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강해

<사도행전 강해2>성령이 임하시면(사도행전 1:6~11)

남편, 아빠...그리고 목사 2026. 7. 2. 18:56

 사도행전의 시작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경험한 후, 성령의 인도하심을 통해 제자들이 무엇을 믿게 되었는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실 제자들도 예수님과 함께 있는 동안에는 여느 사람들과 큰 차이가 없었습니다. 세속적인 가치관에 이끌려 무엇인가 하나라도 얻으려고 하는 마음은 제자들에게도 계속 따라다니던 것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경험한 후 그들은 새로운 꿈을 꾸게 되었고, 삶의 방향이 달라졌습니다. 

  에덴동산에서의 처음 사람에게 하나님은 모든 것을 다 누릴 수 있는 권한을 허락해 주셨지만, 그들은 유일하게 가지지 못한 한 가지, 하나님의 자리를 넘보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처럼 되고자 하나님께서 금하신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 열매를 먹었습니다. 그 열매를 먹으면 선과 악을 분별할 지혜가 생겨 하나님처럼 될 것이라 생각했지만, 결과는 전혀 그렇지 못했습니다. 자신의 만족과 자신의 유익만을 기준으로 선과 악을 구분하는 것과 함께 스스로가 인생의 주인이라는 착각에 빠진 삶이 시작되었을 뿐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의 죄를 ‘원죄’라고 하는 이유는 바로 인간이 가지고 있는 가장 근본적인 문제가 바로 이 일에서 나타난 이기적인 자기 중심성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죄가 어떻게 발전하고 확장될 수 있는가에 대한 내용은 구약성경에 너무도 잘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인간의 죄가 결국 어떤 사회를 만들어가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실 당시의 모습, 즉, 복음서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권력을 확보하기 무엇이든 가지기 위해 발버둥 치는 사람들의 모습, 무엇인가를 조금이라도 가지게 된다면 그것을 특권 삼아 경계를 지어가는 사람들의 모습은 단순히 복음서와 신약성경에만 기록된 모습이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도 동일하게 이어지는 모습입니다. 누가 만들어 놓은 것인지도 모르는 그 기준 속에서 가스라이팅을 하기도 하고, 당하기도 하며, 가지기 위해, 남들보다 뒤처지지 않기 위해 경쟁하며 삶을 이어갑니다. 이러한 모습은 수천 년 전에도, 수백 년 전에도, 수십 년 전에도 똑같이 이어지고 있는, 인류의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반복되고 있는 모습이기도 합니다.

  사도행전은 이런 세상, 이기적인 자기 중심성이 너무나도 당연해진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고, 하나님 나라를 꿈꾸는 자들이 어떤 역사를 써 내려가게 되었는지에 대한 기록, 다시 말해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진 세상 속에서 하나님께로 회심한 자들이 어떤 역사를 남기게 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성경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지난 시간에 이어 사도들의 회심에 대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함께 예배하는 우리 모두 이 말씀을 살펴보는 가운데, 사도들과 같이 회심을 경험하고, 하나님 나라를 향해 한 걸음이라도 나아갈 수 있는 은혜가 있기를 소망합니다.

  먼저 1장 6절 말씀 같이 읽어 볼텐데, 이 말씀은 표준새번역 버전으로 읽어보겠습니다. “사도들이 한 자리에 모였을 때에 예수께 여쭈었다. 주님 주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나라를 되찾아 주실 때가 바로 지금입니까?”(행1:6, 표준새번역) 여기 ‘여쭙다’라는 표현을 원어를 직역하면, ‘또 여쭈었다.’라는 표현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반복해서 여쭈었다는 것입니다. 질문을 하는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6절에 나온 제자들의 질문 속에 있는 마음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이 꿈꾸던 하나님 나라는 로마로부터의 독립을 너머 로마를 지배할만한 대국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의 기대도 별반 다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과 함께하는 동안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그런 하나님 나라를 이루게 된다면 자신들이 예수님의 오른팔, 왼팔, 즉, 권력의 자리에 앉게 될 것이라는 환상을 품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는 모습을 보고 그 꿈은 산산조각 났었지만,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다시 그들 앞에 나타나신 모습을 보고는 이전보다 더 강한 기대가 생겨난 것입니다. 여전히 세속적인 가치관에 얽매여 있는, 이전과 조금도 달라지지 못한 제자들의 상태가 이 질문을 통해 드러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그들에게 예수께서는 이렇게 답을 이어가십니다. 7~8절 말씀 같이 읽겠습니다. “7 이르시되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요 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1:7~8) 예수께서는 하나님 나라가 하나님의 때에 성령으로, 땅끝까지 이르는 나라임을 말씀하셨습니다

  이기적인 자기 중심성에 기인한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가 자신에게 주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동안 자신의 밖에 있던 것들, 가지고 싶었지만 자신이 가지지 못했던 것들이 자신에게 흘러들어와 자신의 만족과 유익이 채워지는 것을 복이라고 생각하고, 그런 기쁨을 채워주는 소식이 복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철저하게 에덴동산에서의 아담과 하와처럼 가지지 못한 것에 관심을 가지는 태도를 바탕으로 나타나는 모습입니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와 반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 되어 오신 예수님을 생각해 보십시오. 철저하게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갔던 예수님을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께서는 자신의 소유, 자신이 얻는 것, 자신이 가지는 것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으셨습니다. 이 땅에서 예수님의 유일한 관심사는 자신의 삶을 통해 아버지 하나님의 뜻이 나타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이 땅에서 나의 바램이나 나의 뜻이 채워지는 나라가 아닙니다. 나를 통해 하나님의 뜻이 나타나며, 하나님의 뜻이 채워지는 나라가 바로 하나님 나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는 반드시 세속적인 가치관과 욕심으로 말미암은 나의 나라가 먼저 무너져야 합니다. 창조주보다 피조물을 더 사랑하던 모습에서 돌이켜, 피조물보다 창조주를 더 사랑하는 모습으로 변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 창조주의 목적과 계획, 창조주의 마음으로 변화되어 창조주의 뜻으로 피조물을 다스리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살아가는 모습은 바로 그런 것입니다.

  6절을 다시 보면, 간단한 질문인 것 같지만 이 질문 속에는 하나님 나라의 본질과 모양에 대한 내용이 함축적으로 담겨 있습니다. 제자들의 기대는 무엇이었습니까? 이스라엘을 위해 그 나라가 ‘짠!’하고 완성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대답은 전혀 달랐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성령을 경험한 너희들을 시작으로 그리스도의 권능을 펼쳐가는 나라인데, 너희를 시작으로 예루살렘이, 예루살렘을 통해 온 유대가, 유대를 통해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그리스도의 증인되는 나라, 즉,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충만해지는 나라가 바로 하나님 나라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제자들은 하나님 나라를 이스라엘이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생각을 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는 공간에서 이루어진다기보다 시간 속에서 이루어지는 나라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어떤 공간에 있거나, 어떤 모임에 참석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신 때와 시기를 잘 살아가는 것이 바로 참된 신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임하신 성령을 통해 받게 된 그리스도의 권능으로 하지 말아야 할 일들을 하지 않으며, 해야 할 일들을 마땅히 해냄으로 허락하신 시간을 채워가는 것이 바로 참된 신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전역할 날을 기다리며 맨날 자기가 군복무를 몇 퍼센트 채워갔는지를 확인하는 것보다 우리가 굳이 애써 확인하지 않더라도 언젠가 그날이 오지 않겠습니까?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을 신실하게 살아내며, 질적으로 탁월한 시간들로 채워간다면 1년 6개월 이후 맞이하게 되는 그날이 정말로 큰 기쁨이 되지 않겠습니까?

  사실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부정적인 군문화도 원래부터 있었던 것들은 아닙니다. 요행을 부려서라도 어떻게 해서든 피해가야 잘한 것이라고 생각되고, 법망을 요리조리 피해서라도 자신의 권리를 챙겨먹으면 된다고 생각하는 문화, 군대 가서는 열심히 하지 말고 튀지 말라고 가르치는 시대적인 분위기도 원래부터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인권이라는 이름으로 예쁘게 포장되어 있긴 하지만, 철저하게 인간의 욕심이 만들어 놓은 비정상적인 것들입니다.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신 때와 시기를 살아가는 것은 어떻게 보면 이런 모습에 대한 저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지려고 하는 자들 속에서 나누는 자가 되어야 하고, 버리는 자들 앞에서 치우는 자들이 되어야 하며, 무너뜨리는 자들 속에서 세우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인간의 능력으로 행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그리스도의 권능으로 행할 수 있는 일입니다.

  오늘 본문 11절을 보면, “갈릴리 사람들아”라고 부르는 모습이 나옵니다. 천사들이 나타나서 제자들을 부르는 것인데, 이왕이면 “제자들아” “성도들아”라고 좀 멋있게 부를 수도 있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갈릴리 사람들아”라고 부릅니다. 성경에서 지역 이름으로 사람을 부른 것은 여기가 처음입니다. 갈릴리는 이전까지 성경 어디에서도 주목되지 않았던 비주류 지역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비주류 지역에 있던, 비주류 인생의 제자들을 통해 땅끝까지 하나님 나라로 바꾸는 일을 시작하시겠다는 선포를 하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복음의 일은 제국의 중심인 로마에서 시작되는 것도 아니고, 종교의 중심인 예루살렘에서 시작되는 것도 아닙니다. 즉, 하나님 나라의 일은 꼭 서울, 부산, 인천, 대구와 같은 대도시에서 시작되는 것도 아니고, 수천 명이 모인 대형 교회에서만 시작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군부대, 누구도 알아주지 않던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고 해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교회의 가치가 그 정도가 되지는 않고, 그렇게 되어서도 안됩니다.

  사람들은 우리와 같은 군교회를 보고 복음의 씨앗이 뿌려지는 것도 심어지는 것도 어렵다고 합니다. 하지만 우리를 부르신 분은 사도행전의 역사 속에서 갈릴리 촌놈들을 통해 땅끝까지 복음이 퍼져나가게 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바라옵기는 오늘 함께 예배하는 우리 모두가 그 하나님을 더욱 신뢰하며 나아갈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의 일을 이루어가시고, 우리와 함께 하나님 나라의 일을 이루어 가시기 원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사도행전의 제자들과 같이 믿음의 역사를 써 내려가는 하나님 나라의 주역들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