되었습니다. 이 둘의 만남은 유대인과 이방인의 만남이었기에 어찌보면 굉장히 부자연스러운 만남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들의 만남은 무엇인가를 감추고 숨기거나 억지로 꾸미는 등의 불편한 만남은 아니었습니다. 가면을 벗은 진솔한 교제가 이어졌고, 복음 안에서의 자유함을 누리는 교제가 이어졌습니다. 바라옵기는 이 말씀을 살펴보는 가운데 함께 예배하는 우리도 진솔한 교제, 복음 안에서의 자유함을 누리는 교제로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는 은혜의 시간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1 가이사랴에 고넬료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달리야 부대라 하는 군대의 백부장이라 2 그가 경건하여 온 집안과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행10:1~2) 고넬료는 군대의 백부장이었는데, 경건한 사람이었고, 온 집안과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고넬료는 어느날 환상 중에 하나님의 사자를 만나게 되었고, 욥바에 있는 베드로에게 사람을 보내어 집으로 오게 하라는 말씀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환상은 고넬료에게만 보여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욥바에서 머물고 있던 베드로에게도 하늘에서 보자기가 내려오는 환상이 보여졌고, 그것을 먹으라는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베드로는 속되고 깨끗하지 않은 것을 먹는 것은 부정한 것이라 여겼기에 먹지 않겠다고 답을 하였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문화가 만들어놓은 규칙이 아니라 레위기에 기록된 정결규례에 의한 것이었기에 당연히 따라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의외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게 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17 베드로가 본 바 환상이 무슨 뜻인지 속으로 의아해 하더니 마침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이 시몬의 집을 찾아 문 밖에 서서 18 불러 묻되 베드로라 하는 시몬이 여기 유숙하느냐 하거늘 19 베드로가 그 환상에 대하여 생각할 때에 성령께서 그에게 말씀하시되 두 사람이 너를 찾으니 20 일어나 내려가 의심하지 말고 함께 가라 내가 그들을 보내었느니라 하시니"(행10:17~20)
베드로는 자신이 보게 된 환상이 무엇인지 이해하기 어려워 의아해 하던 그때, 마침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이 베드로가 머물고 있던 시몬의 집에 도착하였습니다. 베드로는 아직 지붕에 있던 상황이었고 자신을 찾으로 사람들이 온 것도 알 수 없었습니다. 베드로는 여전히 환상에 대해 생각으로 혼란스러웠는데, 또 한 번 "두 사람이 너를 찾으니 일어나 내려가 의심하지 말고 함께 가라. 내가 그들을 보내었느니라"고 하시는 성령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베드로는 지붕에서 내려와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집 안으로 들어오게 하였고, 하루를 지낼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의 전통, 관습, 문화 속에서는 이방인을 집으로 초대하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베드로도 자신에게 주어진 이 상황에 대해 이해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의심하지 말고 함께 가라”는 성령의 말씀을 분명히 들었기에 그들을 받아들였고, 이튿날 가이사랴를 향했습니다.
베드로가 지금 있던 곳은 ‘욥바’라는 곳이었습니다. ‘욥바’는 구약 성경 ‘요나’에서도 등장합니다. 요나는 선지자였는데, 이스라엘의 원수인 앗수르의 니느웨로 가서 하나님께서 그 땅을 심판 하실 것이라는 말씀을 전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평소에 마음에 안 드는 놈이 하나 있는데, “야! 중대장님이 너 가만히 안 둔대!”이런 말을 전해야 한다면 얼마나 통쾌한 상황입니까? 하지만 요나는 그 명령을 따르기가 싫었습니다. 차라리 심판의 메시지를 안 듣는다면 결국에 다 죽게 될 것인데, 괜히 심판의 메시지를 전했다가 혹시라도 누군가가 회개를 하게 된다면, 인자하시고, 자비하시고,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용서하실 것이 뻔했기 때문입니다.
요나는 그 때문에 하나님의 명령을 거스르기 위해 니느웨의 반대편인 다시스로 향하는데, 이때 요나가 다시스로 가기 위해 배를 탄 곳이 바로 욥바입니다. "그러나 요나가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욥바로 내려갔더니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난지라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여 그들과 함께 다시스로 가려고 배삯을 주고 배에 올랐더라"(욘1:3) 요나에게 주어졌던 상황은 지금 베드로에게 주어진 ‘가이사랴’의 이방인 집으로 가야 되는 이 상황과 다르지 않습니다. 고넬료는 ‘백부장’입니다. 일반 병사야 충성을 다하겠다고 하면 모집이 가능했을지 모르겠지만, 고넬료는 군대의 지휘관입니다. 당연히 로마인이어야 했고, 나라에 대한 충성심은 물론 능력이 뛰어난 장교이기도 하였습니다. 당시 군대의 주된 업무는 식민지 주민의 반발 진압 또는 식민지 주민의 질서 유지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즉, 유대인의 입장에서 고넬료는 일제강점기 시대에 우리나라에 있던 일본 순사의 지휘관 같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유대인에게 고넬료는 일차적으로 이방인이었고, 그와 함께 백부장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이 적대감을 가지고 있던 대상이기도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가이사랴를 향해 이방인들과 함께 순종함으로 떠났습니다. 조금 상징적인 의미를 덧붙이자면, 지금 베드로가 행하고 있는 이 일은 욥바에 심어진 ‘요나’의 불순종을 뒤엎어, 적대적인 대상을 향해 세워져 있던 장벽을 뛰어넘어 순종의 뿌리를 새롭게 심는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튿날 가이사랴에 들어가니 고넬료가 그의 친척과 가까운 친구들을 모아 기다리더니"(행10:24) 욥바에서 출발한 베드로는 이튿날이 되어 가이사랴에 도착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집에는 고넬료 혼자만 베드로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고넬료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환상을 경험하고, 하나님의 일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만약 자신이 경험한 환상대로 베드로가 자신의 집으로 찾아온다면 그것 또한 하나님의 일하심이었기에 고넬료는 이 특별한 기회를 자신만 누릴 수 없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있던 온 집안 사람, 마음을 같이하던 친척, 그리고 친구들까지 자신의 집으로 초청하여 함께 베드로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베드로가 고넬료의 집에 도착했을 때 고넬료는 베드로를 극진히 맞이하였습니다. 25절입니다. “마침 베드로가 들어올 때에 고넬료가 맞아 발 앞에 엎드리어 절하니”(행10:25) 고넬료는 유대의 지배국인 로마의 백부장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자기 상관에게 하듯 베드로의 발 앞에 엎드리어 절하였습니다. 극진한 환영이고, 겸손한 환영이었습니다. 베드로는 물론이고 곁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다 놀랄만한 상황이었습니다. 한 나라에서 백명의 군사를 거느린 지휘관이 자신의 직속상관도 아니고, 속국이었던 유대인의 평범한 시민에 불과했던 베드로에게 경배하듯이 엎드려 절하는 모습은 누구도 상상할 수 없었던 일이었을 것입니다. 베드로를 만나는 순간 고넬료는 더 이상 백부장이 아니었습니다. 아니 백부장이라는 타이틀이 베드로를 만나고 있는 이 시간만큼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군복무를 서울에서 전투경찰로 복무를 하여 육군에서의 경험이 1월 대성산 아래에서 추운 겨울을 보냈던 15사단 신병교육대밖에 없습니다. 육군 계급에 대해서 잘 몰라서이기도 하지만 일단 계급장에 작대기가 아닌 다른 모양이 있으면 무조건 높아 보였습니다. 부사관, 위관급은 물론이고, 영관급 장교는 감히 눈도 마주칠 수 없던 분들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목사의 직분을 가지고 군교회를 섬기다 보니 그런 분들을 가까이에서 마주하게 되는 일이 저에게도 주어지더라구요. 대단한 직책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교회에서는 전혀 티를 내지 않으시고, 겸손한 모습으로, 또 진심으로 섬겨주시는 고넬료와 같은 분들이 사도행전의 기록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제가 섬기고 있는 교회에서도 함께 해주고 계십니다. 이곳 교회에서만큼은 그 어떤 타이틀이 아닌 순수한 마음으로 교회를 위해, 교회에서 함께하는 모든 분들을 위해 진심으로 섬겨 주시는 분들이 우리 주변에도 있음을 기억하십시오.
고넬료에게 베드로는 단순히 일반적인 유대인이 아니었습니다. 천사가 알려준 사람이기에 특별히 존중해야 할 사람으로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고넬료는 존경을 뛰어넘어 경배의 모습으로 맞이하였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이렇게 반응합니다. 26절입니다. “베드로가 일으켜 이르되 일어서라 나도 사람이라 하고”(행10:26) 이것은 정중한 사양이기도 하지만, 고넬료의 환대에 대한 거절이기도 합니다. 사랑의 관계, 생명의 관계는 수직적인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기는 어렵습니다. 위에 있는 사람이 아래에 있는 사람에게 아무리 호의를 베푼다 하더라도 인격적인 관계가 형성 되지 않으면 그저 자선과 동정에 불과합니다. 또한 아래에 있는 사람이 위에 있는 사람에게 아무리 호의를 베푼다 하더라도 인격적인 관계가 형성되지 않으면, 그저 아부와 아첨에 불과할 뿐이죠. 사랑의 관계, 생명의 관계는 먼저 눈을 맞출 수 있는 인격적 관계, 수평적 관계가 시작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고넬료에게 신적인 대접 받기를 거절한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모습이자, 당연한 모습입니다. 자신이 ‘사람’이 아닌 그 이상의 존재처럼 간주되는 것은 인격적인 관계를 세워 가는 일이 아니라 가로막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인격적인 관계를 위해서라면 무엇보다 하나님 안에서의 교제를 위해서라면 이러한 환대는 환영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불편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고넬료는 베드로를 만나며 백부장의 타이틀을 내려놓았고, 베드로는 고넬료를 만나며 유대인의 타이틀을 또 사도의 타이틀을 내려놓았습니다. 두 사람은 존재 위에 덧입혀진 것들을 내려놓았습니다. 그 어떤 타이틀도 두 사람의 사이에 개입할 수 없었습니다. 존재 그대로의 모습으로 서로를 대하였고, 인격 대 인격으로서의 교제를 시작한 것입니다. 이것은 이방인을 향한 사랑의 시작이 되었으며, 위대한 생명의 사역으로 이어졌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과거 인종차별이 만연한 시대에 백인들은 흑인을 사람으로 인정하지 않을 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와 비슷한 일들이 오늘날 우리 사회 속에서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누군가를 함부로 대하거나,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며 무례하게 지시하는 ‘갑질’의 문화가 여기 저기서 나타나고 있지 않습니까? 입주민들이 경비원들에게, 손님들이 종업원들에게, 학부모들이 교사들에게 등 자신의 권리만을 주장하며 상대방의 권리를 무시하는 일들, 이것은 본질적으로 상대방에 대한 존중이 없기 때문이고,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가진 타이틀을 대단한 것으로 여기며, 상대방을 무시해도 괜찮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관계 속에서 자신의 타이틀을 앞세운다면 건강한 관계를 맺기가 어렵습니다. 만약 고넬료가 베드로를 맞이하며 “자네가 베드로인가? 나 백부장 고넬료일세”라고 하며, 베드로는 “나는 얼마 전에 중풍병자를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린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라네”라고 했다면 어땠을까요? 시작부터가 매끄럽지 않았을 것입니다.
종교 개혁가 존 칼빈은 ‘겸손’에 대해 “진정으로 우리 자신을 아무것도 없는 것으로 여기는 겸손은 자신의 연약함을 철저하게 아는 것과 당연한 권리를 전적으로 포기하는 것 그리고 우리에게 있는 탁월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온 것이라는 확신에서 나온다.”라고 하였습니다. 즉, 자신이 그냥 한 명의 사람임을 제대로 인식하고, 자신에게 주어진 것을 내세우며 누군가의 위에 올라서려고 하지 않는 일이 겸손이라는 것입니다. 베드로와 고넬료는 겸손한 모습으로 서로를 대하였습니다. 고넬료는 베드로라는 유대인 앞에 서 있었지만, 그보다 먼저 하나님 앞에 서 있었습니다. 베드로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대단한 업적을 이루었고, 고넬료라는 백부장이 자신 앞에 엎드려 절할 정도의 대단한 사람이 되었지만, 베드로는 먼저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임을 잊지 않았고, 자신 또한 그들과 다를 바가 없는 한 명의 사람이라는 것을 잊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사랑은 먼저 생명을 생명답게 대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그 대상 역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존재임을 기억하고, 그 대상에 담아놓으신 가치를 인정하는 것이 생명답게 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가치대로의 삶을 온전히 누리며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 것이 바로 기독교에서 이야기하는 사랑입니다. 이것은 일시적으로 잠깐 호의를 베푸는 정도가 아닙니다. 나와 다른 점들을 용납하고, 그 사람에게 어울리는 자리를 마련해주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가치대로의 모습이 나타날 수 있도록 오래 참음으로 기다려주며 도와줄 수 있어야 합니다. 성도는 바로 그 일을 행하는 사람들이며, 교회는 바로 그 일을 함께하는 공동체입니다. 교회를 '사랑의 공동체', '생명의 공동체'라고 하는 이유는 바로 그 때문입니다.
바라옵기는 함께 예배하는 저와 여러분이 그런 성도, 그런 교회가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어느 곳에 있든지, 어떤 사람을 만나든지 내가 가진 타이틀과 내가 가진 권리를 주장하지 않고, 사람 대 사람으로서 건강한 관계를 맺어가는 겸손한 사람들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우리가 만나게 되는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존재의 가치를 온전히 누릴 수 있도록, 거룩한 기쁨으로 충만한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생명답게 대하며, 사랑으로 대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그리하여 오늘 본문의 고넬료와 베드로의 만남처럼 하나님 나라를 확장시켜가는 믿음의 성도, 믿음의 증인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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