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강해

<사도행전 강해9>우리를 보라(사도행전 3:1~10)

남편, 아빠...그리고 목사 2026. 7. 3. 10:03

  십계명의 첫 번째, 두 번째 계명은 우상숭배와 관련된 내용입니다. 출애굽기 20장에 그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데, 20장 3절부터 5절 상반절까지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출20:3~5上)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이 세상을 당신의 계획과 목적대로 지으신 창조주’로 신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에 반해 다른 신들, 우상은 출애굽기 20장 4절에 기록된 것처럼 우리 스스로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것들인데, 사도바울은 우상숭배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골로새서 3장 5절입니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골3:5) 우상숭배는 자신의 욕심이 원하는 필요를 따라 신을 만들고 그것을 숭배하는 행위라고 할 수 있는데, 정리하면 우상숭배는 자기 욕심을 숭배하는 행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약성경에는 자신을 섬기는 대한 직접적인 가르침, 재물과 소유, 가난한 자들을 돌아보라는 가르침이 천국과 지옥, 성적, 폭력적인 문제보다 훨씬 많이 나오는데, 한 자료에 의하면 재물과 소유, 가난한 자들을 섬기는 일에 대한 가르침이 마태, 마가복음서에서는 열 절에 한 번꼴로, 누가복음에는 일곱 절에 한 번꼴, 그리고 야고보서에서는 다섯 절에 한 번꼴로 나온다고 합니다. 그만큼 재물과 소유의 문제가 신앙에서 중요한 문제라는 것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언젠가도 말씀드렸듯이 오늘날 적지 않은 사람들이 자신의 종교가 무교라고 하지만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의 평안과 안위를 위해 돈, 명예, 권력 등 무엇인가를 의지하고 있고, 그것이 이끄는 대로 살아갑니다. 즉, 공식적인 종교가 없을 뿐 사람들은 저마다의 신을 만들어, 저마다의 종교를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 것인데,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 두 부류로 나누면 하나님을 섬기는 자와 자신을 섬기는 자로 나눌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없는 사람, 자신을 섬기는 자의 삶의 방식은 ‘소유 지향’입니다. 더 많은 것을 가져서 더 많은 힘을 확보하여 자신이 가진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고, 자신이 원하는 평안과 안위를 얻으려고 애를 씁니다. 반대로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사람의 삶의 방식은 ‘존재 지향’입니다. 얼마나 많이 소유하느냐보다 어떤 사람이 되느냐를 더 중요하게 여기는 자들입니다. 무엇인가를 가지는 것보다 가진 것을 잘 사용하는 일에 더 큰 목적을 두고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사람들의 특징입니다.

  지난 시간 우리가 함께 살펴본 초대교회의 시작에는 자신을 섬기던 자에서 하나님과 함께하기로 결단한 자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자신을 섬기던 우상숭배가 결국에는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게 되었음을 인정하게 된 자이며, 말씀이 육신되어 오신 예수로 인해 그들에게 나타난 그리스도의 가치, 하나님 형상의 가치가 얼마나 존귀한 것인지 깨닫게 된 자들이었습니다. 이제 사도행전 3장부터는 이들이 만들어가는 교회와 세상이 어떤 모습인지를 살펴볼 것입니다. 바라옵기는 이 내용을 살펴보는 동안 우리를 살리고, 세상을 살리는 것이 무엇인지 답을 얻을 수 있기를 소망하고, 저와 여러분, 우리 투호갈렙교회가 성경을 통해 얻게 된 그 답을 통해 더 온전한 모습으로 하나 되어 멋진 인생, 멋진 교회, 멋진 부대, 멋진 세상 만들어갈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먼저 오늘 본문 1절 말씀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제 구 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새”(행3:1) 당시 유대인들은 제 삼시, 제 육시, 제 구시 하루 세 번의 기도를 하였는데, 지금 우리 시간으로 따지면 오전 9시, 12시, 오후 3시입니다. 즉, 해가 떠서 하루를 시작 할 때, 정오가 되어 해가 가장 높이 떠 있을 때, 해가 저물어가며 하루를 마무리 할 때를 구분하여 기도를 한 것입니다. 이 중 제 삼시와 제 구시에는 제사장들이 번제를 드렸는데, 특별히 제 구시에는 기도하기 위해 하루 중 가장 많은 사람들이 성전을 찾는 시간이었다고 합니다. 이제 이런 상황 속에서 베드로와 요한에 이어 한 명의 특별한 인물이 등장합니다. 2절입니다.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자라”(행3:2) 이 사람은 나면서 못 걷게 된 사람이었고, 사람들이 메고 다녀야만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에게 구걸해야만 먹고 살 수 있는 사람이었고,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나오던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기도하기 위해 성전에 올라가던 사람, 즉, 유대인들의 대부분은 이 사람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마태복음 6장에서 언급되고 있는 것처럼 유대인들이 중요하게 생각했던 경건의 척도는 크게 세 가지가 있는데, ‘구제’, ‘기도’, ‘금식’이었습니다. 나면서 못 걷게 된 사람이 날마다 성전 문 앞에 앉아서 기도하러 올라가는 사람들에게 종교적 양심에 호소하며 구제를 요청합니다. 사람들이 그냥 지나칠 수 있었을까요? 자의로 도와주는 사람도 있었을 것이며, 남들에게 선한 사람으로 보여지기 위해 돕는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아무튼 미문이라는 성전 문은 그 사람에게 최고의 직장이었을 것입니다. 

  어쩌면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기에 이 일은 서로가 할 수 있는 최선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한 걸음 떨어져서 보면 그가 장애인인채로 하루하루의 삶을 연명하도록 도와주는 것일 뿐, 그의 영혼을 위해서는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이 앉은뱅이는 함께 성전으로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함께 예배하거나, 기도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저 몇 푼의 돈만 던져주면 되는 불쌍한 사람일 뿐 그 이상은 결코 되지 못했습니다. 미문 앞에 앉아 있던 사람 역시 날마다 성전 앞에 나가기는 했지만, 성전 안에 들어가는 일은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성전 안에 들어가는 것보다 성전 앞에 앉아서 누군가가 주는 돈이 더 좋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에게 베드로와 요한 두 사람이 다가옵니다. 3~4절 보겠습니다. “3 그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가려 함을 보고 구걸하거늘 4 베드로가 요한과 더불어 주목하여 이르되 우리를 보라 하니”(행3:3~4) 그동안의 사람들은 불교적인 표현으로 구제의 공덕 같은 것을 쌓기 위해 몇 푼의 돈을 던져 주었지만, 베드로와 요한은 달랐습니다. ‘우리를 보라’고 하며 그에게 말을 걸어주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돈 몇푼을 던져주며 그저 지나쳐 갔던 그 사람을 한 존재로서 바라보며 인격적인 관계를 시작한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의 ‘우리를 보라’는 말을 듣고 앉은뱅이는 특별한 일이 이어지지 않을까 기대했을 것입니다. 5절입니다. “그가 그들에게서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행3:5) 이 앉은뱅이는 베드로와 요한의 주머니가 열려 큰돈이 떨어지기를 기대했겠지만, 열린 것은 주머니가 아니라 베드로의 입이였습니다. 우리 6절 말씀 같이 한 목소리로 읽겠습니다.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행3:6) 당신이 원하는 은과 금은 나에게 없습니다. 하지만 나에게는 당신에게 줄 수 있는 더 놀라운 것이 있습니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십시오!

  이 앉은뱅이에게 진짜 필요한 것이 무엇이었을까요? 다시는 성전 미문에 나오지 않아도 될만큼의 돈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아니 그것을 기대하고 있었다 하더라도, 그 기대는 최선이 아니라 차선책입니다. 일어나서 걸어다니며 다른 멀쩡한 사람들과 같이 살아가고 싶은 마음이 가장 깊은 곳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어려운 일이었기에 그저 굶어 죽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돈 몇 푼 쥐어지는 것을 인생의 전부로 여기고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성령의 충만함으로 그를 만난 베드로는 그의 필요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의 근본적인 문제에 대한 해결책, 진정한 인간다움과 행복의 길인 예수 그리스도를 전해주고 싶었습니다.

  앉은뱅이는 아니었더라도 어떻게 보면 베드로는 그와 같은 인생을 살아가던 자였습니다. 진정한 인간다움과 행복의 길에는 관심조차도 가지지 못한 채, 돈만 있다면, 사람들에게 인정 받는 높은 자리에만 올라간다면 된다고 생각하던 자였습니다. 하지만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베드로는 달라졌습니다. 세상에 은과 금보다 더 값지고 가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사람다운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고, 아름다운 삶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베드로의 중심에는 ‘예수’께서 허락하신 그리스도의 생명이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앉은뱅이의 오른손을 잡아 일으켰습니다. 그러자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뛰어 서서 걷게 되었습니다. 차선의 문제가 해결된 것이 아니라 가장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이 된 것입니다. 생전 처음으로 서게 되었고, 생전 처음으로 걸어보았으며, 생전 처음으로 뛰었습니다. 항상 성전 문 앞에 앉아 사람들을 올려다보며 구걸하던 자였지만, 이제 서서 그들과 눈높이를 같이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늘 다른 사람에게 의존해서 겨우 성전 앞에 나올 수 있던 자였지만, 이제 자신의 힘으로 움직일 수 있게 되었으며, 어느 곳이든 갈 수 있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이전의 인생과는 비교할 수 없는 새로운 인생을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8절입니다.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니”(행3:8) 이 앉은뱅이는 누구와 함께하지 못하던 인생이었습니다. 성전 앞까지 누군가가 메어주기도 하고, 그에게 돈을 던져주기도 했지만 함께 하는 일에는 늘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이 앉은 뱅이는 그들과 함께 하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또한 유대인들은 정결을 중요하게 생각했기에 장애를 가진 자가 성전에 들어가는 것은 상상도 못하는 일이었습니다. 날마다 성전 문에 앉아 있으면서 성전 안에 얼마나 들어가보고 싶었겠습니까? 유대인들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일이 되어 형식적인 습관으로만 이어지던 일이었지만, 이 앉은뱅이에게는 인생에서 가장 간절히 바라고 원하던 일이었습니다. 말씀을 보십시오.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니” 기뻐하는 이 사람의 모습이 그려지지 않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본문에 나온 앉은뱅이는 날 때부터 보이지 않는 혼자서는 도저히 빠져 나올 수 없는 억압과 배제, 소외와 빈곤, 장애라는 육체의 감옥에 갇힌 채 살고 있던 자였습니다. 감옥 밖으로 나가는 것은 꿈도 꾸지 못하고, 그 안에 머물러 지내며 누군가가 베풀어 주는 호의와 동정을 전부로 여기며, 매일 성전 문 앞에서 자신에게 주어지는 몇 푼의 돈에 만족하며 지내고 있던 자였습니다. 매일 아침 하루를 시작하며 이 앉은뱅이가 기대하는 것이 무엇이었을까요? ‘오늘은 얼마의 돈을 얻을 수 있을까?’가 전부가 아니었을까요? 그런데 이 모습은 단순히 이 앉은뱅이에게만 있었던 모습이 아닙니다. 우리의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고 하나님의 형상,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맞이하게 될 하나님 나라는 꿈꾸지 못한 채 이 세상이 만들어 놓은 경쟁의 구도 속에서 어떻게 하면 이길까? 어떻게 하면 더 얻을까? 어떻게 하면 더 높이 올라갈까? 등 세상이라는 감옥에 갇혀 그 안에서의 꿈만 꾸며 겨우 살아가는 것이 솔직한 우리의 모습이지 않습니까?

  오늘 본문에 나온 베드로와 요한도 원래는 그런 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과 동행하면서도 다른 유대인들과 같이 잘못된 메시아관을 가지고 이 세상에서의 성공만을 꿈꾸는 삶을 이어왔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가진 잘못된 생각이 얼마나 비참한 결과를 낳게 되는지를 목격하였고, 그와 함께 부활하신 예수를 만남으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에 대해 분명히 알게 되었습니다. 세상이라는 감옥을 벗어던지고 하나님 나라를 살게 된 베드로와 요한 모양은 다르지만 같은 문제를 안고 살아가던 성전 문 앞에 있던 앉은뱅이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를 보라”

  이와 같이 복음은 우리에게 주어진 눈에 보이는 문제보다, 보이지는 않지만 우리의 삶에 더욱 큰 영향을 미치는 문제로부터 자유함을 얻게 해주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이 우리에게 주는 치유이자, 회복인 것입니다. 바라옵기는 오늘 함께 예배하는 모든 분들이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 이와 같은 복음의 은혜를 충만하게 누릴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우리를 옭아매고자 하는 세상 속에서 앉은뱅이처럼 살아가던 우리였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 나라를 꿈꾸며 일어나 걷고 뛰는 삶이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또한 그와 함께 세상을 향해 ‘우리를 보라’고 외치며 치유와 회복을 선포하는 믿음의 증인, 복음의 증인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