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사고는 안타까운 일이지만, 몇 해 전 정말로 안타까운 사고가 일어난 적이 있습니다. 10대 5명이 몰던 차가 탑승자 전원이 사망하게 된 사고입니다. 이 사고 조사 기록에 의하면 이 차는 제한속도 80Km의 도로에서 135Km의 속도로 달리다가 빗길에 미끄러지며 건물에 충돌하게 된 사고였습니다. 아마도 운전 미숙으로 인한 사고로 예측이 되는데, 운전자는 사고때까지 브레이크를 밟지 않았다고 합니다. 운전자가 이 차를 빌리기 위해 렌터카 업체에 제시한 면허는 분실된 것이었고, 렌터카 업체에는 이전에도 이 운전자에게 불법으로 차량을 빌려준 적이 몇 차례 더 있었다고 합니다.
10대의 어린 나이에 차를 빌려서 탄 첫 경험이 어땠을까요? 긴장도 있었을 것이고, 스릴도 있었을 것입니다. 다음에 차를 빌려서 탈 때에는 좀 더 익숙해진 운전 실력으로 속도도 내어보고 즐기기도 했겠죠. 아마 사고를 당한 그날은 이전보다 익숙한 실력으로 운전을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자신의 한계를 몰랐고, 그 한계를 벗어날 때 어떤 결과를 맞이하게 될지를 미처 몰랐을 것입니다. 속도를 올릴수록 속도감은 짜릿하게 느껴졌을 것이고, 함께하는 이들도 환호하며 즐겼을 수도 있습니다. 만약 다시 그때로 시간을 돌이킨다면 이 아이들에게 주어질 수 있는 가장 큰 축복은 무엇이었을까요? 렌터카 업체에서 문제를 느끼고 차를 빌려주지 않았더라면, 차를 타고 나갈 때 경찰관을 만나 제지를 당하였다면 또는 속도를 내며 달리고 있을 때 경찰관에게 단속을 당하여서 차를 멈출 수 있었다면 어쩌면 그것이 그 시간 속의 그들에게 가장 큰 축복이 아니었을까요?
우리의 인생도 그와 같은 모습이 있습니다. 분명 올바르지 못하고, 건강하지 못한 결말을 맺을 것을 알면서도 잘못을 이어가고, 잘못을 고쳐갈 수 있는 수많은 기회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기회를 무시하거나, 외면하기도 합니다. 당장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다는 이유 때문에 쾌락을 즐기며 그 일을 계속 이어가는 것이 오늘날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그 결과를 맞이하기 전에는 대부분이 그 일이 잘못된 것임을 인지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인생 속에서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던 우리의 걸음이 멈춰지고, 올바른 길로 나아갈 수 있게 된다면 그것은 우리의 인생에서 경험할 수 있는 가장 큰 은혜이며 가장 큰 축복일 것입니다. 욕망을 불태우며 쾌락을 즐기던 모습이 나를 죽이고, 함께하는 이들을 죽이는 일이었음을 깨닫고, 내 인생의 자부심으로 여기며 자랑하던 모든 것들이 오히려 수치였음을 깨닫게 되는 그 일, 신앙에서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죄에서 의로, 고아에서 자녀로, 창기에서 신부로 변화되는 이러한 사건을 ‘회심’이라고 합니다.
오늘 우리는 성경에서 가장 극적인 변화를 경험한 인물 중 하나인 ‘사울’, ‘바울’의 회심에 대한 내용을 함께 살펴 볼 것입니다. 바라옵기는 사울의 이 이야기가 먼 옛날 아주 특별한 사람에게 일어난 사건으로 생각하며 우리와 상관없는 일로 여기는 것이 아닌 오늘 함께 예배하는 우리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은혜의 사건임을 기억하며, 거룩하고 위대한 은혜로 이루어지는 회심의 축복을 경험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초대교회 첫 순교 사건인 스데반이 죽임을 당할 때, 한 인물이 등장하였습니다. 이 사람은 스데반의 죽음을 마땅히 여겼던 자였으며, 스데반을 죽이는 것으로 모자라 교회를 잔멸하기 위해 각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내어 옥에 넘기던 사람이었습니다. 이 청년의 확신에 찬 폭주에 유대교 지도자들은 환호하였으며, 그들의 환호를 힘입어 마치 브레이크가 고장난 자동차처럼 이 청년은 무한 질주를 이어가고 있었습니다. 이 청년이 바로 오늘 본문의 주인공 ‘사울’입니다. 먼저 오늘 본문 1~2절 말씀 같이 읽어보며 그의 모습을 살펴 보겠습니다. “사울이 주의 제자들에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가져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따르는 사람을 만나면 남녀를 막론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 함이라”(행9:1~2) 사도행전의 저자는 그의 모습에 대해 사납고 잔인한 짐승을 묘사하듯 이야기합니다.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였다고 하는데, 그의 호흡에서도 위협과 살기가 느껴질 정도였다는 말입니다.
그는 스데반을 죽이고, 교회를 잔멸한 것처럼 예수를 믿는 자들이라면 어떤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퇴치하고 하는 열정이 가득한 사람이었습니다. 사울은 지금껏 해 온 일에서 더 나아가기를 원했습니다. 주의 제자들에 대한 위협과 살의가 가득한 상태로 대제사장에게 나아가 온 유대에 퍼져나가게 된 예수 따르는 자들을 예루살렘으로 잡아 올 수 있도록 권한을 달라고 한 것입니다. 그 일은 대제사장들이 원하던 일이었기에 그들은 청년 사울의 열정을 반기며 환호를 하였을 것입니다. 이제 사울은 그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며 예수 믿는 자들을 온전히 멸하기 위해 다메섹으로 떠나게 되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다메섹까지는 약 200Km 정도가 된다고 합니다. 5~6일 정도 걸어야 도착할 수 있는 거리입니다. 사울은 한참을 걸었고, 이제 다메섹이 그리 멀지 않은 곳까지 이르렀습니다. 다메섹에 거의 도착할 무렵 사울에게 생각지도 못한 특별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9장 3절 말씀 같이 읽겠습니다. “사울이 길을 가다가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는지라”(행9:3)ㅍ제가 언젠가 호랑이에 대한 영상을 보니까 호랑이를 마주하면 도망칠 수가 없다고 하더라구요. 호랑이의 포효 소리를 들으면 오금이 저리는 정도가 아니라 신경이 마비된다고 합니다. 지금 사울은 호랑이의 울음소리 정도가 아니라 마른하늘에 날벼락과 같이 전혀 예기치 못한 상황 속에서 설명하기도 어려운 엄청난 빛을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이후 사울은 사도행전 후반부에서 이 일에 대해 언급을 하며 사도행전 22장에서는 ‘큰 빛’이라고 표현을 하고, 26장에서는 ‘해보다 더 밝은 빛’이라고 표현을 하는데, 초자연적인 현상, 누가보더라도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이 일을 사울이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성경의 인물들이 하나님을 만났을 때 그랬던 것처럼 사울 역시 놀람과 함께 엄청난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사울은 바로 땅에 엎드렸습니다. 아니 엎드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자 하늘에서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행9:4)사울이 물었습니다. “주여, 뉘시오니이까?”(행9:5) 그 음성의 주인은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행9:5) 사울은 예수 믿는 사람들을 박해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사울이 진짜 싫어하고 미워하였던 것은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겉으로는 사람들을 핍박했지만, 사울이 없애려고 했던 것은 그들이 믿고 있던 예수였고, 그들로 인해 나타나고 있던, 확장되고 있던 예수의 뜻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사울에게 나타나셔서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라고 물으신 것이었으며,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라고 답을 하신 것입니다.
사울은 이전까지 예수는 메시아 쇼를 하다가 저주를 받아 십자가에 달려 비참하게 죽은 사람 정도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뿐만이 아니라 그 쇼를 추종하는 모든 자들도 죽어 마땅하다고 여겼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인간적인 미움으로 이어진 열심은 아니었습니다. 유대교 지도자들이 그랬던 것과 같이 절대적으로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반응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어떤 상황이 벌어진 것입니까? 사울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 하나님의 모습으로 누구보다도 싫어한 예수님이 그의 앞에 나타난 것입니다. 사울은 지금까지의 인생에서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엄청난 충돌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를 하나님으로 인정하면 자신의 모든 것이 무너질 수밖에 없는데, 또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을 수도 없는 그런 상황에 맞닥뜨리게 된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너는 일어나 시내로 들어가라 네가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행9:6)는 말씀을 남기고는 사라지셨습니다. 대제사장으로부터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가져갈 공문을 들고 예수 믿는 자들을 예루살렘으로 잡아오기 위해 떠난 길이었는데, 사울에게는 이제 또 다른 목적, 전혀 다른 목적이 생겼습니다. 이제는 대제사장의 명을 행하기 위해 다메섹으로 가는 자가 아닌, 예수의 명을 따라 나아가야 했습니다. 사울은 일어나 눈을 떴지만 아무것도 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리고 사흘 동안 보지 못하고 먹지도 마시지도 아니하였다고 합니다. 아마도 사흘 전에 자신에게 닥친 일이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왔을 것입니다. 사흘간의 시간은 지난날 자신이 해 온 일들이 무엇이었는지를 돌아보는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그가 그토록 핍박하던 예수는 메시아 쇼를 하던 사람이 아닌 진짜 메시아로 이 땅에 오신 하나님, 말씀이 육신되어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시간이 되었을 것입니다. 사흘간의 시간은 새로운 농사를 위해 밭을 갈아엎듯 사울의 모든 것이 갈아엎어지는 시간이되었을 것입니다.
그동안 옳다고 생각한 것이 실상 틀린 것이었고, 잘한다고 생각한 것이 실상은 잘못하고 있었던 것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사상, 경험, 지식, 신학 등 그의 모든 가치관과 세계관이 자신이 믿고 있던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핍박하고 박해하는 것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모든 인생을 걸고 배워왔으며, 익혀왔던 것들이 자신이 원하는 방향의 반대편으로 나아가게 하고 있었음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훗날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3장에서 이런 고백을 합니다. “7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9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빌3:7~9)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을 위한다고 살아가던 사울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핍박하며 폭주하였고, 벼랑 끝에서 추락하기 일보 직전 예수님께서 하나님으로 나타나신 일로 인해 겨우 걸음을 멈출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만약 사울이 다메섹으로 나아가서 본래 하려던 일을 성공적으로 완수하고 유대교 지도자들에게 환호를 받으며 돌아왔다면 어땠을까요? 성공적인 결과로 지금 유대교 지도자들의 자리에 사울도 올라갔더라면 어땠을까요? 아니면 이런 극적인 경험을 하고서도 그 후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계속해서 자신의 일을 이어갔더라면 어땠을까요? 그랬다면 과연 우리는 사울의 인생을 성공적인 인생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사울은 이 일을 기점으로 완전히 변화된 인생을 살아가게 됩니다. 사울의 인생은 갈아엎어졌고, 갈아엎어진 인생에 예수가 심어졌습니다. 예수가 심어진 사울은 이전과 완전히 다른 삶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핍박하던 자에서 품어주는 자가 되었고, 무너뜨리는 자에서 세우는 자가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죽이는 자에서 살리는 자로서의 인생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멈춰 서게 된 그 일은 유대교 지도자들의 기대를 저버리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일은 오히려 사울의 인생에서 최고의 은혜를 경험하는 축복의 시간이 되었습니다.
저는 오늘 이 예배가 함께 하는 우리 모두에게 다메섹 도상이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예배 가운데 함께하시는 하나님으로 인해, 우리에게 비춰지는 하나님의 빛으로 인해 우리의 어둠이 온전히 드러나는 은혜의 시간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자신의 미래를 갉아먹으며 지금의 쾌락만을 누리려고 하는 우리의 모습, 누군가의 인생을 갉아먹으면서도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무엇인가를 얻는 것에만 집중하던 모습, 설령 다른 이들에게 해가 된다 하더라도 내가 원하는 목적만을 이루면 괜찮다고 생각하던 우리의 모습을 겸손하게 인정할 수 있기를 소망하고, 그런 모습들이 갈아엎어지는 은혜를 경험하는 시간이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모습으로 사울에게 나타나셔서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 ‘너는 나쁜 놈이야!’라고 하며 그의 인생을 무너뜨리기 위해 찾아오시지 않으셨습니다. 사람들의 환호와 기대에 숨겨진 거짓 기쁨을 버리고, 하나님 안에서만 누릴 수 있는 참 기쁨을 주시기 위해 찾아오신 것입니다. 죽이는 인생이 아닌 살리는 인생이 되게 하기 위해, 사망의 길을 멈추고, 생명의 길을 걸어가게 하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이 예배에 어떤 동기를 가지고, 어떤 목적으로 나왔는지 저도 알 수 없고 우리는 서로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자리에 세우셨다는 것이고, 이 자리에서 우리를 만나기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바라옵기는 오늘 함께 하는 모든 분들이 오늘의 이 예배를 통해 예수님을 경험하여 인생에 대한 진지한 고민과 함께 우리 인생의 가장 복되고 참된 길을 누리는 은혜의 삶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우리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삶으로 살아가며 사도 바울의 고백과 같이 이전 것이 지나가고 새것이 된 삶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며, 나의 나 된 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하는 믿음의 삶으로 생명의 길을 걸어가는 저와 여러분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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