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TV에서 하는 프로그램 중에 '이혼숙려캠프'라는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이혼을 생각하는 부부가 합숙하며 이혼 숙려 기간과 조정 과정을 가상으로 체험해보며, 이혼에 대해서 좀 더 객관적이고 현실적으로 고민해볼 수 있는 프로그램인데, 보면 볼수록 실제로 저런 부부가 있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엄청난 사연들을 가진 부부들이 나옵니다. 저도 처음 볼 땐 너무 충격이었는데, 학교에 수업을 가니까 교무실에 앉아계신 선생님들이 다들 그 프로그램 이야기를 하시더라구요. 이 프로그램에서는 남편입장에서, 아내입장에서 촬영된 영상을 보여주는데, 남편입장에서 아내의 모습을 보여 줄 때는 '와 저 사람 왜 저래?' 그러다가 조금 지나 아내 입장에서 남편의 모습을 보여주면 '와 진짜 저런 사람과 같이 산다고?'라고 생각할 정도로 엄청난 사연들이 이어집니다. 그런데 이 부부들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치명적인 문제가 하나 있는데, 바로 대화의 방식입니다.
물론 이혼까지 생각할 정도로 쌓여 있는게 많아서이기도 하겠지만, 이 프로그램에 나오는 부부들의 대화를 보면 딱 두 단어로 설명할 수 있는데 비난과 평가입니다. 사실 저희 부부도 최근에야 조금 덜 싸우지만, 과거에는 엄청 싸웠습니다. 서로 다른 환경에서 살아온 남자와 여자가 만나 결혼을 해서 살아가는데 부딪히는 것은 당연한 것 같더라구요. 그런데 저희 부부의 싸움도 큰 일 때문에 발생하지는 않습니다. 정말 사소한 일을 가지고 말 한 마디 잘못해서 상대방의 기분을 건드리게 되고, 말로써 서로의 기분을 건드리며 폭발하게 되더라구요. 그런데 이런 일은 단순히 부부의 사이에서 뿐만이 아니라 오늘날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공통적인 문제이기도 합니다. 가게에서 진상짓을 하는 일들, 운전하는 사람들 간의 트러블, 직장에서, 친구들 사이에서 발생되는 관계 문제 등 대부분은 대화의 방법으로 인해 발생되는 문제들이지 않습니까? 그래서인지 성경에는 말에 대한 말씀이 생각보다 많이 있고, 전 세계에 말과 관련된 속담들, 말에 대한 명언도 굉장히 많이 있는 것 같더라구요. 말이라는 것이 결코 가볍게 여겨서는 안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오순절 예루살렘에 나타난 바람과 불에 이어 그곳에 모인 120여명의 성도들에게 나타난 방언에 대한 내용을 함께 나누어보겠습니다. 바라옵기는 오늘 이 말씀을 살펴보는 가운데, 성령의 충만함으로 제자들에게 나타난 말의 변화가 오늘날 나에게도, 우리에게도 나타나 성도다운 성도, 교회다운 교회로서 더 온전한 모습으로 자라날 수 있는 은혜의 시간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4절 말씀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행2:4) 한국교회에서는 이 말씀에 도전을 받아 ‘방언기도’를 성령 충만함의 증표 또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특별한 은사처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수련회, 부흥회, 기도원 같은 곳을 가면 방언의 은사를 얻기 위해 열정적으로 기도하던 때도 있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사도신경이나 주기도문을 빨리하면 방언처럼 된다고 야매로 가르쳐주는 곳도 있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웃긴 일이지만, 그 당시에는 그렇게라도 방언의 은사를 받기 위해 노력한 사람들이 엄청 많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도행전 2장에 기록된 방언은 그런 종류의 은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시는 동안 예수님과 제자들이 무엇을 하는지에 대해 다른 사람들은 알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한 제자들조차도 무엇을 하는지 몰랐으니 당연한 일이었겠죠. 그런데 이제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 말씀으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정리가 되었고,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며 기도 했습니다. 때가 되자 그들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 말은 누구도 알아듣지 못하는 말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누구라도 자신의 언어로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이었습니다.
5절부터 8절까지 그 상황에 대해 묘사하고 있는데, 같이 읽어볼까요? “5 그때에 경건한 유대인들이 천하 각국으로부터 와서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더니 6 이 소리가 나매 큰 무리가 모여 각각 자기의 방언으로 제자들이 말하는 것을 듣고 소동하여 7 다 놀라 신기하게 여겨 이르되 보라 이 말하는 사람들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8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이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찌 됨이냐”(행2:5~8) 이어지는 9절부터 11절까지는 오순절에 예루살렘에 모인 사람들이 어디 출신들인지 상세하게 기록하며 여러 지역의 명칭들을 언급하고 있는데, 분명 모인 사람들은 갈릴리 사람들이지만, 천하 각국에서 모인 사람들이 다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듣게 된 말이 무엇입니까? 우리 11절 하반절 말씀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우리가 다 우리의 각 언어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하고”(행 2:11下)
제가 대학교 때 GBT라는 선교단체에서 교육을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세계 성경 번역 선교회라는 곳인데, “모든 민족이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번역된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의 온전한 사람으로 변화되도록 돕는다”라는 비전을 품고 있는 선교회입니다. 이곳에서는 그들의 언어로 성경을 번역하는 사역을 하기에 성경이 없는 지역에 선교사를 파송 하는데, 파송되어 간 곳에서 처음 몇 년간은 함께 어울리는 일만 합니다. 시장과 동네, 지역 구석구석을 찾아다니며 그들의 문화를 몸으로 익히는 일을 먼저 하고,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표현들로 성경을 번역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역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 언어는 단순히 말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문화와 사상을 담고 있는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상대방을 존중한다면 상대방의 언어로 이야기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요즘 젊은 세대들 사이에서는 신조어들을 많이 사용하는데, 이들의 문화를 이해하기 위해 신조어를 알아가는 것도 어떻게 보면 같은 맥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가 홍천에서 수업을 다니잖아요. 수업을 하던 중 옆의 친구 장점을 이야기해보라고 하니까 “얘는 돼지런해요”그러더라구요. 집사님 “돼지런하다”는 말 들어보셨습니까? 저는 잘 몰라서 아이들한테 물어봤거든요. 돼지랑 부지런하다의 합성어로 “먹을 때만 부지런하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구요. “당모치, 갑통알은 무슨 말인지 아십니까?” 저도 찾아봤는데, ‘갑자기 통장을 보니 알바해야겠다.’의 줄인말이라고 하더라구요. 무슨 말을 그렇게 줄이는지, 줄여서 사용하는 말을 들으면 국어를 사랑하는 사람으로 걱정이 되기도 하지만, 신기하기도 하고, 재미있기도 하더라구요. 아무튼 이렇게 그들의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대화를 하기 위해 신조어를 익히는 것처럼, 사도행전 2장에서 나오는 120여명의 성도들은 자신만이 또 자기들끼리만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이 아닌 상대방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을 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이제 이들은 더 이상 자신만을 위해 살아가는 자들이 아닌 상대방의 세계속으로 들어간 자들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하나님 나라를 가장 확실하게 증명할 수 있는 방법은 상대방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나타내는 것입니다. 어린아이에게는 어린 아이의 언어로, 초신자들에게는 초신자의 언어로 하나님 나라를 전달해야 합니다. 거기에 모인 120여명의 성도들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한 것은 개인의 이기심, 집단의 이기심을 뛰어넘어 철저하게 이타적인 존재가 된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충만함으로 채워졌던 서로를 향한 배려와 섬김, 사랑과 헌신이 하나님의 큰일로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교회가 해야 할 일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세상이 전혀 알아듣지 못하는 우리들만의 언어로, 우리들만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하나님 나라를 알 수 있도록 그들의 언어로 하나님 나라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사랑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는 사랑의 언어로, 정의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는 정의의 언어로, 차별, 배제, 혐오로 힘들어하는 자들에게는 이해와 수용의 언어로, 하나님 나라를 이야기하며 그들과 하나 되어야 합니다.
사람들이 자신의 언어로 하나님의 큰 일을 듣게 되는 것은 또 다른 의미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이것은 바벨탑의 저주를 전복시키는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바벨탑 사건’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불신한 사람들이 자기 이름을 내기 위해 한 군데 모여 하늘까지 탑을 쌓았던 사건입니다. 다시 홍수로 심판하더라도 이제는 그냥 당하지 않겠다는 죄인 된 인간의 굳은 의지가 담겨 있던 모습이기도 하죠. 하나님은 결국 그 사람들을 향해 언어를 혼잡하게 하셨고, 소통 불가의 집단이 되게 하여 흩어지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제 오순절 예루살렘에는 바벨탑 사건과는 반대로 각각 자기의 언어를 가지고 있던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모였고, 성령께서는 그들이 다 알아들을 수 있도록 그들이 난 곳의 방언으로 하나님이 하신 큰일을 듣게 하셨습니다. 바벨에서는 사람들이 하늘로 올라가려고 했었지만, 오순절 예루살렘에는 하나님께서 땅으로 성령을 보내주셨습니다. 바벨에서는 언어를 혼잡하게 하셔서 사람들이 놀랐지만, 오순절 예루살렘에서는 자기 나라 말로 듣게 되어 놀랐습니다. 바벨에서는 다양한 언어를 통해 사람들을 흩었지만, 오순절 예루살렘에서 하나님께서는 다양한 언어를 가진 사람들을 모아 한 백성이 되게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인간이 해결하지 못하였고, 또 해결하지 못하는 일 중 하나는 ‘연합’입니다. 역사 속에서 사람들은 ‘연합’을 이루기 위해 무력과 권력으로 억눌러도 보고, 돈으로 회유를 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온전한 연합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처음에는 잠시 하나되는 것 같다가 조금 지나면 갈등이 생기고, 결국에는 배신과 분쟁으로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그런데 이제 하나님께서 오순절 예루살렘에서 그 일을 보여주고 계신 것입니다. 아무리 뛰어난 지혜와 능력으로도 불가능해 보였던 그 일을 하나님께서는 갈릴리에 있던 촌놈들, 세상의 기준으로는 한참 모자란 것 같은 사람들을 통해 이루어가고 계신 것입니다.
50일 전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았던 정치, 종교의 권력자들은 자기 자리를 지키고 있었고, 기세등등하게 살고 있었습니다. 세상과 환경, 조건과 상황은 변한 것이 없었지만, 오순절 예루살렘에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은 120여명의 성도들은 다른 사람이 되었습니다. 여전히 연약하고, 여전히 부족한 사람들이었지만, 그들은 세상을 거슬러 가기 시작했습니다. 정치, 종교 지도자들에게 맞선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런 자들이 생각하던 방법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기 시작했습니다. 이기려고 하는 자들 속에서 섬기는 자들이 되었고, 가지려고 하는 자들 속에서 나누려고 하는 자들이 되었으며, 높아지려고 하는 자들 속에서 낮아지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단 두 명의 부부도, 소수의 인원이 모인 무리도, 많은 사람들이 모인 무리도 온전한 연합을 이루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따라가야 합니다. 철저한 희생, 은혜와 사랑의 원리를 따라야 합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고 한 사도바울의 가르침을 기억해야 합니다.
교회는 복음 안에서 하나되는, 하나님 나라의 꿈으로 하나되는 연합의 공동체입니다. 사랑과 정의로, 섬김과 낮아짐으로 하나 된 연합의 공동체입니다. 우리 안에서의 연합과 함께 세상에서 연합을 이루어가는 공동체가 바로 교회입니다. 바라옵기는 오늘 함께 예배하는 모든 분들이 비난과 평가로 이어지던 분열의 자리에서 내려와 성령의 충만함으로 말미암은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바벨탑의 원리를 거슬러 온전한 연합을 이루어 가는 믿음의 사람, 믿음의 공동체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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