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강해

<사도행전 강해23>새로운 삶, 생명의 삶1(사도행전 9:19b~22)

남편, 아빠...그리고 목사 2026. 7. 8. 09:54

  성경에는 하나님 또는 예수님을 경험함으로 이전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된 인물들이 등장합니다. 그 중 대표적인 인물이 구약 성경의 '호세아'입니다. 호세아는 이스라엘이 남과 북으로 갈라져 분열왕국의 시대가 이어질 때, 북이스라엘에서 활동했던 선지자입니다. 남유다에는 선한 왕들이 종종 있었지만, 분열왕국의 시작에서부터 북이스라엘이 멸망할 때까지 선한 왕이 하나도 없었을 정도로 북이스라엘은 처참하고 비참한 역사들이 이어졌습니다.

  어느날 호세아에게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아주 특별하고 명령을 하셨습니다. 바로 음란한 여인과 결혼을 하고, 음란한 자식들을 낳으라는 명령이었습니다. 호세아는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고멜이라는 여인과 결혼을 하였습니다. 고멜은 호세아와 결혼을 하였고, 아이들까지 낳았지만 음란함을 버리지 못하고 다른 남자들과의 관계를 이어가며 호세아를 떠났습니다. 어느날 호세아에게 뜻밖의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고멜이 다른 남자를 쫓아다니다가 잘못 걸려서 여기 저기로 팔려다닌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은 호세아에게 다시 말씀하시는데, ‘이제 됐다. 그동안 고생했다. 갖다 버려도 모자랄 판에 알아서 나갔으니까 깔끔하게 잊어라.’고 하셨다면 우리의 정서와 얼마나 잘 맞을까요? 하지만 늘 그렇듯이 하나님은 우리의 정서와 잘 맞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호세아에게 너는 다시 가서 잘못된 사랑을 구하다가 음녀가 된 그 여자를 더욱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호세아는 은 열다섯 개와 보리 한 호멜 반으로 그녀를 데리고 왔습니다. 그리고 그녀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 그에게 이르기를 너는 많은 날 동안 나와 함께 지내고 음행하지 말며 다른 남자를 따르지 말라 나도 네게 그리하리라 하였노라"(호3:3) 다시 말해, "고멜, 이제 앞으로의 날들은 나와 함께 해주시오. 더 이상 다른 남자와 관계를 맺지 말고, 나와 함께 해주시오. 나는 계속해서 당신을 사랑할 것이며, 당신이 나만 바라볼 수 있도록, 건강하고 온전한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기다리며 함께 할 것이오."라고 하며 따뜻하게 품어준 것입니다. 

  호세아의 이야기는 하나님과 북이스라엘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과 혼인 관계를 맺은 백성들, 하지만 거짓, 음란 등의 죄를 버리지 못하고 끊임없이 하나님을 멀리하던 북이스라엘 백성의 모습이 바로 고멜의 모습이었던 것이죠. 호세아는 고멜에게 사랑의 고백을 하며 북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입체적이고 실제적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호세아는 제정신으로 살아갈 수 없었습니다. 호세아 6장을 보면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호6:1),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호6:3) 라는 내용들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된 호세아가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난 후에 제정신으로 살아갈 수 없게 되어 북이스라엘을 향해 외친 뜨거운 절규입니다.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온전히 깨닫게 된 호세아는 그 사랑을 알리지 못하고는 견딜 수 없는 선지자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극단적인 변화를 경험한 인물은 신약성경에서도 찾을 수 있습니다. 바로 사마리아 수가성의 우물가에서 만난 여인입니다. 무너지고, 부서지고, 실패한 것 같은 인생을 살아가며 세상과 어울릴 수 없다고 생각한 이 여인에게 예수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사람의 눈을 피해 한낮에 우물을 길으러 온 이 여인은 예수를 만난 후 완전히 달라진 인생을 살게 되었습니다. 무너지고, 부서졌다고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또 자신의 생각에 스스로를 가두지 않았습니다. 예수를 만난 후 이 여인은 사람들이 모여있던 동네로 뛰어 들어가 외쳤습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만났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던 긴 터널 속, 긴 고생 끝에 발견하게 된 한 줄기의 빛은 그동안의 모든 고생을 잊게 만들며, 기쁨으로 달려나갈 수 있게 만드는 힘이 됩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던 북이스라엘의 현실 속에서의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된 호세아, 아무것도 보이지 않던 자신의 인생 속에서의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게 된 사마리아 여인은 한 줄기의 빛을 발견하게 되었으며 이제는 더 이상 방황하고 헤매는 인생이 아닌 힘차게 달려 나가는 인생이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복음은 믿음을 변화시키며 가치관의 변화, 세계관의 변화로 이어지게 하고, 이러한 변화들은 결국 삶의 변화로까지 이어지게 합니다. 즉, 복음은 우리에게 급진적이며 총체적인 변화를 맞이하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예수를 경험하셨습니까? 인생을 뒤집어놓으신 하나님을 경험하신 적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으로 새로운 희망을 맞이하게 된 터닝포인트가 여러분들에게도 있습니까? 오늘 우리는 지난 시간에 이어 급진적이고 총체적인 변화를 경험한 한 사람, 극단적인 회심을 경험한 인물, 사울에 대해 계속해서 살펴 볼 것입니다. 바라옵기는 사울에 대한 내용을 살펴보는 동안 오늘 함께 예배하는 우리도 거룩한 은혜 안에서 ‘거룩한 회심’을 경험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빠져나갈 수 없는 은혜를 경험하며 ‘회심’을 맞이한 사울처럼, 오늘 예배하는 우리도 빠져나갈 수 없는 하나님의 강권하심을 경험하며 새로운 삶으로 방향을 옮길 수 있는 은혜의 시간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그 동안 사울의 인생은 율법으로 흠을 찾을 수 없었던 사람이었으며, 유대교의 미래이자 정점을 찍고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를 죽인 유대인의 열심을 높이 산 사람이었으며, 그들의 열심을 따르기 위해 자신도 있는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예수 믿는 자들을 박해한 사람이었습니다. 또한 초대교회의 핵심 인물 중 한 사람이었던 스데반 집사의 죽음에 찬성하던 사람이기도 합니다. 사울은 이제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예수쟁이들을 더욱 잡기 위해 다메섹으로까지 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다메섹에 거의 다 와 갈 무렵 그가 잡으려고 한 사람들의 중심에 있던 예수, 메시아 쇼를 하다가 저주를 받아 죽었다고 생각한 예수를 실제로 만나게 되었습니다. '부활',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셨다는 것은 창조주 되신 하나님께서 옳다고 인정하신 일인데, 사울은 부활하신 예수, 하나님께서 친히 옳다고 인정하신 예수를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사울은 이 만남으로 인해 모든 것이 뒤집어졌습니다. 그가 옳다고 생각한 일이 다 틀린 일이었음을, 그가 최선을 다하던 일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가 아닌 하나님께 반역하는 일이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사흘 동안 볼 수도, 먹을 수도 없이 지나오던 시간 속에서 하나님은 '아나니아'라는 사람을 사울에게 보내셨고, 사울은 완전한 터닝포인트를 맞이하여 새로운 방향으로 한 걸음 옮기게 되었습니다. 이 방향은 단순히 삶의 모습이 달라진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우수한 성적을 가지고 있던 아이가 예수를 믿으면서 그동안의 모든 것은 배설물로 여긴다고 하며 공부와 담을 쌓는 것은 건강한 변화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의대를 다니던 친구가 신학대로 가는 것이 변화가 아니라 자신의 욕구를 채우기 위해 세상에서 성공한 인생을 살기 위해 의사가 되려고 했던 사람이 자신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위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의사가 되기로 마음 먹는 것처럼 동기와 목적의 변화, 마음의 변화, 중심의 변화입니다. 사울에게는 지금 그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사울이 변화되고 그 시작에는 특별한 점이 하나 있었습니다. 우리 오늘 본문 19절 하반절 말씀 같이 읽겠습니다. “사울이 다메섹에 있는 제자들과 함께 며칠 있을쌔”(행9:19下) 일단 사울이 어떤 사람입니까? 원래는 지금 함께 있는 제자들을 잡아 예루살렘으로 끌고 가기 위해 다메섹으로 내려온 사람입니다. 제자들의 입장에서 사울을 받아들이기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아나니아를 만나 회심을 한 사울을 외면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교회 공동체와 제자들은 사울을 용납하였고 받아들였습니다. 사울과 함께 하였습니다. 사울은 제자들과 함께하며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사울은 용서받기 어려울 것이라 생각했겠지만, 교회 공동체는 사울의 모습을 사랑으로 안아주었고, 그를 축복 해주었을 것입니다. 유대교 공동체에서는 가진 것, 이룬 것 등을 통해 자신의 능력을 증명해야지만 인정받을 수 있었는데, 교회 공동체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들을 핍박하던 자신의 모습까지도 받아주었고, 자신이 가진 무엇이 아닌 존재 자체에 대한 사랑을 경험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며 가치관과 세계관의 변화를 경험한 사울은 교회 공동체를 경험하며 하나님 나라에 대한 그림이 그려졌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정답을 발견하고, 예수님을 통해 만들어지는 나라가 어떤 곳인지 직, 간접적으로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사울은 이전과 비교할 수 없는 기쁨을 누리게 되었고, 자신의 메시아관으로는 상상할 수 없었던 아름다운 하나님 나라를 보게 되었습니다. 사울은 사마리아 여인이 동네로 뛰어 들어간 것과 같이 회당으로 나아갔습니다. 20절 볼까요?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행9:20) 원래 사울은 다메섹에 있던 동료 유대인들에게 영향을 미치려던 예수쟁이들을 붙잡아 예루살렘으로 끌고가기 위한 목적으로 다메섹에 온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유대인 회당에 가서 그가 붙잡으려던 예수쟁이들과 같이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죽였던 예수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메시아임을 선포한 것입니다. 20절 끝에 있는 “전파하니”라는 단어는 일회성을 뜻하는 단어가 아닙니다. 헬라어 미완료시제를 사용한 것으로 보아 일정 기간 동안 계속, 반복해서 그 일을 이어갔다는 것입니다. 단순히 그들을 정죄하고자 함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아마도 호세아 선지자와 같이 그동안 자신이 서 있었던 자리가 불구덩이었음을 깨닫고 그들 역시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이 필요한 상황임을 외쳤을 것입니다.

  이어지는 21절은 그때 회당에 있던 사람들의 반응입니다. “듣는 사람이 다 놀라 말하되 이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이 이름 부르는 사람을 잔해하던 자가 아니냐 여기 온 것도 저희를 결박하여 대제사장들에게 끌어 가고자 함이 아니냐 하더라”(행9:21) 회당에서는 깜짝 놀랄만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아니 깜짝 놀랄 정도가 아니라 회당이 뒤집어 질 만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이런 파장을 사울이 몰랐을까요? 회당에서 자신이 그런 메시지를 선포하게 되면 어떤 대가를 치러야 할지 분명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동안 쌓아왔던 자신의 경력, 지식과 함께 사람들에게 인정받던 모든 것들을 내려놓게 되는 일임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또한 유대인들이 십자가에 매달았던 예수와 같이, 또한 얼마 전 자신의 눈앞에서 죽임을 당한 스데반과 같이 이제는 자신도 그러한 운명을 맞이하게 될 것도 알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울이 이와 같은 일을 이어가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분명하고 확고한 믿음, 예수님을 향한 믿음과 하나님 나라를 향한 믿음이 그의 삶을 붙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의 반응에 사울은 굴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힘을 더 얻어 예수를 그리스도라 증명하였습니다. 22절에 ‘증언하다’라는 단어는 타당함을 입증하며 설득력 있게 증명했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생각을 해보세요. 사울은 누구보다도 성경에 대해서 잘 알고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유대교 편에 있을 때는 아주 든든하게 느껴졌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는 사울의 목적과 동기가 전혀 달라졌습니다. 그가 가진 지식은 예수님을 경험하고 퍼즐 조각이 맞춰지듯 완성되었고, 이전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엄청난 힘을 얻게 되었습니다. 22절 끝에 유대인들을 당혹하게 하였다는 것은 공회에 끌려갔던 베드로, 스데반과 같이 설득력 있게 증명함으로 인해 반박할 수 없게 만들어 굴복시켰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사울은 유명한 자였으나 스스로 무명한 자가 되는 길을 택하였습니다. 세상에서 죽은 자 같이 되었지만 하나님 앞에서 산 자가 되었고, 박해하는 자에서 박해받는 자가 되었지만 영원히 살아갈 수 있는 길을 걸어가게 되었습니다. 그에게 닥친 현실은 근심할 수밖에 없는 것들이었지만 항상 기뻐하는 자가 되었고, 모든 부유함을 내려놓고 가난한 자가 된 것 같았지만 오히려 이전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세상 가운데 죽음을 선포하며 아무것도 없는 자가 된 것 같았지만 그의 안에 살아계신 주님은 모든 것을 가진 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들은 예수를 왜 믿고 있습니까? 또 예수를 어떻게 믿고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로 전해지는 복음은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더해주는 것이 아닙니다. 건강과 물질, 세상에서의 성공을 꿈꾸며 예수를 믿는다면 그것은 아마도 예수를 만나기 이전 사울이 믿고 있던 유대교의 신앙과 오히려 더 가까운 모습일 것입니다. 또한 지금보다 조금 더 착한 마음을 가질 수 있게하거나 다른 사람들보다 착한 삶을 살아가도록 돕는 것도 아닙니다. 사울의 회심에서 알수 있듯 복음은 먼저 지금껏 우리의 인생이 하나님께서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실 때의 목적, 즉, ‘그리스도’로부터 얼마나 벗어나 있는지를 알려줍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자신을 하나님을 믿는다고 했던 유대인들에 의해 죽임을 당하셨다는 사실은 그들이 실제로는 얼마나 하나님에게서 멀어져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분명한 증거입니다. 또한 그들의 손에 죽임당한 예수를 하나님께서 다시 살렸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친히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를 세상에 분명히 나타낸 증거입니다. 오순절 성령의 사건을 통해 자신의 인생이 하나님의 아들을 알아보지도 못하던 죄인이었음을 인정하던 사람들이 주님께 나아왔습니다. 자신의 인생이 이 죽음 앞에 놓여 있음을 인지하게 된 사람들이 하나님께 나아 온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어찌할꼬라고 하며 도움을 요청하였고, 이들은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고 죄사함을 얻어 성령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이것이 초대교회의 시작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사울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경험하고, 사울은 사흘간의 시간을 통해 자신의 인생에 죽음을 선포하였습니다. 세상에서의 성공을 향해 나아가던 자신의 인생에 죽음을 선포하였습니다. 유대교의 미래로 여겨지던 자신의 인생에, 유대교 율법주의자로서는 자랑할 것이 많이 있었던 자신의 인생에 죽음을 선포하였습니다. 자신의 인생을 만들어오던 가장 깊숙한 곳의 본질에 심각한 문제의식을 느끼고, 죽음을 선포한 것입니다. 사울의 믿음이 달라졌고, 방향이 달라졌으며, 삶이 달라졌습니다. 박해하는 삶에서 박해받는 삶이 되었고, 예수를 저주하던 자에서 예수를 선포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앞으로의 여정에서도 알 수 있듯 사울은 그동안 죽이는 삶을 살아왔지만 이제는 살리는 삶으로서 자신의 삶을 이어가게 되었습니다.

  오늘 예수를 믿는다고 모인 우리 삶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예수의 모습에 비추어 보았을 때 우리의 인생은 문제가 없습니까? 잘 살아가는 가운데 우리가 원하던 것 하나 더 얻어진다면 우리의 인생은 정말로 더 괜찮아질 것 같으십니까? 바라옵기는 오늘 함께 예배하는 우리도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를 만난 사울과 같이 진지하게 예수 그리스도 앞에 우리의 모습을 비춰 볼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우리 인생에 가장 본질적인 문제, 그리스도를 잃어버림으로 발생되고 있는 문제들을 발견하여 초대교회의 성도들과 같이 또 사울과 같이 ‘이제 우리가 어찌할꼬’라고 하며 겸손하게 엎드릴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그리하여 우리를 찾아오시는 주님께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새로운 길을 통해 새로운 삶을 살아가며, 생명의 길을 통해 생명의 삶을 펼쳐가는 믿음의 성도님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