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강해

<사도행전 강해11>기도의 공동체(사도행전 4:23~31)

남편, 아빠...그리고 목사 2026. 7. 3. 19:31

  미문이라고 불리는 성전 앞에는 앉은뱅이가 있었습니다. 다른 것은 기대할 수 없었기에 그 입으로 은과 금만 구하고, 그것만 있으면 이 세상을 잘 살 수 있다고 여기던 자였습니다. 그런데 이 자가 변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금과 은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전해주었고, 그 앉은뱅이는 일어나 걷게 되었습니다. 은과 금만을 구하던 사람이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찬미하는 인생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앉은뱅이를 일으킨 사건은 단순히 치유와 기적에 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 이야기의 본질이자 핵심은 구원입니다. 즉, 단순히 앉아 있던 자를 일으켰다는 것이 아니라, 금과 은만을 가치있게 여기던 인생이 무엇으로, 어떻게 하나님을 찬미하는 인생으로 변화될 수 있었는가를 알리는 것이 이 이야기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앉은뱅이는 40년 동안 다른 이의 도움을 받아 겨우 성전 앞으로 나와 구걸해왔지만 그 무엇도 그의 인생이 달라질 수 있도록 돕지는 못했습니다. 성전에 나오며 돈 몇 푼 던져주는 사람들은 그에게 도움을 준다고 생각을 했겠지만, 실상은 더욱 금과 은을 의지하도록 만들어 앉은뱅이인 채로의 삶이 이어지도록 돕는 것일 뿐이었습니다.

  우리의 인생 속에서 죄가 가져다주는 것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돈과 권력 명예와 같이 세상에서 가치 있게 여기는 것들은 우리를 마치 행복의 길로 인도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을 쫓아가면 갈수록 더욱더 그것을 의지하게 되어 결국에는 그것 때문에 무너지는 일이 부지기수 아닙니까? 돈, 권력, 명예와 같은 것들을 쫓으며 사랑을 잃어버리고, 정의를 잃어버리고, 결국에는 자신의 정체성과 존재 의식 마저도 잃어버리게 된다면 과연 그것을 올바른 삶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이와 같이 유대인들이 지금껏 추구해 오던 것들은 이런 인생에게 아무 것도 해 줄 수 없는, 오히려 구원의 손을 내미는 자를 더욱 깊은 곳으로 밀어 넣어버리는 일이었을 뿐입니다. 사랑을 이야기하면서 인색했고, 정직을 이야기하면서 위선과 외식으로 그들의 삶을 채웠으며, 정의를 이야기하면서 부정과 교만, 탐욕으로 가득찬 모습을 당연한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을 잃어버린 그들은 생명을 생명답게 누리지 못했고, 오히려 핏기 없는 껍데기만을 전달하여 사망의 일을 양성하는 집단이 되었습니다.

  사도행전의 기록 속에서 초대교회 이후 처음 등장하는 이 사건, 앉은뱅이를 일으킨 사건은 그러한 시대 속에서 구원이 무엇인지에 대해 알려주는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유대인들 사이에서 이어져왔던 문화와 전통, 그들이 따르고 있던 종교까지 그 실체가 무엇인지 낱낱이 고발함과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무엇인지에 대해 강하게 선포하며 우리가 바라보고 믿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알려주는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라옵기는 계속해서 사도행전의 말씀을 살펴보는 가운데 어쩌면 유대인과 동일한 문화, 동일한 전통을 만들어가는 오늘날의 시대 속에서 믿는 자 된 우리가 무엇을 믿고, 무엇을 따르며, 무엇을 향해 나아가야 되는지에 대한 지혜가 더해 질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거룩하고 온전한 길로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는 은혜의 시간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지난 시간 우리는 성전 앞 앉은뱅이를 일으킨 사건으로 인해 공회에 잡혀간 베드로와 요한의 모습을 살펴보았습니다. 성전을 지키는 자, 사두개파, 제사장들 등 당시 사회의 기득권자들은 다 모인 자리였지만, 베드로와 요한은 그들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이 제자들을 두려워하는 기이한 현상이 이어졌습니다. 사탄은 돈, 권력, 명예라는 우리 안에 우리를 집어넣어 그 안에서 벌벌 떨기를 바랬지만, 제자들은 더 이상 그 안에서 살아가는 자들이 아니었습니다. 제자들은 더이상 세상이 만들어놓은 형벌, 세상이 제공하는 보상, 세상이 제공하는 자유와 보상안에 머물러 살아가는 자들이 아니었습니다. 몸은 이 세상 속에서 살고 있었지만 그들은 성령의 충만함으로 하나님 나라를 살아가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제자들은 누구라도 벌벌 떨 수밖에 없던 상황 속에서도 그들이 보고, 듣고, 믿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당당하게 선포했고, 그들에게서 아무런 죄를 찾을 수 없던 공회, 처벌할 방법을 찾지 못한 공회는 결국 그들을 풀어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풀려난 사도들은 동료, 즉, 그들을 위해 기도하던 공동체, 교회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공회에서 있었던 일들을 알렸습니다. '제사장들과 장로들의 말을 다 알리니'(행4:23) 아마도 18절에 기록된 것처럼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지지 말라'(행4:18)고 한 경고를 전달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단순히 경고가 있었기 때문에 조심하자는 내용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런 경고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선포할 수밖에 없었던 자신들의 이야기, 즉, 승리의 간증을 그들에게 전했을 것입니다. 

  앞으로 계속해서 살펴보겠지만, 사도행전이 진행되는 동안 고난과 핍박에 대한 일은 계속 이어집니다. 지금 살펴보고 있는 4장에서는 경고로 끝났지만 7장에서는 스데반 집사가 돌에 맞아 죽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8장에서는 회심하기 전 바울을 중심으로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가 큰 박해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12장에서는 요한의 형제이자, 제자들 중 핵심 인물 중 하나인 야고보가 죽임을 당하는 내용이 이어집니다. 날이 갈수록 박해의 정도는 점점 거세질 것입니다. 사도들은 물론 그들과 함께하는 교회 공동체도 그 일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 앞에서 너무도 당당했던 사도들로 인해 너무 당황하여 어떻게 할 수도 없이 말로만으로 경고하고 풀어주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잘못을 인정하며 좋게 보내준 것은 아닙니다. 지금은 어쩔 수 없이 보내지만 다음에 걸리면 보자는 식으로 이를 갈며 보낸 것입니다. 분명 더 큰 시련이 그들에게 이어질 거라고 예측했을 것입니다. 얼마든지 주눅들고, 위축 될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성도들의 태도, 교회는 달랐습니다. 24절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그들이 듣고 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소리를 높여 이르되 대주재여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은이시오”(행4:24) 이들은 ‘대주제여!’라고 하며 한 마음으로 기도를 합니다. ‘대주재’는 원래 절대적인 주종관계, 지배와 복종의 관계 속에서 주인을 칭할 때 사용되는 말인데, 조금 전 사도들은 공회에 끌려가 세상의 대주재라고 할 수 있는 권력자들 앞에 있다가 왔습니다.

  하지만 사도들은 그들 앞에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성령충만한 사도들에게 이 세상의 권력자들은 더이상 대주재가 될 수 없었습니다. 그들보다 훨씬 더 높은 권위, 온 천지를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절대적인 통치자 되신 하나님만이 그들에게 진짜 대주재임을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이 절대적인 주인임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뜻에 전적으로 굴복하기로 작정하는 것, 이것이 바로 기도의 핵심입니다. 이들은 이어서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선포와 다윗을 통해 하신 시편 2편의 말씀을 언급합니다. 간단하게 정리하면 모든 것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당신의 말씀대로 모든 일을 이루어가고 계심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잠시, 여러분은 ‘구원’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우리가 사도행전 3장을 통해 또 계속 살펴보고 있는 성도들의 모습을 통해 알 수 있듯, 구원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셨을 때 품으셨던 그 뜻대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창세기에서 노아가 홍수를 경험하고 난 다음, 창조 때 하셨던 약속들이 노아에게 그대로 이어지지 않습니까? 이와 같이 창조주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을 경험함으로 인해 하나님을 경외하는 상태가 되는 것이 구원인 것입니다. 지금 사도들과 함께하는 초대교회 공동체는 하나님을 창조주로 여기는 믿음과 함께 구약 성경에서 언급한 말씀대로 모든 것을 이루어가시는 하나님을 대주재로 여기는 믿음 안에서 한 마음으로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이어서 이렇게 기도합니다. 29절 30절 말씀 같이 읽겠습니다. “29 주여 이제도 그들의 위협함을 굽어보시옵고 또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시오며 30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시옵고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하더라”(행4:29~30) 그들이 하나님께 구하는 것은 29절의 ‘담대함’과 30절의 ‘기사와 표적’ 크게 두 가지입니다. 위협과 핍박은 계속 이어지겠지만, 어떤 일들 속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 있는 담대함을 주시고, 자신들이 전하는 말씀이 진리임을 증명할 수 있도록 앉은뱅이를 일으킨 것과 같이 예수의 이름으로 나타나는 징표를 보여달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도의 기도이며, 오늘날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이어져야 할 기도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 잘 믿으면 복 받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어서 받는 복은 세상에서 주는 유익과 같은 것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교회의 모습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 예수를 잘 믿는다고 해서 남들보다 편안하고, 남들보다 부유하고, 남들보다 높은 자리에 올라가지 않습니다. 오히려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로 그전에는 당할 필요가 없었던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사도행전 4장에서의 사도들과 같이 ‘믿을래 안 믿을래’라고 하며 겁박하는 상황이 우리에게 일어나지는 않겠지만, 예수 그리스도처럼 사랑하는 일, 예수 그리스도처럼 정의롭게 사는 일은 자기 희생과 자기 손해를 감수해야 하는 일이기에 분명 어려움 속에 자신의 인생을 던지는 일이며, 불편함 속에 자신의 인생을 던지는 일입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상쇄시킬만큼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자에게 허락되는 복은 특별합니다. 사도들의 모습에서 알 수 있듯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자는 결코 비굴하지 않고 비겁하지 않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지는 잠깐의 유익에 굴하지 않고, 위협이 눈앞에 다가온다 할지라도 당당하게 마주하는 담대함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또한 한평생 앉은뱅이로 살아가던 자를 일으켜 새로운 인생을 맞이하게 한 것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살아가는 자는 생명을 전하는 삶, 누군가를 살리는 삶이 됩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정의는 그 어디에서도 당당하게 진리를 외치며 살아갈 수 있는 자유함을 얻게 되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사랑은 치유와 회복의 능력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이와 같이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복은 우리를 살리는 능력으로, 모두를 살리는 능력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바라옵기는 오늘 함께 예배하는 우리 모두가 기록된 말씀에서 나타난 모습과 같이 기도하는 교회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우리의 안위, 우리의 평강을 위해서가 아닌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이 전해질 수 있기를 구하는 교회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무엇보다 우리 안에서 그 일이 잘 진전될 수 있도록 우리 교회가 한 마음으로 서로를 보살펴 줄 수 있는 공동체, 한 마음으로 서로를 의지할 수 있는 공동체, 한 마음으로 서로를 위해 기도할 수 있는 공동체가 될 수 있기를 소망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