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문이라고 불리는 성전 앞, 태어나서부터 구걸하던 앉은뱅이가 있었습니다. 다른 것은 기대할 수도 없이 매일 누군가가 던져주는 돈 몇 푼이 인생에 전부인 자였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이 자가 베드로와 요한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동안의 다른 사람들처럼 그들 역시 돈을 줄 것이라고 기대했지만 그들은 달랐습니다. 베드로는 돈이 아닌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전해주었고, 잠깐 있다가 사라질 일시적인 도움이 아닌 그의 손을 잡아 일으키며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는 가장 본질적인 도움을 주었습니다. 이제 이 앉은뱅이에게는 새로운 날이 시작되었습니다. 태어나서 스스로의 힘으로 처음 일어섰고, 처음 걸었으며, 처음 뛰었습니다. 또한 그의 생전 소원이라고 할 수 있는 성전에 들어가 기쁨으로 하나님을 찬송하는 인생이 되었습니다.
40년 만에 처음 일어서서, 걷고, 뛰었던 당사자도 놀라웠겠지만, 40년 동안 앉아 있던 사람이 일어서서, 걷고, 뛰는 모습을 목격한 사람들도 놀라워했습니다. 기쁨과 놀라움 속에서 사람들의 시선은 곧 베드로와 요한을 향했습니다. 이 상황은 3장 11절에 표현되어 있습니다. "나은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을 붙잡으니 모든 백성이 크게 놀라며 달려 나아가 솔로몬의 행각이라 불리우는 행각에 모이거늘"(행3:11) 다시 말해 베드로와 요한을 성전의 스타로 삼아 그를 보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솔로몬의 행각에 모여들었다는 것입니다. 이 일은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에도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기적을 행하실 때마다 사람들은 몰려들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 일을 즐거워하지 않으셨습니다. 나는 아버지의 뜻을 행하러 왔다. 아버지의 일을 위해서 왔다. 이 일은 아버지의 영광을 위해서이다. 라고 하시며 자리를 피하셨고 그 자리를 떠나 기도하러 가셨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예수님과 동일한 모습을 이어갑니다. 우리 3장 12절 말씀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백성에게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놀랍게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행3:12) 말씀이 육신되어 이 땅에 오셨다는 요한복음의 말씀과 같이 예수를 통해 나타난 것은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성령 충만한 제자들을 통해 나타나고 있는 가장 본질적인 일은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이루어가시는가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자신들을 주목할 것이 아니라 너희들이 죽인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주목하라며 자신들에게 열광하는 사람들을 향해 설교를 하였습니다. 그 설교로 인해 베드로와 요한은 붙잡히게 되고 갇히게 됩니다. 그리고 공회 앞에서 또 한 번의 설교를 이어갑니다. 자신들에게 열광하는 사람, 그리고 자신을 붙잡아 가둔 사람, 상황은 전혀 다르지만 베드로가 한 설교의 내용은 차이가 없습니다.
오늘 이 두 가지 내용을 병행하며 전혀 다르게 주어진 상황 속에서 베드로가 어떻게 반응하였는지를 살펴볼 것입니다. 바라옵기는 이 내용을 살펴보는 가운데 증인의 삶에 대해 생각해 보며 더 온전한 그리스도인으로, 더 거룩한 증인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는 은혜의 시간 될 수 있기를 소망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사도행전 2장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자들이 난 곳 방언, 각 언어로 하나님의 큰일을 말함을 보고 놀라워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어떤 이들은 새 술에 취했다고 하며 조롱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제자들이 성전 앞에서 구걸하던 앉은뱅이를 일으키고, 하나님 나라의 일을 전할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4장 1~3절 말씀 다시 한번 같이 읽겠습니다. “1 사도들이 백성에게 말할 때에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와 사두개인들이 이르러 2 예수 안에 죽은 자의 부활이 있다고 백성을 가르치고 전함을 싫어하여 3 그들을 잡으매 날이 이미 저물었으므로 이튿날까지 가두었으나”(행4:1~3)
여기에 보면 사두개인이라는 종파가 나옵니다. 사두개인은 레위 지파 출신의 제사장들을 포함한 부유하고 지위가 높은 사람이었는데, 초자연적인 것을 부인하는 종교 합리주의자들이었으며, 현세주의적인 경향을 가지고 있던 자들이었습니다. 또한 그들은 유대인이었지만, 로마와의 협력을 통해 그들의 세력과 권력, 현상 유지를 강조하던 자들이었습니다. 일단 사두개인들에게는 ‘부활’에 대한 부인이 자리잡혀 있었는데, 베드로와 요한은 그들이 얼마 전에 공개 처형을 한,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예수가 부활했다고 가르쳤기 때문에 심기가 불편해진 것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제사장, 성전 맡은 자, 사두개인은 성전의 리더십이라고 할 수 있는 자들이었는데, 베드로와 요한의 일로 인해 자리에 위협을 받게 되었기에 어떻게 해서든 이들을 가로막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우리 다음 절, 4절 말씀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말씀을 들은 사람 중에 믿는 자가 많으니 남자의 수가 약 오천이나 되었더라”(행4:4) 베드로와 요한은 옥에 갇혔지만, 말씀은 갇히지 않았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갇혔지만 살아서 역사하시는 성령께서는 유대인들의 마음에 말씀의 불을 지펴 수많은 사람들을 믿게 하셨습니다. 사도행전의 시작에 120여명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베드로의 설교를 통해 삼천 명이 예수를 믿겠다고 따른지 얼마되지 않았는데, 또다시 남자의 수만 5천이나 될 정도로 많은 유대인들이 예수를 믿겠다고 나섰습니다.
한때 기독교 신앙 속에서 유행하던 것 중 ‘고지론’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높은 자리나 중심 되는 자리로 가면 더 큰 영향력을 펼칠 수 있기 때문에 기독교인들이 그 자리를 차지해야 한다는 주장이었습니다. 하지만 성경의 가르침은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복음을 전하다가 높은 자리에 올라갈 수도 있고, 그래서 더 많은 영향력을 행사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높은 자리에 올라가서, 세상에서 성공해서 더 영향력 있게 복음을 전하겠다는 생각은 순서가 잘못된 것입니다. 만약 ‘고지론’의 주장대로라면 예수님은 머리 둘 곳 없는 나그네의 인생을 사시거나 십자가에 못 박히는 최후를 맞이해서는 안 됩니다. 높은 자리에 가는 것, 중심되는 자리에 가는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예수께서는 그저 자신에게 맡겨진 일에 집중하시고 순종하셨을 뿐이었습니다.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은 높은 자리, 중심되는 자리에 가기 위해 노력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성령 충만함을 받기 이전에는 높은 자리, 중심되는 자리, 세상에서의 성공을 꿈꾸던 자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그들은 달라졌습니다. 바로 앞 3장에서 사람들이 그들에게 열광을 했지만 베드로는 정색하며 왜 우리를 주목하냐며 호통을 칩니다. 그리고 지금 살펴보고 있는 4장에서는 사람들의 열광과는 완전히 반대 상황에 처했습니다. 붙잡히고 감옥에 갇혔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없었습니다. 어떤 상황에 있든지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일에 집중했고, 또 순종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 증인의 삶은 이와 같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결과에 연연하지 않고,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 앞에서 온전히 반응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도달하고자 하는 목표를 이루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이용하는 자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매일을 살아가는 가운데, 어떤 결과를 맞이하든지 허락하시는 일들을 겸손하고 담대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바로 증인의 모습입니다.
이튿날이 되었습니다. 관리들, 장로들, 서기관들이 모였고, 대제사장들과 대제사장의 문중, 즉, 대제사장의 혈연집단이 다 참여한 가운데 재판이 열렸습니다. 이 사안을 얼마나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들은 사도들을 가운데 세우고 물었습니다. “너희가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행4:7) 조금 더 정확하게 풀어보면 ‘너희는 누구에게 속한 자들이냐, 또한 너희 같은 놈들이 어떤 종류의 능력으로 이 일을 행할 수 있었던 것이냐?’라고 묻는 질문입니다. 그들은 제자들의 입에서 앞에서 설교했던 것처럼 ‘예수’라는 이름을 이야기하도록 유도 심문을 한 것입니다. 예수가 살아 있을 때와 같이 자신들의 자리에 위협을 받고 있었기에 공개 처형을 한 예수와 같이 그들 또한 그렇게 처형을 하려고 했을 것이고, 아니면 조금 양보해서 예수의 죽음을 떠올리게 하여 두려움으로 다시는 그 이름을 입 밖에 내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의 모습은 그들의 기대와 달랐습니다. 우리 8절부터 10절까지 말씀 같이 읽겠습니다. “8 이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이르되 백성의 관리들과 장로들아 9 만일 병자에게 행한 착한 일에 대하여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받았느냐고 오늘 우리에게 질문한다면 10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행4:8~10) 사도행전의 저자는 이때 베드로의 모습에 대해 이렇게 언급합니다. “이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이르되” 성령의 충만함은 계속 말씀드리듯이 방언과 예언 등 초자연적인 모습이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 충만함은 하나님의 일에 대한 확신을 가진 상태라고 할 수 있는데, 어떤 환경에서도 굴하지 않는 담대한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이 중요한 특징입니다.
베드로는 그들을 심판하기 위해 그 자리에 모인 자들을 향해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은 알라고 하며 답을 합니다. 분명 재판을 받는 자리이지만, 베드로는 당당하게, 또 담대하게 답을 했습니다. ‘너희들은 예수를 죄인으로 생각하여 죽였지만, 하나님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셨다. 평생을 앉은뱅이로 지내던 이 사람이 그 이름으로 인해 건강하게 된 이 일이야말로 착한 일 아니냐?’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평생을 앉은뱅이로 지내던 자가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서서 새로운 인생을 맞이하게 되었는데 이것은 착한 일이 아니냐?고 하는 것입니다.
짧은 답이었지만 상황이 역전되었습니다. 공회에 모인 이들은 착한 일을 한 예수를 죄인 삼아 죽인 자들이 되었고, 예수의 이름으로 착한 일을 한 제자들을 잡아 가둔 자들이 되었습니다. 지금껏 유대인들이 자기 정체성을 세우는 근거로 간직했던 기준들에 혼란을 느끼는 일이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두려워 벌벌 떨 수밖에 없는 공회 앞에서 대충 에둘러 말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보고 듣고 경험한 일에 대한 증인이 되어 확실한 돌직구를 날린 것입니다. 이 대답에 대한 결론이 12절에 이어지는데 너무도 잘 알고 있는 말씀이죠? 같이 읽겠습니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행4:12)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우리는 앉은뱅이를 일어서지 못하게 하고, 멀쩡한 사람도 앉은뱅이로 만들던 자들 아니냐?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말고는 앉은뱅이와 같은 우리를 일으켜 세울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동안의 사람들이 추구하던 돈, 명예, 권력 등 세상에서 성공의 기준으로 여기던 것들, 그들 스스로가 의롭게 여기던 일들까지 아무것도 그들을 구원하지 못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예정하신 모습,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린 자들에게 주어지는 결과는 에덴동산에서 쫓겨나는 일이었던 것처럼 사랑다운 사랑이 사라진 세상, 정의다운 정의가 사라진 세상 속에서, 아니 그것을 무시하는 세상 속에서 주어지는 돈, 명예, 권력은 오히려 그들을 망하게 할 뿐이었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것과 같이 기쁨과 평안을 잃어버린 사람들, 앉은뱅이와 같이 구걸하는 인생을 전부로 여기던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예수를 보내주셨습니다. 말씀이 육신되어 이 땅에 오신 예수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여주셨고,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진짜 사랑이 무엇인지, 진짜 정의가 무엇인지를 보여주시며, 사람다운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이웃을 죽이고, 사회를 죽이는 사망의 삶에서, 이웃을 살리고, 사회를 살리는 생명의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이처럼 구원은 단순히 내가 죽어서 천국 가는 것만이 아닙니다. 생명다운 생명으로 살리는 삶을 살아가며 함께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가는 것이야말로 참된 구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제 이 일 이후에 공회를 위해 모인 자들은 베드로와 요한의 입을 막으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성령 충만한 베드로와 요한의 입을 막는 일은 불가능했습니다. 우리 마지막으로 19~20절 말씀 같이 읽겠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 믿는 자의 기개를 드러낸 속시원하고 멋진 장면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베드로와 요한은 예수를 통해 하나님 나라에 대한 것을 들었으며, 예수를 통해 하나님 나라를 보았습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통해 이 땅에서의 하나님 나라라고 할 수 있는 교회를 경험하기도 했습니다. 이제 이들이 주저할 이유는 없었습니다. 그들에게 주어진 복음은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었습니다. 그 무엇보다 분명한 것이었고, 그 무엇보다 확신을 가지게 된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보고 들은 것이 어떤 결과를 낳게 되는지를 직접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 조건과 상황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보고, 듣고, 경험한 복음을 따라 살아가기로 결심했고, 모든 상황 속에서 믿는 대로, 확신한 대로, 옳다고 생각한 대로 행동했습니다. 그 대가가 보상일 수도 있고, 처벌일 수도 있었지만 결과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더 이상 사람들 앞에서, 세상 앞에서 살아가는 자들이 아니었습니다. 오직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사는 자들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당당하게 마주하는 삶,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며 사람다운 사람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삶이 바로 증인의 삶입니다. 바라옵기는 오늘 함께 예배하는 저와 여러분이 이런 증인이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크고 거창한 어떤 일을 이루어가려는 노력보다 가장 먼저는 하나님 앞에서 세상 앞에서 부끄럽지 않은 모습으로 살아가는 삶, 어떤 조건과 상황 속에서도 해야 할 일을 하고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하지 않는 삶으로 허락하신 세상을 당당하게 마주하여, 멋지게 승리하는 거룩한 증인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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