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강해

<사도행전 강해12>아나니아와 삽비라(사도행전 5:1~11)

남편, 아빠...그리고 목사 2026. 7. 3. 19:56

  사도행전 4장 마지막에는 2장에서 기록되었던 초대교회의 모습이 거의 동일하게 언급됩니다. 믿는 무리가 한 마음, 한 뜻이 되었고,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였으며,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고 하는 이가 없었습니다. 사도들은 큰 권능으로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였고, 무리는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초대교회에는 또 하나의 독특한 특징이 있었는데, 그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밭과 집 있는 자들은 그것을 팔아서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에게 주었고, 사도들은 그것을 각 사람의 필요에 따라 나누었기 때문입니다. 2장과 4장에 비슷한 내용을 반복해서 언급하는 것은 초대교회에서 나타난 이와 같은 모습이 일시적으로 나타나는 특별한 현상이 아니라 ‘초대교회’라고 불리는 당시의 교회 공동체 속에서는 당연하게 또 자연스럽게 나타난 모습이었던 것입니다.

  초대교회의 이와 같은 모습은 얼핏보면 공산주의가 이상적으로 말하는 ‘공평’의 모습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자신이 가진 재물을 공유한 것 말고는 공산주의와 초대교회 사이에 겹치는 점이 없습니다. 사실 초대교회 공동체에서 모든 이들이 재물을 공유한 것도 아닙니다. 당시 유대인들 중에는 부유한 자들이 많지 않았고, 거기다가 회심한 자들의 대부분은 가난한 자들이었습니다. 물질과 권력 등 내려놓아야 할 것들이 많이 있었던 유대인 지도자들이 회심하는 일은 쉽지 않았기에 회심한 자들 중 부유한 자는 거의 없었을 것입니다.

  당시 시대 속에서 밭과 집, 즉, 땅을 가진 자는 전체 인구의 10%도 채 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4장 34절 말씀 같이 읽어볼까요? “그 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행4:34) 많지는 않더라도 회심자들 중에는 부유한 자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 사람은 자신의 소유를 팔아 공동체에서 필요로 하는 자들을 위해 기꺼이 나누었습니다. 무엇을 가짐으로 인해 ‘소유’로 자신을 증명하는 것이 아닌, 가진 것을 나눔으로 인해 나눌 수 있는 존재로서 자신을 증명하는 일이 이어진 것입니다. 초대교회와 공산주의의 가장 큰 차이는 바로 이것입니다. 자신의 소유에 대한 포기가 어떤 시스템에 의해 의무적으로 행한 것이 아니라 사랑에서 비롯된 자발적인 일, 한마음 한뜻이 된 공동체를 위해 기꺼이, 그리고 기쁨으로 행한 일이었던 것입니다. 소유로 감사하며 살아가는 자들이 아닌 함께 하는 이들의 평안과 행복을 감사로 여기는 자들이 된 것입니다. 이런 모습이 나타나는 가장 일차적인 관계는 ‘가족’이라고 할 수 있는데, 초대교회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가족 공동체가 되었던 것입니다.

  사도행전 4장 후반부에는 초대교회의 특징에 이어, 특별한 인물을 소개합니다. 사도행전에서등장하는 아주 중요한 인물 중 하나입니다. 바로 ‘바나바’라는 사람입니다. 요셉이라는 본명을 가지고 있지만, 사도들은 그에게 ‘위로의 아들’이라는 특별한 의미를 담아 ‘바나바’라고 불렀습니다. 밭과 집 있는 자가 자기의 것을 팔아서 공동체를 위해 내어놓은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이 바나바였습니다. 바나바는 자신이 가진 것을 아까워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한마음 한뜻이 된 공동체를 가족으로 여기며 자신의 소유를 기꺼이, 또 기쁨으로 내어놓았습니다.

  초대교회는 이와 같이 성령 충만한 사람들이 모여 한마음 한뜻이 되었고, 아름다운 일들이 이어졌습니다. 이런 일만 이어진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하지만 이것이 초대교회 모습의 전부는 아니었습니다. 초대교회에도 어둠의 일들이 있었습니다. 성령 충만한 곳에 사탄이 얼씬도 못할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어찌보면 오히려 성령 충만한 곳이 사탄이 활동하기에 제일 좋은 장소이기도 합니다. 이런 예는 조금 극단적이지만, 만약 사기꾼이 사기 칠 대상을 물색한다면 순수한 마음을 가진 교회와 온갖 범죄자들이 모인 교도소둘 중 어디를 택하겠습니까? 그와 같이 성령 충만한 곳은 흰옷이 더 쉽게 오염되듯 나쁜 마음이 쉽게 틈탈 수 있는 곳이자, 나쁜 짓을 좀 더 편하게 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오늘 우리는 사도행전 5장에 기록된 아나니아와 삽비라라는 부부에 대한 내용을 살펴 볼 것입니다. 예상하셨겠지만, 이 부부를 통해 초대교회 공동체에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내용은 이렇게 하면 된다라는 식의 긍정적인 내용이었다면, 오늘 내용은 이렇게 하면 안 된다는 부정적인 내용입니다. 바라옵기는 계속해서 사도행전을 통해 초대교회의 모습을 살펴보는 가운데, 함께 예배하는 우리모두가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의 기준을 온전히 세우고, 그 일들을 잘 분별하여 멋지게 살아가는 믿음의 백성, 믿음의 무리, 믿음의 공동체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우리 오늘 본문 1절 2절 말씀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그의 아내 삽비라와 더불어 소유를 팔아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매 그 아내도 알더라 얼마만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행5:1~2) 1절에 기록된 소유는 4장 후반부에 나와 있는 것처럼 밭과 집, 즉, 땅입니다. 얼마나 팔았는지 알수는 없지만, 얼핏보면 5장의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서론에서 언급한 4장의 바나바와 비슷한 행동을 한 것처럼 보입니다. 하나 차이가 있다면 바나바는 소유를 팔아 그 값을 온전히 가져다가 사도들에게 준 것이고,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어 일부만 사도들에게 가져다 주었습니다. 바나바와 비교하면 아주 작은 차이가 있을 뿐이지만, 이 작은 차이가 있게 한 중심에는 결정적인 문제가 있었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초대교회 안에 있던 사람이었고, 그 모습을 곁에서 본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부부는 초대교회의 구성원들처럼 성령의 충만함으로 한마음 한뜻의 가족이 되지는 못했던 것 같습니다. 냉정하게 이야기해서 이들은 바나바와 같은 모습으로 섬기고자 한 것이 아니라 바나바가 받은 존경과 칭찬을 받고 싶었던 것입니다.

  아무튼 이 부부는 은밀한 일을 위해 하나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순수함의 가면을 쓴 사심은 표시가 날 수밖에 없듯 그 일은 곧 베드로에게 발각되었습니다. 우리 3~4절 말씀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3 베드로가 이르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4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마음대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행5:3~4)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가 행한 이 일의 문제는 100만원의 수입이 생기면 십일조로 10만원을 해야 하는데, 9만원만 한 그런 문제가 아닙니다. 이 부부에게 있었던 문제는 일부만 내고 다 낸 것처럼 속인 것입니다. 아나니아는 그가 가지고 있던 신앙의 수준보다 더 의롭고, 더 희생적이고, 더 충성스런 사람처럼 보이고 싶은 욕망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모습은 유대 사회의 모습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즉, 아나니아는 유대 사회에 있었던 철저한 경쟁 속에서 높아지고자 하는 욕망으로 얼룩진 모습을 교회로 가지고 오기 위한 시도를 한 것입니다.

  창세기에서 홍수가 끝난 후 노아가 포도주를 먹고 취한 사건 기억하십니까? 포도주에 취해 벌거벗고 누워있던 노아를 보고 둘째 아들 함이 다른 형제들에게 일러주었는데, 노아가 일어나서 그 사실을 알고 함을 저주했습니다. 사실 노아가 포도주에 취해 벌거벗고 누워있었던 것은 에덴동산으로 돌아간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이 사라졌던 땅에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생명의 원리가 다시 시작되는 것을 경험하였고, 성경에서 기쁨의 상징이라고 하는 포도주를 마시고 취해 에덴동산의 아담과 하와처럼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함은 창조의 기준, 하나님의 관점이 아닌 세상의 기준, 세상의 관점으로 아버지의 모습을 바라본 것이고,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께서 금하신 동산 중앙의 나무의 열매를 먹고 벗은 것을 부끄러워했던 그 일을 홍수 후의 새로운 땅에서 다시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 이후 가나안 땅을 정복할 때 처음 전쟁은 여리고성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성 주변을 빙글빙글 돌기만 하다가 소리만 질렀을 뿐인데, 그 엄청난 성이 무너졌습니다. 이것은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일이었으며, 하나님이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은 특별히 이 전쟁에서 얻게 된 전리품은 온전히 바치라고, 바친 물건에 손대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먼저는 그 일을 행하신 분이 누구인지를 기억하라는 것이고, 다음으로 이제는 더 이상 세상 사람들과 같이 힘과 소유에 의존해서 살아가는 자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가는 구별된 자들임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간이 이 일을 어긴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출애굽한 이스라엘, 하나님의 은혜로 약속의 땅인 가나안 땅에 첫 벌을 내딛은 이스라엘 민족 안에 또다시 하나님의 일을 거스르는 행동을 한 것입니다.

  이 세 이야기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먼저 노아의 포도주 사건에서 함은 노아로부터 저주를 받습니다. 하나님께 바친 물건에 손을 댄 아간은 이스라엘 백성이 던진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 나온 아나니아와 삽비라도 혼이 떠나 죽게 됩니다. 사도행전에서 교회라는 단어가 처음 나오는 부분은 바로 오늘 본문의 11절이거든요. 흔히 교회라고 하면 ‘사랑의 공동체’, ‘용서의 공동체’를 생각하겠지만, 이것 역시 ‘교회’가 가진 특징, 교회의 정체성입니다. 즉, ‘교회’ 공동체는 단순히 모든 것을 품어주는 공동체가 아니라 죄에 대해서만큼은 단호한 태도를 취하는 공동체, 하나님의 냉정한 심판이 이어지는 공동체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점검해야 하는 것은 바로 행함의 동기, 즉, 중심입니다. 찬양을 하고, 기도를 하고, 성경을 읽고, 봉사를 하는 것이 우리의 신앙을 증명하지 않습니다. 선한 일을 많이 했다고 해서 선한 사람이 되었다고 착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왜 하는지입니다. 더 잘하고, 더 많이 하게 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사랑하는 마음으로 행하는 일이 얼마나 되는지가 더 중요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살펴본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초대교회에서 가장 모범적인 모습을 흉내 낸 자들입니다. 하지만 이들은 4장에 나온 바나바와 같이 존경과 칭찬을 받은 것이 아니라 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사랑하는 공동체를 위해 자신의 소유를 기꺼이 또 기쁨으로 내어놓았던 바나바와는 달리 존경과 칭찬 등을 얻기 위해 자신의 소유를 이용했기 때문입니다. 조금 더 확대해서 해석하면 이들은 하나님 안에서 순수함으로 하나 된 공동체를 속여 자신이 원하는 바를 얻으려고 했던 자들입니다.

  인간이 가진 죄의 본질은 ‘자기 중심성’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성령의 충만함으로 시작된 교회를 자신의 만족을 위해 이용하려고 한 것처럼 주어진 모든 것들을 자신의 만족에 끼워 맞춰 생각하려는 마음이 있습니다. 이것은 교회에서뿐만이 아닙니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나라를 사랑하는 것보다 나라 안에서 주어진 법과 제도를 이용하여 자신의 만족을 채우려는 마음이 더 크지 않습니까? 군복무를 이어가면서도 부대를 사랑하고,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보다 이곳에서 주어지는 법과 제도를 이용하여 자신의 만족을 채우려는 마음이 더 크지 않습니까?

  나라, 사회, 교회 등 큰 틀에서 우리를 지켜주는 울타리와 같은 것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것들을 잘 지켜갈수록 우리는 더 건강한 삶을 살아갈 수 있지만, 이 안에서 살아가는 무리들 중에서는 그것을 사랑함으로 지키는 자들이 있는가 하면 자신의 만족을 위해 그것을 이용하여 무너뜨리는 자들도 있습니다. 바라옵기는 오늘 함께 예배하는 모든 분들이 무너뜨리는 자가 아닌 지키는 자가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알려주신 삶의 방식을 따라 한마음 한뜻이 되어 사랑해야 할 것들을 더욱, 또 온전히 사랑하며, 지켜야 할 것들을 지켜가는 믿음의 백성, 믿음의 공동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