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강해

<사도행전 강해13>예수는 그리스도(사도행전 5:12~42)

남편, 아빠...그리고 목사 2026. 7. 4. 16:53

  지난 시간 우리는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의 모습을 살펴보았습니다. 이들은 초대교회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놓은 바나바 흉내를 내며, 바나바에게 허락되었던 존경과 칭찬을 받으려고 했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별 문제가 없어보였지만, 그 마음과 믿음의 중심은 구원이 전혀 실제되지 않았던 모습이었기에 그들의 나눔은 잠깐 초대교회의 재정적인 안정감을 줄 수 있을지는 몰라도, 장기적으로는 초대교회를 무너뜨릴 수 있는 치명적인 문제였던 것입니다.

  몇 해 전,' 코로나'라는 질병이 대한민국을 덮은 적이 있습니다. 당시 대한민국의 방역 수준은 세계 최고라고 할 수 있는 정도였는데, 코로나에 확진 된 사람은 격리를 해야 했고, 확진 된 사람과 접촉한 사람 역시 격리를 해야 했습니다. 확진자가 다녀 간 곳은 일정기간 폐쇄를 해야했고, 해외로 나가는 일 역시 자유롭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분명했습니다. 코로나라는 질병이 심할 경우에는 목숨을 빼앗아 갈 수도 있었기 때문이고, 이 질병의 전염력, 확산력도 어마무시했기 때문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모습은 결코 작은 일이 아니었습니다. 초대교회의 근본을 거스르는 일이었습니다. 이 일을 그대로 둔다면 얼마든지 확산 될 수 있는 일이었고, 그렇게 된다면 얼마 지나지 않아 교회 역시 유대 문화를 따르는 유대 사회 속에서의 한 집단 정도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초대교회의 시작에 사랑과 은혜의 충만함도 있었지만, 성령께서는 그 일을 엄격하게 막으심으로 정결과 거룩의 공동체, 교회로서의 정체성을 이어갈 수 있도록 지키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일 후 교회의 모습에 대해 살펴볼 것입니다. 초대교회의 원죄라고도 할 수 있는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으로 인해 공동체가 위축될 수도 있었지만, 초대교회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교회는 이 문제를 대충 덮고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거룩함과 정결함을 지키기 위해 썩은 것을 도려내었습니다. 문제가 있었지만, 사도들은 교회를 지키는 방법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알고 있었으며, 교회는 더욱 교회다워졌습니다. 사도행전을 살펴보는 가운데 교회가 교회다울 수 있도록 이어져 왔던 이 과정들을 기억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온전한 것들은 더욱 온전하게 지켜나가며, 그렇지 않은 것들은 과감하게 끊어냄으로 인하여 함께 예배하는 우리 모두가 거룩과 정결을 위해 한걸음씩 나아가는 은혜의 시간, 우리 교회 공동체가 거룩한 공동체, 정결한 공동체로 성장해 갈 수 있는 은혜의 시간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먼저 오늘 본문 12~13절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사도들의 손을 통하여 민간에 표적과 기사가 많이 일어나매 믿는 사람이 다 마음을 같이하여 솔로몬 행각에 모이고 그 나머지는 감히 그들과 상종하는 사람이 없으나 백성이 칭송하더라”(행5:12~13) 초대교회 공동체에서 일어났던 기사와 표적이 성전 앞 앉은뱅이에게 이어지더니 이제는 민간으로까지 확장되었습니다. 장소를 가리지 않고, 성령의 충만한 사도들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그러한 일이 나타났다는 것이기도 합니다. 유대인들은 ‘예수’에 대한 이야기를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께서 행하신 일에 대해서 분명 전해 들은 바가 있었을 것이고, 그러한 일들을 자신들의 기준으로 판단하여 십자가에 못 박는 일에까지 동참하였을 것입니다. 그렇게 못 박은 예수의 죽음을 분명 목격했지만, 이상했습니다. 언젠가부터 그 예수가 부활했다는 이야기가 들리더니 사람들이 달라진 이야기, 새로운 공동체가 형성된 이야기도 들려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그러셨던 것처럼 사도들을 만나 고침과 나음을입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들려왔습니다. 분명 예수는 죽었는데, 그들에게 전해지는 이야기, 그들의 눈 앞에 펼쳐진 모습은 마치 죽은 예수가 다시 살아서 돌아온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사도들을 통해 나타내어진 것은 예수였습니다. 표적과 기사를 행하면 행할수록 더욱 분명하게 나타내어진 것은 예수였습니다. 그들은 성령의 충만함으로 예수의 증인이 되었고, 예수를 나타내는 자들이 되었으며, 예수로 하나되었습니다. 사도들은 부활하신 예수의 생명을 가진 작은 예수들이 되었고, 초대교회는 예수의 생명을 가진 이들로 한마음 한뜻이 되어 예수 공동체가 되었습니다.

  여기 앉아있는 우리로 인해 예수님의 모습이 나타내어지고, 우리 교회로 인해 우리가 머물고 있는 부대에 예수의 모습이 전해진다면...생각만해도 너무 멋질 것 같지 않습니까? 하지만 예수께서 유대 사회에 환영을 받지 못하셨던 것처럼 초대교회 역시 모든 사람에게 환영을 받지는 못했습니다. 사도들과 교회는 백성들에게 칭송을 받았지만, 13절에 “그 나머지는 그들과 상종하는 사람이 없으나”라고 표현되어 있는 것처럼 사람들 중 일부는 그들과 함께 하기를 꺼려하는 자들도 있었습니다. 기득권의 눈 밖에 나고 싶지 않아 멀리하던 자들도 있었을 것이고,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두려워하며 경계하던 자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백성들에게 칭송을 받았고, 구원받는 자가 날마다 더해져 갔습니다. 교회로 모인 사람들이 자기 소유를 팔아서 궁핍한 자들을 섬기는 모습을 통해 진짜 이웃 사랑을 보았기 때문이었고, 사도들을 통해 이어지는 표적과 기사, 치유와 회복의 일들을 목격하며 예수의 모습도 보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교회로서의 본분을 지켜갔고, 사도는 사도들의 본분을 지켜갔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잠시 하나의 일을 살펴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교회에 오지 않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큰 문제 중 하나는 교회와 목회자들을 통해 수많은 문제들이 이어져 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 안에서의 갈등, 교회끼리의 분쟁 뿐만 아니라 성경을 가르치는 목회자들의 성적인 문제와 돈 문제도 장난이 아닙니다. 오늘날의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누리게 하는 제일 큰 걸림돌이 교회와 목회자임을 부정하기가 어려울 정도입니다. 교회가 교회다운가? 성도가 성도다운가? 라는 질문에는 늘 물음표만 붙을 뿐 진짜를 찾기가 너무 어려워졌습니다. 하지만 초대교회의 모습을 보십시오. 교회를 반대하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거부하는 이유가 교회나 성도들에게 있지 않았습니다. 교회를 꺼린 사람들은 교회의 문제 때문에, 성도의 문제 때문에 교회를 멀리한 것이 아닙니다. 자신들의 자리, 자신들의 안위를 지키기 위해 그리스도의 복음을 거부한 것이었습니다. 세상이 교회를 반대하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거부하는 이유가 우리에게 있지 않고, 그들 자신에게 있음을 알려줄 수 있는 교회가 진짜 교회이며, 진짜 성도입니다. ‘이 좋은 걸 왜 안 믿어?’ ‘이렇게 좋은데 왜 안 와?’라고 물을 수 있게 해야 합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오겠습니다. 사도들을 통해 선한 일들이 이어졌지만, 대제사장과 사도개인의 당파는 마음에 시기가 가득하였습니다. 우리 17절 말씀 같이 읽겠습니다. “대제사장과 그와 함께 있는 사람 즉 사두개인의 당파가 다 마음에 시기가 가득하여 일어나서”(행5:17) 그들은 얼마 전 성전 앞에서 앉은뱅이를 고친 사건으로 사도들이 붙잡혀 왔을 때 다시는 예수의 이름을 입 밖에 꺼내지도 말라고 경고를 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경고를 무시하고 사도들은 보란 듯이 그 일을 행하고 있었습니다. 사도들의 일은 점점 확장되어져 갔습니다. 성전 앞에서의 일은 민간에게로 이어졌고, 이제는 예루살렘 부근의 수많은 사람들에게까지 그 일이 이어졌습니다. 대제사장과 사두개인의 당파는 자신들의 자리에 위협을 느꼈을 것입니다. 유대인의 지도자라고 할 수 있는 자신들보다 영향력이 커져가는 그들을 보며 위기감을 느꼈을 것이고, 또한 그들이 행한 일이 얼마 전에 자신들이 죽인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어지고 있었기에 불안함을 느꼈을 것입니다. 이들은 평소에 그들이 해왔던 대로, 예수를 죽일 때처럼 힘으로 막으려고 했습니다. 그들은 사도들을 잡아 옥에 가두면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자신들이 가진 힘을 사용하여 억누르고, 협박하고, 결국에는 죽이는 일, 그것이 그들이 할 수 있는 전부였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주의 사자가 밤에 나타나 옥에 갇힌 사도들을 꺼내 주었습니다. 당시 유대 감옥에서 탈출하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감옥의 경비는 허술하지 않았고, 더군다나 쇼생크 탈출처럼 혼자서 탈출하는 것도 아닌 사도들이 함께 나와야 했기에 탈출은 불가능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감옥에서 나와 성전에 들어가서 가르쳤습니다.

  이 일은 마치 예수께서 부활하실 때의 일을 떠오르게 합니다. 예수께서 부활 하실 때, 로마의 병사들이 지키고 있던 무덤의 돌은 옮겨져 있었고, 그 안에 있던 예수의 시체는 사라졌습니다. 부활은 하나님께서 예수가 당신의 아들임을 온 세상에 증명하신 일이라고 할 수 있는데, 지금 이 제자들은 그 일과 같이 또 하나의 부활을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이 일에는 또 하나의 특별함이 있는데, 보통 이렇게 탈출을 하면 멀리 떠나야 되는 것이 정상 아닙니까? 그런데 그들이 체포당하기 가장 좋은 장소로 가라고 말씀하시고, 곧 그들은 붙잡혀 옵니다. 피할 방법이 아니라 마치 가중처벌을 당할 수 있도록 만들어놓은 함정처럼 느껴집니다. 성전 맡은 자는 다시 제자들을 끌고 왔습니다. 그리고 다시 협박을 했습니다. 우리 28절 말씀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이르되 우리가 이 이름으로 사람을 가르치지 말라고 엄금하였으되 너희가 너희 가르침을 예루살렘에 가득하게 하니 이 사람의 피를 우리에게로 돌리고자 함이로다”(행5:28) 대제사장은 그들에게 물었습니다. 간단하게 말해서 예수의 죽음이 잘못되었다고 가르쳐, 사람들이 우리에게 저항하게 만들려는 것 아니냐?는 질문입니다.

  당시 로마제국은 종교의 자유는 보장하지만 반란에 대해서는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반란을 일으키는 자는 십자가에 못 박아 공개 처형을 하였는데, 유대인 지도자들은 예수를 로마제국에 고소하여 십자가에 못박혀 죽게 만들었습니다. 즉, 유대인 지도자들은 제자들이 마치 백성들을 선동하여 반란을 일으킨 것처럼 만들어 예수처럼 십자가 공개처형을 당하도록 유도 심문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 제자들은 더 이상 죽음이 무서워 예수님을 부인하고 달아났던 그때의 제자들이 아니었습니다. 아들 예수를 죽음에서 살리신 것을 보았고, 감옥에 갇힌 그들을 하나님께서 친히 꺼내주심을 경험한 자들이었기에 더 이상 두려울 것이 없었습니다. 사도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29~31까지 천천히 읽겠습니다. “베드로와 사도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살리시고, 이스라엘에게 회개함과 죄 사함을 주시려고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로 삼으셨느니라”(행5:29~31) 쉽게 말해 “너희들은 예수를 죽였지만, 하나님은 그 예수를 살리셨다. 내가 누구를 믿고 누구를 따라야 하겠느냐?”는 대답입니다.

  제자들의 이 말을 들은 종교지도자들은 분노하였습니다. 화가 조금 많이 난 정도가 아니라 화가 머리끝까지 올라 폭발할 지경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때 가말리엘이라는 바리새인 랍비가 개입합니다. 가말리엘은 종교지도자들에게 아주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제안을 합니다. 그들이 만약 사기꾼이라면 죽임을 당하고 모든 이들이 흩어질 것이며, 만에 하나 그들이 정말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라면 우리가 그들을 죽이는 순간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이 되고 말 것이라고 자신의 생각을 말합니다. 가말리엘은 신약성경에 나오는 인물 중 가장 유명한 사도 바울의 스승이며,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장 탁월한 학자 7명에게만 부여하는 ‘라반’이라는 칭호를 최초로 부여받은 자이기도 했습니다. 산헤드린 공회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칠 정도로 당대 최고의 학자였던 그였지만, 사도들을 통해 나타난 일들은 이해하기가 어려웠을 것입니다. 정말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통해 무엇인가를 이루어가시는 것은 아닐지 간과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결국 종교지도자들은 사도들을 놓아주었습니다. 그냥 놓아준 것은 아닙니다. 채찍질 하였습니다. 유대인의 전통대로라면 사십 대에 하나 감한 매, 즉, 서른아홉 대를 때렸을 것입니다. 딱 죽지 않을 정도로 때린 것입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 말라는 경고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일을 당하고 풀려난 사도들의 반응은 놀라웠습니다. 41절 말씀 같이 읽겠습니다.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사도들은 오히려 그 일을 기뻐하였습니다. 말씀이 육신되어 이 땅에 오신 예수께서 그들의 심판으로 채찍질 당하고, 고난 받으시며, 결국에는 죽으신 것처럼 사도들은 사람들에게 칭찬받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채찍질 당하고, 고난 당하는 일로도 그리스도의 증인임이 입증된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종교지도자들의 위협에 굴하지 않았습니다. 어디에 있던지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그치지 않았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감탄고토’라는 말이 있습니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우리에게 좋은 것은 받아들이면서 힘들고, 어렵고, 불리하고, 손해가 될 것 같으면 기피하려고 합니다. 남이 주는 것은 좋지만 내가 내어놓는 것은 싫어하고, 남이 하는 것은 좋지만 내가 하는 것은 싫어하는 것이 솔직한 우리의 모습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제자들의 모습을 보십시오. 이들은 예수의 모습을 선택적으로 수용하지 않았습니다. 표적과 기사, 사람들의 인정을 받는 것만 예수의 증인됨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 일은 그 일대로 감당해 왔으며, 옥에 갇히고, 위협을 받으며, 채찍에 맞는 것까지도 기쁨으로 감당했습니다. 사도들은 예수의 모든 것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가르치시고, 보여주시며, 겪어온 모든 일들을 온전히 누림으로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증명하였습니다. 

  설교를 준비하며 읽은 책에는 이런 글귀가 써 있었습니다. “하나님 안에 있는 우리에게 축복이 따로 있고 축복 아닌 것이 따로 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주께서 우리와 동행하시는 모든 순간이 축복입니다.” 사람들의 인정 안에 있는 것, 옥 안에 갇히는 것보다 사도들에게 더 중요했던 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었습니다. 바라옵기는 오늘 함께 예배하는 저와 여러분이 예수를 그리스도로 여기는 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에 온전히 거하는 무리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소망으로 여기며,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된 모습으로 살아가는 우리를 통해 예수가 그리스도로 전파되는 믿음의 공동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