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오래전부터 전해져 오는 예화 중에 ‘말굽 예화’가 있습니다. 어떤 대장장이가 여행을 가며 조수를 불러다가 말굽 모형을 주며 똑같은 모양으로 100개를 만들어 놓으라고 하였습니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보니 조수는 명령대로 말굽을 100개를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말굽이 대장장이가 준 모형과는 차이가 있었습니다. 대장장이는 조수에게 어떻게 된 일인지 물었습니다. 조수는 분명 대장장이가 준 말굽의 모형을 따라 잘 만들었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어떻게 만들었는지 시범을 보이라고 하자 조수는 처음에는 대장장이가 준 말굽을 대고 다음 말굽을 만들었지만, 두 번째는 첫 번째 만들었던 말굽을 모형 삼아 만들고, 세 번째는 두 번째 말굽을 모형 삼아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처음에는 큰 차이가 아닌 것처럼 보였지만, 마지막에는 처음과 다른 말굽이 만들어질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어느 때이든지, 어떤 일이든지 가장 중요한 일은 기준을 올바로 세우는 것입니다. ‘진리’라고 하는 것은 인종, 시대, 환경, 조건, 상황과 상관없이 모두에게 적용될 수 있는 원칙이라고 할 수 있는데, 기독교에서의 ‘진리’는 태초에서부터 지금까지 변함없이 이어지고 있는 원칙, 즉, 절대적인 기준을 뜻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 설정해 놓으신 원칙을 인간의 몸으로 친히 보여 주시고, 자신의 인생을 통해 옳고 그름, 선과 악,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의 기준을 세워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으로 오셨다는 것은 그 일을 위해 오셨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계속 살펴보고 있는 초대교회와 성도들은 죄가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게 됨을 깨닫고,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신 부활의 주, 예수의 생명에 동참한 자들입니다. 이들은 성령의 이끄심을 따라 인생의 주인 자리를 다시 하나님께 내어 드린 자들이었으며, 하나님께서 태초부터 예정하신 그리스도의 기준대로 살아가기로 결단한 자들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지난 시간에 이어 우리는 초대교회의 ‘스데반’이라는 특별한 인물에 대해서 이어서 살펴볼 것입니다. 성령의 사람 스데반은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 행하였지만,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실 때 예수님을 곱게 보지 않았던 것처럼 성전과 율법에 진심이었던 자유민들은 스데반을 곱게 보지 않았습니다. 결국 지혜와 성령으로 말하는 스데반을 당해낼 수 없던 자유민들은 사람들을 매수하여 거짓 증인들을 세우고 스데반을 공회로 끌려가게 하였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채찍질을 당하고 목숨의 위협을 받고 풀려난 공회였지만, 스데반은 굴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당당하게 맞이하였고, 겁에 질린 모습이 아닌 천사의 얼굴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제 스데반은 사도행전 4장의 베드로가 그랬던 것처럼 공회원들에게 자신의 생각을 밝힙니다. 목숨까지도 위험할 수 있는 상황에서 던져놓는 스데반의 발언을 살펴보는 가운데 베드로, 스데반, 초대교회의 성도들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완전한 기준이 우리에게도 세워질 수 있기를 소망하는 마음이 더해지고, 그 소망이 지혜로 채워지는 은혜의 시간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먼저 사도행전 7장 1절의 말씀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대제사장이 이르되 이것이 사실이냐?”(행7:1) 사도행전 7장은 당시 대제사장이었던 가야바의 자유민들이 매수한 거짓증인들의 말이 사실인지에 대한 추궁으로 시작됩니다. 이어서 2절부터 53절까지는 스데반의 발언이 이어지는데, 1절은 스데반이 어떤 환경과 조건 속에서 발언을 한 것인지 그 배경에 대한 설명이라 할 수 있습니다. 2절부터 이어지는 스데반의 발언은 이런 교회 공동체나, 어떤 집회에 모인 자들을 대상으로 한 설교가 아닙니다. 그의 목숨을 위협하는 공회, 어떻게 해서든 책잡아서 죽이려고 하는 자들 앞에서 목숨을 걸고 한 발언인 것입니다. 스데반은 구약성경의 내용, 즉, 이스라엘의 역사를 그들에게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스데반이 이야기하는 대상이 누구입니까? 성경에 대해서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하는 대제사장 아닙니까? 스데반이 그들에게 이스라엘의 역사를 이야기하는 이유는 나도 너희들과 같은 것을 알고 있고, 같은 것을 믿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알려면 제대로 알라고 충고를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스데반이 그들에게 한 내용을 다 살펴보기는 어렵고 요점만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는 2절부터 8절까지 이어지는 내용으로 스데반은 아브라함과 족장 시대의 이야기를 합니다. 앞서 스데반을 고발한 자유민들, 그리고 유대교가 집착하고 있는 것이 있었는데 바로 예루살렘이라는 지역과 성전, 그리고 율법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그들이 지켜오고 있던 성전과 제사와 율법 때문에 하나님께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성전을 지키는 것과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동일시하고 있었고, 율법을 소유하고 있는 것과 율법을 지키는 것을 동일시하고 있었습니다. 스데반은 그런 그들의 생각에 그들이 믿음의 조상이라고 믿던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하며 돌을 던졌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과 전혀 상관이 없던 갈대아 우르에서 그들이 믿음의 조상이라고 여기는 아브라함을 하나님이 부르셨습니다. 예루살렘과 성전이 아닌 어느 곳에서든지 하나님은 거하실 수 있는 분이심을 밝히는 것입니다. 또한 족장 시대 때는 그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율법이 전혀 없을 때였습니다. 하지만 족장들은 하나님과 함께 하였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스데반은 족장의 의로움은 율법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믿음에 있었음을 밝히며 유대인들의 문제가 무엇인지를 그들이 믿고 있던 역사를 통해 고발하였습니다.
이어서 9절부터 16절까지의 내용으로 스데반은 요셉과 애굽 시대의 이야기로 이어갑니다. 스데반은 “여러 조상이 요셉을 시기하여 애굽에 팔았더니”(행7:9)라고 하며 조상들의 죄를 구체적으로 언급합니다. 열 명의 형들에게 미움을 받아 애굽에 팔려간 요셉, 하지만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요셉은 애굽의 총리가 되었고 이스라엘 민족은 그렇게 팔려간 요셉을 통해 구원의 은혜를 입게 되었습니다. 인간이 어떤 방법을 동원하든 상관없이 하나님은 신실하심으로 당신의 일을 이루어 가시는 분이심을 밝히는 것과 함께 버림받은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되어 이스라엘을 구원한 것과 같이 너희들은 예수를 버렸지만, 예수를 죽였지만 하나님은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예수로 인해 우리를 구원하실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스데반이 언급한 세 번째 역사는 출애굽입니다. 17절부터 43절까지로 스데반의 발언 중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스데반은 요셉에서 이어진 애굽살이에서부터 광야에 이를 때까지의 역사를 이야기하며 모세와 이스라엘의 모습을 대조합니다. 간략하게 요약하면 모세가 애굽에 있을 때 이스라엘 백성에게 거절을 당해 광야로 나갔지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모세는 자신을 거절한 이스라엘에게 다시 돌아가 그들을 건져내었다는 내용과 함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끊임없이 모세에게 반역을 하였는데 그것은 모세를 향한 반역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반역이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건져내신 사건은 단순히 ‘애굽’이라는 나라, 그리고 ‘바로’라는 왕으로부터의 구원이 아니었습니다. 10가지 재앙을 내린 것에서 알 수 있듯 그들이 섬기고 있던 잘못된 신, 즉, 우상으로부터의 구원이었습니다. 하지만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어떠하였습니까? 우리 7장 39절부터 41절까지 말씀 같이 읽겠습니다. “39 우리 조상들이 모세에게 복종하지 아니하고자 하여 거절하며 그 마음이 도리어 애굽으로 향하여 40 아론더러 이르되 우리를 인도할 신들을 우리를 위하여 만들라 애굽 땅에서 우리를 인도하던 이 모세는 어떻게 되었는지 알지 못하노라 하고 41 그 때에 그들이 송아지를 만들어 그 우상 앞에 제사하며 자기 손으로 만든 것을 기뻐하더니”(행7:39~41)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율법을 받고 내려올 때 엄청난 구원의 은혜를 입고 애굽으로부터 벗어난 이스라엘 백성이었지만, 그들에게는 시내 산에 올라갔던 모세가 가지고 올 율법은 기다림의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를 기다리기보다 자신들을 위해 다른 신을 스스로 만드는 방법을 택했습니다. 42절을 보면 그들을 향해 하나님께서 어떻게 반응하셨는지가 나오는데, "하나님이 외면하사 그들을 그 하늘의 군대 섬기는 일에 버려두셨다"(행7:42)고 하십니다. 그들이 선택한 것이 가져다 주는 처참한 결과를 맛볼 수 있도록 내버려 두셨다는 것입니다. 스데반이 모세 이야기를 한 이유는 분명했습니다. 지금 유대인들이 그때의 이스라엘 백성과 같음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들은 그때의 이스라엘 백성과 같은 자들이다. 이스라엘이 모세를 거절한 것과 같이 너희 또한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거절한 자들이며, 하나님의 율법보다는 스스로가 만든 우상에 길들어져 결국에는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자들이다.’라고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 내용은 44절부터 50절까지의 다윗과 솔로몬 중심의 왕국 시대, ‘성전’과 관련된 내용입니다. 스데반은 44절에서 ‘광야에서의 장막’을 언급하며 ‘하나님의 처소’, ‘솔로몬이 지은 집’에 대한 내용을 이어갑니다. 구약의 역사 속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성막과 성전은 하나님을 향한 순종의 표현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장막을 만들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장막을 이동하였습니다. 또한 다윗이 성전을 짓지 못한 것과 솔로몬의 때에 성전을 지은 것도 하나님이 함께 하셨기 때문임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즉, 성전에서 중요한 것은 전통과 규모가 아니라 그것을 있게 하신 하나님이라는 것을 주장하며 성전 중심에 빠진 유대인들의 사상이 얼마나 위험한 것이고 잘못된 것인지를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글로 읽어서 감흥이 없었을 수도 있지만, 아마도 스데반은 불을 토하는 심정으로 항변을 하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제사장의 질문에 구약의 역사를 펼쳐 항변한 스데반은 제사장들을 향해 이런 결론을 던져 놓습니다. 51절 말씀 같이 읽겠습니다.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도 너희 조상과 같이 항상 성령을 거스르는도다”(행7:51) 스데반은 자신이 올바른 것을 믿는다고 말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았습니다. 스데반은 너희들이야말로 항상 성령을 거스르는 자이며, 지금도 그 악행을 범하는 중이라고 오히려 그들을 고발합니다. 자신의 목숨이 위태로워질 수 있는 그 자리에서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자신을 변호하거나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성령의 사람 스데반은 조건과 상황에 매이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깨닫게 된 진리를 선포하였으며, 예수께서 걸어가신 모습과 같이 자신의 삶을 동일한 모습으로 내어 드렸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설교 서두에 저는 말발굽의 예화를 들었습니다. ‘하나님이 외면하사 그들을 그 하늘의 군대 섬기는 일에 버려두신 결과’(행7:42)를 맞이한 유대인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진리와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었고,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결과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삶은 어떨까요? 절대적인 진리에 대해서는 점점 더 관심을 멀리하고 스스로가 인생의 주인이 되어 각자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는 오늘날 우리의 모습은 정말로 괜찮아지고 있는 것일까요? 각자의 생각은 점점 더 올바른 것으로, 더 나은 나라를 향해, 태초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완전한 기쁨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일까요?
오늘날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많은 것을 알고 있고, 또 어떤 것이라도 쉽게 답을 찾을 수 있는 것 같은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다양한 과정을 통해 지식을 채워가고, 또한 그렇게 알아간 지식은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만들어주는 것 같이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많은 것들을 익혀간 우리는 이상하게도 진리와는 점점 더 멀어지고 있는 것 같은 모습을 보입니다. 어느 때보다 많은 지식을 익혀가지만 사람들은 점점 지혜롭지 못하고, 어느 때보다 풍요로운 모습으로 살아가지만 사람들은 점점 더 인색해지고 있습니다. 하고 싶은 것들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주어질수록 해야 할 일들과는 멀어지고 있으며, 지켜야 할 것들이 분명해질수록 사람들은 교묘하게 피해 갑니다.
스데반 앞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못 박고, 제자들과 성도들에게 동일한 위협을 가하는 유대교 지도자들이 있었다면,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어쩌면 그때보다 더 이기기 힘들고, 또 분별하기도 힘든 강력한 세상의 문화가 우리를 덮고 있습니다. 이런 세상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단계를 거쳐가며 우리의 손에 들려진 말발굽이 아닙니다. 처음에 기준이 된 말발굽, 모든 것의 기준이 된 창조주 하나님의 말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분명하게 드러난 하나님의 기준이어야 합니다. 우리의 삶이 당장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또 우리가 함께 살펴본 스데반과 같은 모습으로 갖춰지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하지만 그럴지라도 우리 삶은 예수 닮기를, 예수의 생명을 가지고 살았던 스데반 닮기를 소망하는 마음은 있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루터보다 100년 전에 종교개혁을 이끌었던 보헤미안 얀 후스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초대교회로 돌아가기를 꿈꾸며 스데반과 같이 가톨릭의 부패와 타락을 비판하였는데 콘스탄츠 공의회에 이단으로 낙인 찍혀 결국에는 화형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그의 동상에는 그가 화형을 당하며 외친 말이 글귀로 남겨져 있는데, 우리 같이 읽어 볼까요? “진실만을 찾아라. 진실만을 들어라. 진실만을 배워라. 진실만을 사랑하라. 진실만을 말하라. 진실만을 지켜라. 죽음을 두려워 말고 진실만을 사수하라.” 바라옵기는 오늘 함께 예배하는 모든 분들이 진리가 희석되어지고 있는 오늘 날의 세상 속에서 진리에 대한 거룩한 사모함과 담대한 믿음을 가지고 거룩한 승리를 선포하는 믿음의 사람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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