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강해

<사도행전 강해6>성령을 통해 나타나는 증거(행2:14~36)

남편, 아빠...그리고 목사 2026. 7. 3. 08:10

  책, 드라마, 영화 등 모든 이야기에는 서론이 정말로 중요합니다. 배경에 대한 지식이 없다면 흘러가는 이야기에 대한 이해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강해를 한 지 두 달이 다 되어가는데 아직 2장을 넘어가지 못했습니다. 사도행전의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서 서론이 중요하기도 하고, 1장과 2장에 정말로 중요한 내용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조금 답답하고 힘들더라도 이 시간들로 인해 앞으로의 내용을 더 온전히 이해할 수 있도록 기본 바탕이 잘 만들어질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기독교 신앙의 목표는 '사람의 변화', 조금 더 정확하게는 '사람다운 사람으로서의 회복'입니다. 즉,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보시기 좋았더라고 하신 그 상태로, 그리스도 안에서 예정하신 모습대로, 하나님 형상으로 회복이 바로 기독교 신앙의 궁극적인 목표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 쉽게 안 변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사람이 변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어떤 사건으로 인해 잠깐 변화된 것처럼 보이다가도 관성의 법칙을 따르는 것처럼 곧 우리가 가진 고집대로의 모습으로 돌아오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사람이 변한다는 것은 자신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사도바울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갈2:20)라고 하며, 로마서 6장 11절에서는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롬6:11)라고 합니다.

  어린아이 손에 들려있는 물건을 빼앗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면 되는지 아십니까? 그냥 빼앗으면 울고불고 난리납니다. 그 아이가 지금 손에 쥐고 있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을 보여주면 됩니다. 그럼 자연스럽게 손에 있는 것을 놓고, 새로운 것을 쥡니다. 우리의 인생 속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 과정들을 통해 견고하게 세워진 세계를 무너뜨리는 것은 '무너져라 얍!'과 같은 주문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 더 큰 가치를 발견할 때 비로소 우리의 믿음이 움직이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장에서 살펴 본 제자들의 모습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유대 사회를 살아가는 동안 그들에게는 인생에 대해서도, 메시아에 대해서도 유대 사회의 가치를 동일하게 붙들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들의 모든 것은 달라졌습니다. 더 이상 그들은 유대 사회의 가치를 따라 움직이는 자들이 아닌 하나님 나라를 향해 살아가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즉, 유대 사회에 대해서는 죽은 자요,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산 자가 된 것입니다. 2000년 전 유대 사회 속에서 120여명의 성도들을 움직인 성령님은 오늘 우리에게도 그 변화로 초대하고 계십니다. 바라옵기는 초대교회의 시작에 있었던 믿음의 선배들의 일들을 함께 살펴보는 가운데 오늘 함께 예배하는 저와 여러분, 우리에게도 그 일에 대한 도전과 그 일을 경험하는 기적의 일들이 충만하게 일어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오늘 본문은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베드로의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그곳에 모인 사람들 앞에 나와 설교를 하였습니다. 예수님과 만난 베드로, 하나님 나라에 대한 베드로, 성령님이 함께하시는 베드로는 이제 예수께서 돌아가신 후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도망치던 자가 아니었습니다. 베드로는 이제 목숨을 걸고 세상에 맞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하나님 나라를 외치던 자가 되었습니다. 거기 모인 사람들 중에는 그들을 보고 '새 술에 취하였다'고 조롱하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120여명의 성도들은 결코 술에 취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2장의 앞부분에 기록된 것처럼 그들은 급하고 강한 바람과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는 것을 경험하였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행한 것이었습니다.

  예루살렘의 다락방에서 먼저 모인 그들에게 성령의 충만함은 더 이상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었으며, 대충 경험한 일도 아니었습니다. 그들에게 허락된 구체적이며 실제적인 경험이었습니다. 그곳에 모여 있던 120여명의 성도들은 성령 충만함의 증인이 된 것입니다. 베드로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 일에 대해 확실하게 증언할 수 있는 증인이 된 것입니다. 베드로는 그 사람들에게 우리는 취한 것이 아니라 선지자 요엘을 통하여 말씀하신 예언이 성취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베드로가 인용한 요엘서 말씀을 살펴보면 먼저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주리니”라는 내용이 나옵니다. 먼저 그곳에 모여있던 120여명의 성도들은 각각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습니다. 저마다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그들은 각각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 일이 먼저 모인 자신들 뿐만 아니라 그곳에 모인 모든 사람들, 남녀 구분 없이, 나이 구분 없이, 계층 구분 없이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모든 사람들에게 임할 수 가능성을 보게 된 것입니다.

  성령 충만함을 입은 자들에게 허락되는 일이 무엇입니까? 예언, 꿈, 환상입니다. 이것은 신비적인 은사, 신비적인 체험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을 통해 허락되는 예언과 꿈 그리고 환상은 성령의 도우심을 따라 복음을 통해 현세를 통찰하고, 미래를 조감하며, 세상의 원리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새로운 미래를 향해 나아가게 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성령에 충만한 사람은 결코 돈이나 권력 등 세상의 가치를 따라 만들어지는 미래를 꿈꾸며 그 일에 자신을 팔지 않습니다. 나만 잘되는 환상 속에 살아가지도 않습니다. 성령의 충만한 사람들은 본질적으로 사람다운 사람이 되어, 사람다운 사람들이 살아가는 나라를 꿈꿉니다. 창조주를 인정하며 창조주의 목적과 질서를 따르는 나라, 사람이 사람을 귀하게 여기는 나라, 서로 사랑하고 용납하는 나라, 서로의 필요를 위해 나누고 베푸는 나라, 함께 하는 이들을 기다려주는 나라, 희생과 섬김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며 서로를 향한 그 일이 연결고리가 되어 하나가 되는 나라를 꿈꿉니다. 이와 같이 철저하게 성령의 충만함을 따라 예언을 하고, 꿈을 꾸며, 환상을 보는 자가 바로 그리스도인인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 일의 증인이 되어 요엘서에 기록된 그 말씀을 증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어서 성령 강림 사건의 의미를 하나 더 설명합니다. 19절부터 21절까지입니다. “19 또 내가 위로 하늘에서는 기사를 아래로 땅에서는 징조를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로다 20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변하여 어두워지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되리라 21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행2:19~21) 여기에 언급되고 있는 해가 변하여 어두워지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되는 현상은 이스라엘의 멸망을 말할 때 예언자들이 쓰는 표현입니다. 이와 같은 모습이 실제로 등장한 일이 있었는데, 바로 약 50일 전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입니다. 누가복음 23장 44절입니다. “때가 제육시쯤 되어 해가 빛을 잃고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구시까지 계속하며”(눅23:44) 여기에 나온 제 육시는 정오입니다. 즉, 가장 밝아야 할 때 해가 빛을 잃고 온 땅에 어둠이 임하였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땅이 가장 밝을 때가 언제일까요? 쉽게 말해서 사랑과 정의가 충만할 때입니다. 알아서 법을 잘 지키고, 서로가 서로를 지켜주는 그런 모습으로 충만하다면 그 자체로 빛이 나지 않겠습니까? 즉, 예수를 통해 전해진 하나님의 뜻이 우리 모두의 삶을 덮고 있을 때입니다. 반대로 가장 어두울 때는 그 빛이 사라질 때입니다. 자신 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사람들이 가득할 때, 배려와 섬김은 찾아보기 힘들고 서로를 신뢰할 수 없을 때, 요행, 편법, 불법으로 가득할 때가 바로 어두울 때 아니겠습니까? 즉, 예수를 통해 전해진 하나님의 뜻이 우리의 삶 속에서 사라질 때입니다. 시대의 멸망, 나라의 멸망은 바로 그럴 때 주어지는 것이죠. 베드로는 바로 이 일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으로 충만해져서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이 이르기 전에 사람들은 계속해서 하나님의 말씀,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는 어둠의 삶으로 살아가겠지만 그런 세상 속에서도 남녀노소, 주인과 종 차별 없이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른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른다면 예언과 꿈 그리고 환상을 통해 구원을 얻게 될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베드로는 22절부터 ‘주’가 누구인지에 대한 설명을 이어갑니다. 먼저 22절에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 땅에 허락하신 일에 대해 설명을 하고, 23절에는 예수의 죽음에 대해 설명을 합니다. 그런데 23절을 잠깐 보면 예수를 죽인 자들에 대해 무엇이라고 합니까?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려 못 박아 죽였다”고 합니다. 유대인들은 법으로 심판하여 예수를 죽였습니다. 그들은 그들이 옳다고 생각하는 최선의 일을 행한 것입니다.

  24절부터 32절까지 베드로는 시편 말씀을 인용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데, 우리 이 내용의 결론인 32절 말씀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의 증인이로다”(행2:32) 인생을 살아가는 일이 쉽지 않은 것은 정답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유대 사회 속에서 제자들의 대부분은 실패자, 루저 취급을 당하며 살아갔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후 뭔가 변화될 수 있을 것 같은 기대가 있었지만, 그 기대 역시 유대 사회가 만들어놓은 성공의 가치관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습니다. 높은 곳에 있는 사람들, 유명한 사람들, 많은 것을 가진 사람들, 다수의 사람들은 자신들이 가진 것을 내세워 예수를 죽였습니다. 그들이 살아가는 시대가 그러했으며, 그들이 살아가는 문화가 그러했습니다. 그들이 살아가는 나라는 예수를 죽이며 살아가는 나라, 예수를 죽여야 살아갈 수 있는 나라였습니다. 하지만 이제 제자들은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누구의 손을 들어주셨는지를 똑똑히 보게 되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이야기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그들의 인생에 정답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된 것이며 그 일의 증인이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령 충만한 사람은 입에 할렐루야, 아멘, 주여 주여를 달고 다니는 사람이 아닙니다. 방언으로 기도하는 사람도 아니며, 치유의 손이라고 하며 병을 고치는 사람도 아닙니다. 물론 그런 일들이 나타날 수도 있지만, 그것이 성령 충만의 본질은 아닙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은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발견한 사람입니다. 그 가치를 구하기 위해 하나님을 알아가는 자이며, 그 가치를 이루기 위해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들이 바로 성령 충만한 사람입니다. 세상의 가치를 따르는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따르는 자를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당장에 얻게 될 돈 몇 푼 때문에 양심을 팔아넘기는 자들이 펼쳐질 미래를 준비하며 양심을 지켜가는 사람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성령께서는 현실에 매몰되어 살아가는 오늘날의 세상 속에서 예언과 꿈, 환상을 통해 미래를 보게 하시고, 영원을 보게 하십니다.

  바라옵기는 오늘 함께 예배하는 모든 자들이 초대교회의 시작에 있었던 120여명의 성도들과 같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기 원합니다. 세상에서 이야기하는 것들을 정답이라고 생각하며 끌려다니는 인생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허락하신 모든 것을 정답으로 믿어 세상을 거슬러가는 사람들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우리가 부활하신 예수를 온전히 따를 때, 하나님은 우리를 사람다운 사람으로 회복시킬 것이며, 캄캄한 밤에도 별을 볼 줄 아는 사람, 캄캄한 밤에 별과 같이 빛나는 삶이 되게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