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강해

<사도행전 강해18>생명의 복음, 흩어지는 교회(사도행전 8:1~8)

남편, 아빠...그리고 목사 2026. 7. 6. 23:22

  지난 시간까지 우리는 초대교회의 핵심적인 인물 중 한 명, 스데반 집사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스데반 집사는 마땅히 또 당연히 행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었고, 세상의 위협 속에서도, 심지어 생명을 위협하는 일을 마주하더라도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온전히 행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스데반 집사의 모습은 공회에 끌려간 상황 속에서 더욱 분명히 나타났습니다. 공회에서도 스데반 집사는 벌벌 떨며 억지로 믿음을 지켜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천사와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고 자신에게 주어진 변론의 기회에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진리를 선포하였습니다. 스데반 집사는 구약성경을 통해 진짜 문제가 무엇인지를 밝혔습니다. 그의 이야기에는 헛점이 없었고, 오히려 설득력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공회에 모인 유대교 지도자들은 스데반의 이야기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귀를 막았습니다. 뿐만아니라 스데반의 입을 막기 위해 그를 죽이기로 작정 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지켜오는 것을 건드린다면 그것이 진리라 할지라도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 역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였지만 그들에게 채워져 있던 것은 신앙이 아니라 완고한 고집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완고함은 꼭 유대교 지도자들에게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자신의 전통, 자신의 경험, 자신의 지식, 자신의 생각 등으로 견고한 울타리를 만들고, 자신이 인정하는 한도 내에서만 진리를 받아들이려고 하는 태도는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있는 것이며, 쉽게 깨어지기 힘든 것이기도 합니다. 해야 할 일 보다는 하고 싶은 일을 하고, 들어야 할 말 보다는 듣고 싶은 말만 들으려고 하는 그런 모습은 우리와 상관 없는 모습은 아니지 않습니까?

  스데반 집사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 하나는 '성령의 충만함입니다. 성령의 충만함은 무엇인가가 더하여져서 나타나는 특별한 변화와 같은 것이 아닙니다. 성령은 능력이나 은사와 같은 것이 아닙니다. 그런 것도 성령 충만함으로 나타날 수 있는 부분적인 모습일 수도 있지만, 성령충만의 본질은 '순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성령의 이끄심에 전적으로 굴복한 상태가 바로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별히 지난 3주 동안 살펴본 6장과 7장에서는 스데반과 유대교 지도자들을 통해 성령 충만한 사람의 모습과 성령과 상관없이 종교의 전통만을 이어가는 무리의 대조적인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진리를 포기하더라도 세상에서 성공을 구하는 사람, 세상에서의 성공을 내려놓게 되더라도 진리를 붙드는 사람 우리가 지향하는 삶의 모습은 어떤 것입니까? 사도행전의 내용을 살펴보는 동안 우리에게 이 질문은 계속 이어지게 될 것입니다. 바라옵기는 우리가 함께 예배하는 이 시간 함께 예배하는 모든 분들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사람들이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듣고 싶은 이야기보다는 들어야 할 이야기를 겸손하게 들을 줄 알고, 하고 싶은 일을 하기 보다는 해야 할 일을 할 줄 아는 그런 사람들이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또한 그런 모습으로 한마음 한뜻이 되어 우리에게 주어진 삶에 희망의 빛을 비출 수 있는 믿음의 사람들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오늘 본문은 사실 지난 본문과 이어서 살펴봐야 그 의미가 더 잘 전달될 수 있는 본문이기도 합니다. 스크린으로 성경을 읽어서 잘 느끼지 못하셨겠지만, 성경책을 펼쳐보면 8장 1절은 그 전의 내용과 이어지는 것처럼 표기를 해놓았습니다. 7장과 이어서 보면 분명히 보이는 것이 하나 있는데, 바로 '사울'이라는 인물이 어떤 사람인지에 대한 것입니다. 7장 마지막에는 스데반이 죽임을 당하는 장면이 설명됩니다. 스데반의 발언에 마음에 찔려 스데반을 향해 이를 간 유대교 지도자들은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그에게 달려들어 성 밖으로 내치고 돌로 쳤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옷을 벗어 사울이라는 청년의 발 앞에 두었다라고 합니다. 그들이 지금 하고 있는 행동에 책임지는 자리에 있었던 바울이 동의를 했다는 것입니다. 이제 유대교 지도자들과 스데반을 고발한 무리뿐만이 아니라 주변에 모인 사람들도 스데반을 향해 돌을 던지기 시작했습니다.

  이 장면을 이야기하고 있는 7장 59절부터 8장 1절까지 쭉 이어서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59 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60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1 사울은 그가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 그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박해가 있어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행7:59~60, 8:1) 7장 마지막에서 스데반의 죽음을 표현하고, 1절에서는 사울의 반응을 이야기하는데, ‘마땅히 여기더라’라고 합니다. 이 표현은 단순히 알겠다고 승인을 한 것이 아니라 원어상에는 ‘함께 하는 것을 기뻐하다. 기꺼이 같이 하다’라는 의미를 가진 표현입니다. ‘즉, 사울은 스데반이 죽임 당하는 일을 기뻐하였다’는 표현입니다. 이 사건은 앞으로 사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때 종종 등장하게 될 것입니다. ‘사울이 이런 사람이었다.’ 정도로 이해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이제 스데반의 죽음을 시작으로 교회에는 피바람이 불기 시작했습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는 큰 박해가 있었고,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졌습니다. 3절을 보면 사울은 교회를 잔멸 하였다고 하는데, ‘잔멸하다’는 말은 멧돼지와 같은 산 짐승이 온 밭을 휘저어 놓아 망가뜨릴 때 사용하는 표현입니다. 즉, 사울은 예수를 믿는다는 얘기만 들리면 그런 집들을 찾아다니고 들쑤시면서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을 다 끌어다가 옥에 넘겼다는 것입니다.

  슬프고, 어둡고,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 4절은 이렇게 이어집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새"(행8:4) 자발적으로 선교를 떠난 것도 아니었고, 계획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이들은 어떻게, 어디로 흩어질지도 모른 채 어떤 강압적인 힘에 의해 쫓겨나다시피 흩어졌습니다. 그런데 그 흩어진 사람들은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들이 흩어진 곳이 어디입니까? 8장 1절의 하반절을 보면 "그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박해가 있어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행8:1下)라고 합니다. 뭔가 살짝 냄새가 나죠? 우리 사도행전의 핵심 말씀이라고 할 수 있는 1장 8절 말씀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1:8) 이들이 흩어진 것은 공교롭게도 유대와 사마리아입니다. 예루살렘에 있던 교회라는 불씨에 박해라는 바람이 불어왔습니다. 교회는 이제 더 이상 예루살렘이라는 지역에 한정되어 있지 않았고, 온 유대와 사마리아로까지 확장되었습니다. 우리의 생각으로는 다 이해할 수 없지만, 마치 하나님께서 그 일을 이루기 위해 이 상황들을 만들어 가신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하나만 더 살펴보겠습니다. 사도행전 8장에서는 또 한 명의 새로운 인물이 등장합니다. 5절 말씀 같이 읽겠습니다. “빌립이 사마리아 성에 내려가 그리스도를 백성에게 전파하니” 사도행전 8장에서는 스데반에 이어 빌립이라는 인물이 등장합니다. 빌립은 스데반과 마찬가지로 사도행전 6장에서 헬라파 유대인들의 구제를 위해 세운 일곱 일꾼 중 한 명입니다. 즉, 스데반과 마찬가지로 성령의 충만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빌립의 행동은 독특했습니다. 그는 사마리아로 향했다고 합니다. 초대교회 공동체에서 함께 했던 성도들이라면 사도행전 1장 8절의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는 말씀을 들었을 것이고 기억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사마리아가 어떤 곳입니까? 사마리아인들은 유대인들이 원수로 여기고 심지어 짐승처럼 여기던 절대로 상종하지 말아야 할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마리아 땅을 밟기만해도 부정타고 저주를 받는다고 생각하여 피해 다녔던 곳입니다. 유대인들에게는 땅끝보다 심리적으로 더 먼 곳이 사마리아였을 수도 있습니다. 아무리 성령 충만한 성도들이 모인 초대교회라고 한들 ‘사마리아’에 들어가서 복음을 전하는 것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초대교회에 일어난 박해로 인해 이제 사방으로 흩어질 수밖에 없는 돌발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성령의 충만한 사람 빌립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박해를 피해 도망치는 동안에도 성령님께서 계속 말씀하시지 않았겠습니까? “빌립아,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이다 기억하고 있지” 이런 말씀이 계속 환청처럼 들리지 않았겠습니까? 박해로 인해 교회가 흩어지며 정신없는 상황이었지만 빌립은 지금이야말로 사마리아로 나아가야 할 때임을 직감적으로 느꼈던 것 같습니다. 짐승처럼 여기며 상종도 하지 않았던 그들에게 빌립은 ‘그리스도’를 전했습니다. 빌립이 복음을 전할 때 사마리아의 반응에 대해 6절에서 이렇게 기록합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무리가 빌립의 말도 듣고 행하는 표적도 보고 한 마음으로 그가 하는 말을 따르더라”(행8:6) 여기서 한 마음으로라는 단어에서도 알 수 있듯 사마리아 사람들은 빌립이 하는 말에 집중하였음을 뜻하는 표현입니다. 7절도 이어서 보겠습니다. 많은 사람에게 붙었던 더러운 귀신들이 크게 소리를 지르며 나가고 또 많은 중풍 병자와 못 걷는 사람이 나으니”(행8:7) 많은 이라는 단어를 두 번이나 사용한 것으로 알 수 있듯, 사마리아에서 행한 빌립의 표적은 아마도 엄청난 일로 보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단순히 빌립의 능력을 나타내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행전 4장에서는 성전 미문에 앉아있던 앉은 뱅이를 고친 사건으로 공회에 붙잡혀 갔던 베드로와 요한이 풀려나왔을 때 그들의 이야기를 들은 성도들이 기도한 내용이 나옵니다. 기도 중 그들이 마지막으로 간구하였던 내용을 한 번 보겠습니다. 29절 30절입니다. “29 주여 이제도 그들의 위협함을 굽어보시옵고 또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시오며 30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시옵고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하더라”(행4:29~30)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분명 성령의 일이었습니다. 성령께서는 예루살렘뿐만이 아니라 온 유대와 사마리아에서도 그들의 간구를 들으시고, 그 일을 친히 이루어가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승천하시기 전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큰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령의 사람들은 교회를 이루기도 하였고, 각자의 자리에서 또 한마음 한뜻으로 성령의 일을 감당하고 있었습니다. 어느날 교회에는 큰 박해가 이어져 흩어질 수밖에 없었지만, 그들은 그 순간에도 성령이 이끄시는 곳을 향하여 나아갔고, 성령의 이끄심을 따라 허락된 자리에서 허락하신 방법대로 허락하신 일을 감당했습니다. 정리하자면 빌립은 성령께 순종하는 모습을 나타내었을 뿐입니다. 다시 말해, 성령께서는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빌립을 통하여, 성령께 전적으로 순종한 빌립을 통하여 사마리아 땅에 그리스도를 전하여 준 것으로, 성령께서 빌립을 통해 일하신 것입니다.

  이 일로 사마리아 성에 주어진 결과에 대해 성경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8절입니다. “그 성에 큰 기쁨이 있더라”(행8:8) 복음이 우리에게 주는 가장 본질적인 선물은 하나님께서 태초의 인간에게 허락하신 에덴동산, 즉, 기쁨의 회복입니다. 예루살렘의 성도들은 성령을 통해 먼저 그 기쁨을 누린 자들이었으며, 고난 속에서도 그 기쁨 안에 거하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흩어짐 속에도 사마리아까지 나아가 그 기쁨을 전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인간은 누구나 종교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공식적으로 기독교, 천주교, 불교 등의 종교를 가지고 있지 않다 뿐이지 누군가는 돈을 의지하고, 돈이 주어지는 길이라면 순종하며 따라갑니다. 또 누군가는 힘을 의지하고 힘이 더해지는 일이라면 순종하며 따라가기도 하죠. 의지하고, 순종하며 따라가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의 진짜 종교인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따라가고 의지하는 이유는 그것이 우리에게 기쁨을 줄 것이라는 믿음 때문입니다.

  설교 서두에서 저는 성령의 충만함은 성령님께 전적으로 순종한 상태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모든 선택 중 가장 우선적으로 생각하고, 우선순위를 두어 선택하는 것이 바로 충만함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죠. 그런 의미에서 생각해 보면 여러분은 무엇에 충만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무엇을 주인 삼아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질문을 살짝 바꾸어서 이렇게도 한 번 물어보겠습니다. 여러분은 돈에 충만한 사람, 힘에 충만한 사람, 성령에 충만한 사람 중 어떤 사람이 진정한 기쁨을 누리며, 다른 이들에게도 진정한 기쁨을 전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을 하십니까?

  초대교회와 성도들, 그리고 오늘 본문에 나온 빌립은 성령의 충만함으로 ‘그리스도’만이 우리에게 가장 완전한 기쁨을 주시는 분이심을 확신하였습니다. 먼저는 자신의 인생에서 ‘그리스도’를 경험함으로 참 기쁨을 누렸고, ‘그리스도’를 통해 한마음 한뜻이 된 교회 공동체를 경험하였으며, 세상의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큰 기쁨을 누렸습니다. 동네 맛집만 하나 발견해도 이리저리 떠들고 다니게 되는 것이 우리가 가진 속성 아닙니까? 우리의 생각을 뛰어넘은 큰 기쁨을 경험한 빌립은 잠잠할 수가 없었습니다. 어디에서든지, 누구에게든지, 어떤 환경에서든지 ‘그리스도’만 전해진다면 큰 기쁨으로 채워질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사마리아라 할지라도 그곳이 자신에게 허락된 자리라면 그리스도를 전하였으며 자신이 전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기쁨이 전해지고, 기쁨이 회복되며, 기쁨이 세워지는 일을 목격하였습니다.

  저는 오늘 모인 우리 모두에게 먼저는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말미암은 참 기쁨’이 더해질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전보다 사랑하는 마음, 용서하는 마음이 더해지고, 이전보다 더 정의롭게, 또 정직하게 살아갈 수 있는 모습이 더해지며, 작은 일에도 감사할 수 있는 마음이 더해지는 것 이런 것이 우리의 생명을 더욱 빛나게 하는 성장 아닙니까? 저는 우리 모두가 이런 성장으로 인해 기뻐하는 사람들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이러한 것들이야 말로 돈과 힘이 가져다주는 일시적인 기쁨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앞날의 우리 인생을 더욱 건강하게 지켜주는 진정한 기쁨이 되지 않겠습니까? 바라옵기는 저는 함께 모인 우리 모두가 이런 기쁨으로 매일 성장을 이루어가며, 이 기쁨을 위해 한 마음 한뜻으로 연합하는 공동체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또한 군교회야 말로 매일 흩어지는 교회 아닙니까? 전역, 이임, 전출 등 어떤 모습으로 우리가 흩어지던지 우리에게 허락하신 자리에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기쁨의 일을 이어가며 어느 곳에서든지 하나님 나라 기쁨을 전하는 축복의 통로로서 주어진 삶을 잘 감당할 수 있는 믿음의 백성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