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강해

<사도행전 강해25>복음, 생명의 소식(사도행전 9:32~43)

남편, 아빠...그리고 목사 2026. 7. 8. 23:02

  여러분은 복음이 우리에게 주는 유익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제가 질문을 드려볼테니 한 번 생각해보세요. 만약 인생의 기준선이 있다고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첫 번째는 '지금 우리의 인생은 이 기준선을 따라 잘 살아가고 있고, 복음은 이 인생이 더 나은 삶이 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것이다.'라는 것이고, 두 번째는 지금 우리의 인생이 이 기준선에 미치지 못하는 상태인데, 복음은 그것을 인지하게 만들어 기준선에 올바로 도달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것이다. 여러분은 둘 중에 어느 것이 맞다고 생각하십니까? 정답은 후자입니다. 복음은 단순히 지금의 삶이 풍요로워질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서도 알 수 있듯 복음은 지금 우리의 삶이 사망의 삶임을 인지하게 만들고, 생명의 삶을 회복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것이며, 그리스도께서 바로 그 일을 위해 이 땅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인생과 관계와 사회가 불편해지고 있는 이유는 더 높은 곳에 도달하지 못해서가 아닙니다. 제대로 된 기준선을 바라보지 못하고, 바라본다 하더라도 도달할 수 없을 정도로 무너져 있기 때문이며, 심지어 그런 모습 조차도 우리는 깨닫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앞날의 내 인생에 대해서 고민하기보다는 지금 당장의 즐거움을 위해서 고민을 하고, 함께하는 사람들, 함께하는 공동체를 위한 고민보다는 그 사람들과 그 공동체를 어떻게 이용해야 내 만족을 더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것이 오늘날 솔직한 우리의 모습 아닙니까? 무너지는 인생, 무너지게 하는 인생을 살아가면서도 그것이 문제인지 모르고, 살리는 인생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다 할지라도 그것을 온전히 행하지도 못하는 것이 오늘날 솔직한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상하게 하며, 결국에는 무너지게 만드는 인생, 이것이 바로 사망의 삶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당신의 아들 예수를 보내주신 것은 우리가 이와 같이 사망의 삶을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사망의 삶을 살아가던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의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즉, 복음은 바로 생명의 소식인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생명에 관심을 가지는 정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생명이 생명답게 살 수 있도록, 다시 말해 생명으로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그 존재에 어울리는 생명을 누릴 수 있도록 배려하고 보살펴주며 도와줄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는 것입니다.

  유대사회의 문화에 길들여져 살아가던 사람들에게 복음이 전해졌습니다. 아무 문제없이 잘 살아간다고 생각하던 이들도 복음을 마주하고는 달라졌습니다. 그들의 인생 속에서, 관계 속에서 문제가 무엇인지 발견하고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새로운 길을 통해 인생의 회복을 꿈꾸며, 관계의 회복을 꿈꾸는 자들이 되어 한 마음 한 뜻으로 모이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렇게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생명의 증인이 되어, 생명의 일이 확장될 수 있기를 기대하고,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말미암아 회복을 꿈꾸는 자들의 무리가 '교회'로 세워진 것입니다.

  생명으로 말미암아 회복을 꿈꾸는 자들의 공동체인 교회는 이제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에서든든히 서 갔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졌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사마리아를 넘어 땅끝으로 넘어갈 단계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사울을 부르셨고, 이제는 하나님께서 사용하실 그릇으로서 준비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사울이 준비가 되었다고 해도 자기 마음대로 사역을 펼쳐갈 수는 없었습니다. 공식적으로는 사도들의 승인을 받아야 했고, 그와 함께 유대 사회 속에 펼쳐져 있던 우리만 하나님께서 택한 백성이라는 선민사상의 장벽을 뛰어넘어야 했습니다. 이제 사도행전 9장 후반부부터 12장까지는 이방인 사역의 문이 열리는 과정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계속해서 사도행전 말씀을 살펴보는 가운데, 복음의 여정 속에서 허락하시는 생명의 은혜를 우리 역시 풍성하게 누리는 은혜의 시간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오늘부터 우리가 함께 살펴볼 사도행전 9장 32절부터의 주인공은 베드로입니다. 예루살렘에 박해의 광풍이 불 때 사도들은 피하지 않았습니다. 예루살렘에 남아 교회와 성도들을 지켰습니다. 어느덧 박해의 피바람이 지나가자 사도들은 유대와 사마리아 지역에 세워진 교회들을 다니며 돌보는 일을 이어갔습니다. 베드로가 사방으로 두루 다니다가 룻다에 사는 성도들에게도 내려가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애니아라고 하는 8년 된 중풍병자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32 그 때에 베드로가 사방으로 두루 다니다가 룻다에 사는 성도들에게도 내려갔더니 33 거기서 애니아라 하는 사람을 만나매 그는 중풍병으로 침상 위에 누운 지 여덟 해라"(행9:32~33)

  예수님께서도 공생애 기간 동안 중풍병자를 고치신 적이 있습니다. 한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메고 와서 지붕에서부터 침상 째로 예수님 앞에 달아 내렸는데, 예수께서 고쳐주셨습니다. 그때 예수께서 중풍병자에게 하신 말씀을 잠깐 볼까요? 누가복음 5장 24절 하반절입니다.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매”(눅5:24下) 예수께서는 중풍병자에게 ‘일어나라’,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의 베드로 역시 룻다에서 만난 중풍병자 애니아에게 예수님과 같은 일을 이어갑니다. 오늘 본문 34절입니다. 베드로가 가로되 애니아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를 낫게 하시니 일어나 네 자리를 정돈하라 한대 곧 일어나니”(행9:34) 일어나라”, “네 자리를 정돈하라예수님과 같은 방법으로 그의 병을 치유한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께서 베드로와 함께 하심을 나타내는 것이며, 베드로는 예수의 이름으로, 예수의 일을 이어가며 예수와 동행하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베드로의 이 일은 널리 퍼졌습니다. 35절을 보면 "룻다와 사론에 사는 사람들이 다 그를 보고 주께로 돌아오니라"(행9:35) 룻다 뿐만이 아니라 사론에까지 영향력이 이어져 다 그를 보고 주께로 돌아왔다고 합니다. 교회에 더욱 더해져야 하는 일은 이와 같이 살아나는 일입니다. 꼭 앉은뱅이를 일으키거나 중풍병자를 치유하는 일까지는 아니어도 누군가를 위로하고, 누군가의 긴박한 필요를 채워주며, 누군가의 눈물을 닦아주는 일로 인해 누군가를 살리는 일이 더해져야 합니다. 작아 보일지라도 그 역시 생명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이어서 하나의 사건을 더 소개합니다. 이번에는 욥바에서 발생한 일입니다. "욥바에 다비다라 하는 여제자가 있으니 그 이름을 번역하면 도르가라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더니"(행9:36) 욥바는 베드로가 먼저 있던 룻다에서 서쪽으로 약 16Km정도 떨어진 해안지역인데, 그곳에 있던 여제자 다비다가 죽었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다비다의 죽음에 마음 아파하던 사람들이 베드로 사도가 룻다에 있음을 듣고 달려갔습니다. 16Km의 거리, 엄청 먼 거리는 아니지만 다비다의 죽음을 맞이한 사람은 아마도 시체가 부패하기 전에 베드로를 데려와야 한다는 생각으로 단숨에 달려갔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간청을 들은 베드로 역시 단숨에 달려왔을 것입니다.

  베드로가 욥바에 도착해서 바로 다비다가 누워있는 다락에 올라갔습니다. 그때 장면을 우리 같이 읽어볼까요? 39절입니다. “베드로가 일어나 그들과 함께 가서 이르매 그들이 데리고 다락방에 올라가니 모든 과부가 베드로 곁에 서서 울며 도르가가 그들과 함께 있을 때에 지은 속옷과 겉옷을 다 내보이거늘”(행9:39) 베드로가 도착하자 이들의 간절함이 더해졌습니다. 본문에는 단순히 ‘서서 울며’라고 되어 있지만, 아마도 간절한 마음으로 ‘베드로님 제발 우리 다비다 좀 살려주세요.’ 라고 통곡 한 것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36절을 다시 보면 성경은 다비다에 대해서 설명하며 이름 뿐만이 아니라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았다고 하는데, 한두 번 생각 날 때 선행을 하며 살았던 삶이 아니라 그녀의 삶이 선행과 구제로 가득할 정도로 채워졌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39절을 보면 더욱 특별한 모습이 있습니다. 이들은 과부였는데, 다비다가 살아 있을 때 손수 겉옷과 속옷을 지어 나누었던 자들이었습니다. 아마 다비다는 살아있는 동안에 가난한 자와 고아와 과부를 돌보라는 성경의 말씀을 따라 진심으로 과부들을 돌보았던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크고 화려한 것은 아니더라도 자신이 가진 것을 필요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며, 절망 속에서 살아가던 자들에게 소망을 전해주는 일, 다비다는 생명의 일을 이어가다가 갑작스럽게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다비다가 살아있을 때 지어준 그 옷을 입은 사람들, 그 은혜를 입은 자들이 다비다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통탄하며 눈물로 그 자리를 채우고 있었을 것입니다. 너무 안타깝고 슬픈 모습이지만, 또 너무 아름다운 모습 아닙니까? 저는 개인적으로 신앙으로 이어가는 삶은 바로 이런 모습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멋지고 화려하고 대단한 것을 하지는 않더라도 선행과 구제를 통해 함께 하는 이들의 필요를 채워주며 살리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복음으로 누리는 생명의 관계, 복음으로 형성 되어진 교회 역시 바로 이런 모습이어야 합니다. 굉장한 사역들을 하고, 대단한 무엇이 있어서가 아니라 서로를 지키기 위해 나누고, 서로를 살리기 위해 눈물로서 기도하는 공동체, 이것이 바로 교회가 가장 특별하고 멋지게 나타낼 수 있는 생명의 일 아닐까요?

  "베드로가 사람을 다 내보내고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돌이켜 시체를 향하여 이르되 다비다야 일어나라 하니 그가 눈을 떠 베드로를 보고 일어나 앉는지라"(행9:40) 베드로는 과부들의 이야기를 듣고 사람들을 내보낸 후 무릎을 꿇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리고 시체를 향해 말했습니다. ‘다비다야 일어나라누가복음 8장을 보면 예수께서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신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12살밖에 되지 않은 딸의 죽음을 마주한 부모의 마음이 어땠을까요? 예수께서는 야이로에게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그리하면 딸이 구원을 얻으리라 하시고”(눅8:50) 소녀를 일으키셨습니다. 그때 예수께서 소녀를 일으키시며 하신 말씀이 무엇인지 아시는 분 있습니까? ‘달리다굼이었습니다. 달리다는 아람어로 작은 소녀라는 뜻을 가지고 있고, 쿰은 일어나라는 명령형 동사입니다. 베드로는 지금 다비다야 일어나라’ ‘다비다쿰이라고 하며 예수님과 같은 일을 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 또 한 번 베드로를 통해 부활하신 예수가 증거되고 있는 것이며, 예수의 살아계심이 선포되고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손을 내밀어 일으키고 성도들과 과부들을 불러 들여 그가 살아난 것을 보이니"(행9:41) 베드로는 다비다에게 손을 내밀어 일으켰습니다. 그리고 성도들과 과부들을 불러들여 그의 산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애니아를 치유한 사건보다 더 놀라운 사건이 욥바에서 일어났습니다. 온 욥바 사람이 이 일을 전해 들었고, 42절의 말씀처럼 앞서 복음이 전해졌던 다른 곳들과 마찬가지로 온 욥바 사람들이 주를 믿게 되었습니다. "온 욥바 사람이 알고 많은 사람이 주를 믿더라"(행9:42) 복음은 이와 같이 죽어가는 자를 살리고, 죽은 자를 살리는 생명의 소식입니다. 우리는 베드로와 같이 중풍병자를 낫게 하거나 죽은 자를 살릴 수는 없겠지만, 소망 없는 자들, 절망 속에 빠져 주저 앉아 있는 자들에게 손을 내밀며 ‘일어나, 괜찮아, 내가 함께 할거야’ 정도는 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참된 회복을 경험한 자들이 감사함으로 교회의 자리를 채워가고, 그들이 누린 은혜를 또 다른 누군가에게 거저 베품으로 인해 생명의 일들이 이어지며,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구원의 은혜를 누리게 된다면 그것이야 말로 생명의 역사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일들이 마무리되며 9장 마지막 절에서는 "베드로가 욥바에 여러 날 있어 시몬이라 하는 무두장이의 집에서 머무니라"(행9:43) 베드로는 이 일을 행한 후 욥바에서 여러 날 있었다고 합니다. 죽은 자를 살린 베드로의 위상이 욥바에서 얼마나 높아졌겠습니까? 아마도 다비다와 그녀의 가족들은 베드로를 극진히 대접해 주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뿐이었겠습니까? 욥바에서 나름 가진 자들, 이름 있는 자들이 서로 베드로를 대접하려고 하지 않았겠습니까? 여기 본문에 나온 여러 날도 꽤 오랜 시간, 많은 날을 의미하는데, 베드로도 오랜 시간 머무르기 위해서는 좋은 집이 더 나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의 선택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베드로는 시몬이라 하는 무두장이의 집에서 머물렀다고 합니다. 무두장이는 요즘 말로 하면 가죽 공예사입니다. 지금은 가죽공예가 고급 기술로 인정받지만, 당시 사회에서는 죽은 동물의 시신을 만지는 일이기에 부정한 직업으로 여겼습니다. , 유대사회에서는 부정한 사람으로 생각되던 사람이었습니다.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것 같은 인생을 살아가던 그였지만, 베드로를 대접하고자 하는 마음만큼은 누구보다도 순수했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무두장이 시몬의 집에 머무르며 많은 날을 욥바에서 지내게 되었습니다. 성공적인 사역을 했다고 어깨에 힘주며 대단한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보다 이런 모습이 더 멋지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일은 그것보다 큰 의미가 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과 같은 일을 하며, 예수님께서 경계를 넘어서신 것과 같이 시대가 만들어 놓은 부정의 경계를 넘어서고 있는 것입니다. 신분제나 계급제처럼 관습과 문화가 만들어 놓은 기준으로 누군가를 바라보거나 판단하던 일을 넘어서고 있는 것입니다. 존재 그대로의 가치를 귀하게 여기며 누구든 생명으로 존중받고 생명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배려하는 일, 이 또한 복음이 우리에게 주는 생명의 일입니다. 이와 같이 베드로는 부활하신 예수님과 동행하며 중풍 병자, 죽은 자, 버림받은 자를 향해 그 걸음을 옮겼습니다. 베드로의 걸음이 닿는 곳마다 슬픔과 탄식이 물러갔고, 차별과 멸시가 사라졌습니다. 절망 속에 있던 자들이 소망을 찾을 수 있도록 엄청난 일도 하였지만, 버림받은 것 같은 인생에는 그저 그와 함께하며 생명을 누릴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룻다에서도 욥바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주께 돌아오고, 주를 믿게 되었다고 하는데, 이것은 그저 눈앞에 보이는 자신의 유익을 얻기 위해 교회를 찾는 자들이 늘어난 것이 아니라 생명의 복음, 생명의 교제를 통해 생명의 걸음을 걸어가는 자들이 늘어난 것을 의미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목회를 이어가며 늘 품고 있는 생각이 하나 있습니다. ‘세상 어느 곳에서도 소망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절망한 사람이 마지막으로 손 내밀 수 있는 곳이 교회이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화려하지는 않더라도, 세련되지는 않더라도, 멋 있지 않더라도 살아난 이야기들만큼은 날로 교회에 더해졌으면 좋겠다는 것이 저의 바램이자, 목회의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살아난 자들이, 누군가를 살리기 위해 연약하고 부족한 나를 먼저 살리셨음을 기억하고, 살고 싶어 하는 자들을 찾아다니며 생명의 복음을 전하는 교회, 살고 싶어 하는 자들이 생명의 소식을 전해듣기 위해 찾아오는 교회야 말로 진정한 생명의 교회라는 생각 때문입니다.

  바라옵기는 오늘 함께하는 저와 여러분의 인생이 그런 인생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성공했다고 많은 것을 가졌다고 어깨에 힘주면서 살아가는 인생이 아니라, 가진 것은 별로 없어보이지만 외로운 자들, 절망에 빠진 자들, 처참하게 무너지고 부서진 자들에게 손을 내밀 수 있는 사람, 또 그런 사람들이 언제든지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그런 사람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그와 함께 우리 교회도 그런 교회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군대라는 문화 속에서 삭막함으로 채워지지 않고, 군복무 속에서 정말로 힘들어 하는 자들, 외로운 자들, 절망에 빠진 자들, 처참하게 무너지고 부서진 자들을 향해 손 내미는 교회, 또 그런 자들이 언제라도 찾아와서 위로를 얻을 수 있는 교회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성경에 기록된 이 말씀들, “룻다와 사론에 사는 사람들이 다 그를 보고 주께로 돌아오니라” “온 욥바 사람이 알고 많은 사람이 주를 믿더라”라는 이 말씀이 “우리가 복무하고 있는 부대의 장병들이 다 그를 보고 주께로 돌아오니라, 많은 사람이 주를 믿더라”라는 기록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생명의 걸음을 함께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