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강해

<사도행전 강해22>은혜의 부르심(사도행전 9:10~19上)

남편, 아빠...그리고 목사 2026. 7. 8. 09:10

  바둑에는 '미생'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저도 바둑을 잘 모르지만, 바둑판에 놓여진 돌들은 사석, 미생, 완생으로 구분지어진다고 합니다. 사석은 바둑판 위에 있지만 죽을 수밖에 없는 돌을 뜻하고, 완생은 그와 반대로 상대가 어떤 수를 두어도 절대 죽지 않게 된 돌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미생'은 모든 가능성이 열려 있는 돌을 뜻한다고 합니다. 사울은 이전까지 자신의 인생이 '완생'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자신이 원하던 일을 향해 최선을 다해 달려왔고, 또 많은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았습니다. 모든 일은 막힘없이 잘 풀려가는 듯 했기에 아무런 걱정없이 달려가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꿈을 향해 폭주하며 대제사장의 공문을 받아 다메섹으로 향하던 날 사울에게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가 잡으려고 가던 사람들의 중심, 메시아 쇼를 하다가 저주를 받아 십자가에 달려 참혹한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다고 생각한 '예수'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예수를 만나고 사울의 세계관은 산산조각 났습니다. 이전에 자신이 맞다고 생각한 일들이 다 틀린 일이었으며, 최선을 다한 자신의 삶은 자신이 원하던 방향으로가 아닌 오히려 그 반대로 향하게 하였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완생이라고 생각한 인생이 실상 사석 인생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이 사울을 찾아가신 것은 단순히 그의 인생이 사석 인생임을 확인시키기 위함은 아니었습니다. 사석 인생에서 돌이켜 완생 인생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사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났고, 혼돈과 공허의 사흘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사석을 향하던 인생에서 철저하게 리셋이 되며 새로운 시작의 출발점에 서게 된 것입니다.

  이 출발점에서 사울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사람을 만나게 되고, 새로운 시작의 첫 걸음을 옮기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함께 예배하는 이 시간이 누군가에게는 새로운 시작을 위한 시간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또 누군가는 그 새로운 시작의 첫 걸음을 옮길 수 있도록 돕게 되는 기회일 수도 있겠죠. 바라옵기는 함께 예배하는 모든 분들이 어떤 모습으로 예배의 자리에 나아와 있던 함께 하는 이들을 위해, 서로를 위해 부르신 하나님의 부르심을 기억하고, 하나님 나라라는 완생을 향해 한 걸음 옮겨 갈 수 있는 은혜의 시간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사울은 이제 유대교로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몸은 그곳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겠지만, 그의 마음과 믿음은 유대교를 따를 수 없는 상태가 된 것입니다. 예수에 대해서, 예수를 믿는 사람들에 대해서 알고 싶은 마음이 더해졌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새로운 길 역시 현재 자신의 처지에서는 선뜻 나아가지 못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계속 나눈 것처럼 사울은 그저 마음으로만 그들을 미워하던 자가 아니라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예수 믿는 자들을 핍박했었고, 교회를 박해하던 자였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원래는 예수 믿는 자들을 붙잡아 예루살렘으로 끌고 오기 위해 다메섹으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그가 스스로 예수교로 나아가지 못하는 것은 물론, 그가 예수교로 나아간다 하더라도 그를 환영하며 받아줄 곳은 없었을 것입니다.

  이제 이 일을 위해 주님께서 친히 다시 한번 중매를 서십니다. 오늘 본문 910절 같이 읽겠습니다. "그 때에 다메섹에 아나니아라 하는 제자가 있더니 주께서 환상 중에 불러 이르시되 아나니아야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행9:10) 여기에 등장하는 아나니아는 사도행전 5장의 교회를 속인 아나니아와 다른 사람으로 사도행전 22장에 보면 아나니아에 대해 "율법에 따라 경건한 사람으로 거기 사는 모든유대인들에게 칭찬을 듣는아나니아라 하는 이가"(행22:12)라고 소개합니다. 아마 유대 사회에서 큰 신망을 받던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사흘 전 사울에게 나타나신 주님은 이제 아나니아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주님께서 그에게 나타나 "아나니아야"라고 부르시자 그는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라고 대답을 합니다. 어떤 말씀이든 주의 말씀이라면 순종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라는 표현입니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아나니아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1 주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직가라 하는 거리로 가서 유다의 집에서 다소 사람 사울이라 하는 사람을 찾으라 그가 기도하는 중이니라 12 그가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들어와서 자기에게 안수하여 다시 보게 하는 것을 보았느니라 하시거늘"(행9:11~12) 주님은 빌립이 에디오피아 내시를 만날 때와는 다르게 마치 네비게이션으로 번지수를 찍어주듯 정확하게 가야 할 곳을 알려주시고, 누구를 만나야 하는지를 알려주십니다.

  그런데 주님의 말씀을 들은 아나니아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울은 유대인으로서 정말로 마주하기 싫은 사람이었고, 또 마주해서도 안 되는 사람이었습니다. 주님이 아니라 주변 사람이 이런 이야기를 했더라면 '무슨 정신나간 소리야! 헛소리 하지마!'라고 반응할 만한 이야기였습니다. 그래서 이 말을 들은 아나니아는 이렇게 반응을 합니다. 13~14절입니다. "13 아나니아가 대답하되 주여 이 사람에 대하여 내가 여러 사람에게 듣사온즉 그가 예루살렘에서 주의 성도에게 적지 않은 해를 끼쳤다 하더니 14 여기서도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사람을 결박할 권한을 대제사장들에게서 받았나이다 하거늘"(행9:13~14) 쉽게 말해 이런 반응입니다. “주님? 사울이요? 사울이 어떤 사람인지 아시죠? 제가 듣기로 그는 예루살렘에서 저와 같이 예수 믿는 자들을 핍박하던 자였는데요? 그리고 대제자상들에게 권한을 얻어 여기에서도 마찬가지로 저희를 잡아가기 위해 온 사람인 줄 압니다만...주님 지금 말씀하시는 그 사람이 진짜 그 사울 맞는거죠?” 아무리 주님이셔도 사울을 만나라는 말은 잘 이해가 안 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사울이라는 사람에 대한 개인적인 감정이 아닙니다. 좀 더 객관적으로 생각해봐야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로 인해 초대교회가 형성될 때를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 나라에 어울리는 사람이 있었습니까? 예수님의 제자들은 어느날 자신들을 찾아오신 예수님과 함께 했습니다. 하지만 3년이 넘는 시간 동안 함께 해오면서도 그들의 가치관은 쉽게 바뀌지 않았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대부분은 도망쳤고, 돌아가시고 난 다음에는 뭘 해야할지 몰라 원래 있던 디베랴 호숫가로 돌아간 자들이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부활하신 예수께서 다시 찾아오셨습니다. 그들의 삶이 온전히 달라진 것은 그때부터였습니다. 오순절 회심 사건이 일어날 때 그곳에 모여 있던 사람들은 어땠습니까? 그들도 원래는 예수를 핍박하는 일에 동참하거나, 예수의 죽음에 찬성하던 자들이었습니다. 다들 사석 인생을 살아가고 있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 먼저 회심한 제자, 베드로의 메시지가 선포되었습니다. 그들 역시 그때 예수가 누구인지에 대해 깨닫고 난 후 모든 것이 달라졌습니다. 사석에서 미생을 지나 이제는 완생의 삶을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인정하지 못하던 사람들이 예수를 그리스도로 인정하자 모든 것이 달라졌습니다. 그들은 예수의 생명으로 살아가기 시작했습니다. 각자에게 허락하신 자리에서, 하나님께서는 각자의 그릇대로 사용하셨는데, 누군가는 가르치는 자가 되었고, 누군가는 전파하는 자가 되었고, 누군가는 섬기는 자가 되었으며, 누군가는 세우는 자가 되었습니다. 서로 다른 모습이었지만 그들의 삶을 통해 예수가 이어졌고, 예수가 머리 되셔서 그들을 하나되게 하셨으며, 그들은 허락하신 자리에서 교회가 되었습니다. 분명 사울은 그들보다 조금 더 과격했고, 또 조금 더 직접적이기는 하였지만 본질상 그들과 크게 차이는 없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친히 그의 인생에 개입하셨고 그들과 같이 사울을 부르시려고 하십니다. 15~16절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15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16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니”(행9:15~16) 이전에 사울은 예수의 이름을 지우기 위한 유대교의 그릇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달라졌습니다. 주님은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내 이름을 전하기 위한 나의 그릇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나니아는 주님의 말씀에 더는 주저하거나 지체할 수 없었습니다. 순종하였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그 집에 들어가서 사울을 만났고, 사울에게 안수하였습니다. 아나니아에게 또 예수를 믿는 사람들에게 사울은 원래 ‘원수’였습니다. 하지만 이제 달라져야만 했고, 또 달라졌습니다. 17절 말씀을 볼까요? 아나니아는 사울에게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셨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행9:17)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울을 예수교의 일원으로, 기독교 공동체의 일원으로 따뜻하게 받아들이며 권면을 한 것입니다. 그들은 유대와 사마리아처럼 결코 하나 될 수 없었지만 주님의 은혜 안에서, 은혜의 부르심 안에서 하나가 되었습니다. 사울의 인생은 전환점을 맞이하였고, 새로운 방향으로 한 걸음 옮기게 되었습니다.

  아나니아를 통해 안수를 받은 사울의 변화에 대해 성경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우리 18~19절 말씀 같이 읽겠습니다. “18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 일어나 침례를 받고 19 음식을 먹으매 강건하여 지니라”(행9:18~19) 유대교에 있을 때 사울은 승승장구하고 있었습니다. 세상의 기준으로 인정받고 있었으며, 자신의 열심과 사람들의 환호에 취해 사석을 향해 나아가는 자신의 인생을 인지하지 못하였습니다. 잘못된 성공관, 잘못된 메시아관, 잘못된 세계관은 봐야 할 것들을 보지 못하게 만들어 오히려 사울의 눈을 가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겨졌습니다. 이제는 봐야 할 것, 참된 것을 볼 수 있는 눈이 열렸습니다. 사울은 침례를 받았습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으며, 주로 섬기는 삶을 살아가기로 결단한 것입니다. 그리고 사울은 음식을 먹었습니다. 9절 “사흘 동안 보지 못하고 먹지도 마시지도 아니하니라” 에서부터 시작된 내적 갈등과 고뇌의 시간이 종결된 것입니다. 사울은 강건하여졌습니다. 사울의 변화가 사울에게 아주 긍정적인 변화로 이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복음으로 살아가는 삶의 가장 확실한 특징은 은혜가 흘러가는 삶입니다. 앞서 사도들과 빌립을 통해 그 일이 이어졌듯, 하나님께서는 오늘 본문에서 아나니아를 통해 사울에게 그 일이 이어지게 하셨습니다. 예수 믿는 자들에 대한 박해라는 엄청난 장벽이 편견으로 작용되기는 하였지만, 아나니아는 개인의 감정과 편견을 넘어 사울에게 주님의 뜻을 전하였습니다. 지금까지 사울은 예수 믿는 자들을 핍박하고, 예수 믿는 자들을 제거하며 보람과 기쁨을 누리던 자였습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를 만나게 된 사울은 실상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을 박해하는 인생으로 살아온 것에 대해 내적 갈등이 시작되었을 것이고, 하나님에 대한 엄청난 두려움이 이어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그에게 아나니아를 통해 전해진 말씀은 심판과 정죄의 말씀이 아닌 사랑과 용서의 말씀이었습니다. 아마도 지금껏 회심한 다른 이들과 같이 ‘사울아 네가 지금까지 어떤 모습으로 살아왔던지 나는 너를 사랑한단다. 나는 너에게 생명을 주기 위해 이 땅에 왔으며, 너는 누구에게도 빼앗길 수 없는 나의 것이다’라는 내용이었을 것입니다.

  그동안 사울은 세상에서 성공한 모습으로 인생을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달라졌습니다. 유대교가 기대한 높은 곳에 올라가 많은 것을 누리는 곳에 자신의 인생을 두었던 사울은 그 자리를 옮겼습니다. 사울은 이제 예수교가 따르고 있는 낮고 천한 곳, 지금 자신에게와 같이 복음이 필요한 곳으로 나아가 모든 것을 나누어야 하는 인생이 되었습니다. 사울은 이제 쫓는 자에서 쫓기는 자의 삶을 시작하였습니다. 핍박하는 자에서 핍박받는 자로서의 삶을 시작한 것이고, 가두는 자에서 갇히는 자로의 삶을 시작하였습니다. 하지만 사울에게는 그 무엇보다 가장 본질적인 변화가 있었습니다. 이제는 그로 인해 복음이 흘러가며, 은혜가 흘러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울은 죄로 물들어 있던 자신의 모습을 인정하였고, 죄로 물들어 있던 자신의 인생을 사랑으로 덮어주신 은혜를 경험하였습니다. 사울은 이후 자신에 대해 죄인 중에 괴수라고 하며, 나의 나 된 것은 오로지 주의 은혜라고 합니다. 은혜에 대한 경험, 복음에 대한 경험이 내가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삶으로 변화된 것입니다.

  그리스도 앞에서 우리의 인생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은혜를 경험하여 복음을 전할 수밖에 없게 된 자와 그 복음을 전해 들음으로 앞으로 복음을 전하게 될 자, 본질적으로 이 두 가지가 전부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 예배하는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하나님께서 부르신다고 생각하십니까? 오늘 이 시간에는 말씀을 마무리하며 여러분들과 함께 찬양하고, 기도하면서 설교를 마무리할까 합니다. 오늘 이 자리에 함께하는 우리 중 누군가는 아나니아와 같은 부르심에 응답해야 하는 상황도 있을 것입니다. 복음을 사모하고, 주님의 뜻을 사모하지만 편견의 장벽을 넘지 못해 온전히 복음을 전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또 누군가는 삐뚤어진 가치관으로 점점 무너져가고 있는 인생 속에서 벗어나지 못해 힘들어하고 있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 설교를 마무리하며 하나님의 은혜 앞에서, 또 은혜 안에서 온전히 서기를 소망하며 "하나님의 부르심"이라는 찬양을 함께 하겠습니다. 이 찬양 가사를 묵상하시며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을 견고히 하고, 부르심 앞에 더욱 온전히 서기를 결단하며 함께 찬양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네
내가 이 자리에 선 것도 주의 부르심이라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결코 실수가 없네
나를 부르신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네

작은 나를 부르신 뜻을 나는 알 수 없지만
오직 감사와 순종으로 주의 길을 가리라
때론 내가 연약해져도 주님 날 도우시니
주의 놀라운 그 계획을 나는 믿으며 살리

날 부르신 뜻 내 생각보다 크고
날 향한 계획 나의 지혜로 측량 못하나
가장 좋은 길로 가장 완전한 길로
오늘도 날 이끄심 믿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