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의 시작인 1절에는 "데오빌로"라는 사람의 이름이 등장합니다. '데오빌로'라는 이름은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자'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실존 인물인지 아니면 이 글을 읽는 자들을 총칭하는 표현인지는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데오빌로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사도행전의 시작에 등장하는 이 이름을 통해 우리는 사도행전의 저자가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알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1장 3~4절 말씀을 보면 "3 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 나도 데오빌로 각하에게 차례대로 써 보내는 것이 좋은 줄 알았노니 4 이는 각하가 알고 있는 바를 더 확실하게 하려 함이로라"(행1:3~4) 데오빌로가 나옵니다. 사도행전의 저자는 누가임을 알 수 있고, 같은 수신자를 향해 먼저 기록한 글이 누가복음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1~2절 우리 같이 한 번 읽어볼까요? “데오빌로여 내가 먼저 쓴 글에는 무릇 예수의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 2 그의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시고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을 기록하였노라”(행1:1~2) 여기에는 먼저 쓴 글, 즉, 누가복음에는 "예수께서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 그가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시고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을 기록했다고 합니다. 사도행전은 여기에서 이어지는 내용임을 암시하고 있는데, 2절에 기록된 말씀처럼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신 일이 사도들을 통해 어떻게 나타나게 되었는지를 기록한 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누가복음은 예수께서 직접 가르치시며 행한 일을 기록한 성경이라고 하면, 사도행전은 성령을 통해 명하신 예수의 가르침과 예수께서 행하신 일이 사도들을 통해 어떻게 이어지고 나타났는지를 기록한 성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어지는 3절부터 5절에서 누가는 부활하신 예수께서 그들에게 나타나 마지막으로 전달한 내용이 무엇인지를 언급합니다. 우리 이 말씀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3 해 받으신 후에 또한 저희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사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저희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 4 사도와 같이 모이사 저희에게 분부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5 요한은 물로 침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침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행1:3~5)
사실 누가를 비롯해 다른 사도들도 예수께서 함께 하실 때에는 예수의 가르침과 삶의 의미를 제대로 알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예수께서 그들에게 가르치셨던 모든 것들을 십자가에서 완성하시는 모습을 보았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는 순간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인 것을 증명하는 것도 보았습니다. 무엇보다 죽음의 권세를 깨뜨리시고 부활하셔서 그들 앞에 나타나신 것도 직접 보았습니다. 예수께서 그들과 함께하시는 동안에는 가르쳐주셨던 내용들, 그리고 행하셨던 모든 일들이 복잡하게 뒤섞여 있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경험하고 난 후에는 흩어진 퍼즐조각처럼 복잡하게 뒤섞여 있던 것들이 하나씩 맞춰지는 경험을 하게 되었고, '하나님 나라'가 무엇인지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이 내용은 사도행전을 이해하는데 핵심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에 조금 더 구체적으로 나누고 넘어가겠습니다. 마태복음 16장을 보면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자신을 누구라고 하는지 물어보는 장면이 나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통해 특별한 가르침을 받았고, 또 특별한 일을 보고, 듣고, 경험하였지만 그들은 예수를 침례 요한, 엘리야, 예레미야와 같이 선지자 중의 하나로 생각하였습니다. 쉽게 말하면 역사 속에 있었던 인물들처럼 조금 특별한 사람 정도로 생각한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이어서 그렇다면 '너희들' '제자들'은 자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어보셨습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이렇게 대답을 합니다. 마태복음 16장 16절 말씀 같이 읽겠습니다.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16:16) 그 대답을 들은 예수께서는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고 하시며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겠다고 하십니다.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예수'라는 인물이 4대 성인 중 한 사람으로 생각하며 다른 사람보다 뛰어난 것을 가르친 사람, 다른 사람보다 모범적인 삶을 살았던 사람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를 믿는 것, 예수의 부활을 믿는 것은 그 정도의 일이 아닙니다. 예수를 믿는 믿음의 시작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것에 대한 믿음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즉, 이 세상이 우연히 지어진 것이 아니라 전능하신 창조주의 섭리를 따라 완전하신 계획안에서 만들어졌다는 것을 전제로 두어야 합니다. 창조하신 모든 것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예정하신 사람들, 즉, 그리스도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통해 완전한 기쁨 즉, 에덴동산으로서의 상태가 유지될 수 있도록 설계해 두신 것이죠. 하지만 인간은 스스로가 하나님처럼 되고자 하여 자신의 욕심을 앞세웠고, 하나님께서 지으신 것을 무너뜨리는 삶을 이어갔습니다. 그래서 구약성경에 기록된 역사는 인간이 에덴동산으로부터 어떻게 멀어지는지에 대한 과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당시 유대 사회의 모습이 어땠습니까? 구약성경이 에덴동산으로부터 어떻게 멀어지게 되었는지에 대한 역사라고 하면,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역사, 신약성경에서 예수께서 못 박히시기까지의 역사는 인간이 에덴동산에서 얼마나 멀리 떨어졌는지에 대한 설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 유대 사회는 하나님의 율법조차도 권력을 누리는 도구에 불과했습니다. 율법을 많이 안다는 이유로 다른 사람들 위에 서려고 하고, 율법을 잘 지킨다는 이유로 다른 사람의 인생을 정죄하고 판단하는 것이 그들의 모습이었거든요. 스스로가 하나님께 선택받은 백성이라고 여기던 유대인들은 지식과 행동으로만 하나님의 율법을 지킬 뿐, 율법에 담겨져 있는 진정한 의미는 생각조차도 못하는 상태에 이르렀습니다. 복음서를 통해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하신 말씀을 비춰서 생각해보면, 그들은 위선, 외식, 교만 등 겉으로 보이는 것에 치중되어 있던 자들이었습니다. 정직, 겸손, 섬김, 사랑 등 건강한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기본이 되어야 하는 것들이 상실된 상태였고, 철저한 경쟁 사회 속에서 가지는 것, 이기는 것만이 그들에게 주인이 되었습니다. 입으로는 정직, 겸손, 섬김, 사랑을 이야기하지만 남이 지켜는지 안 지키는지 서로 판단하고 정죄만 할 뿐, 자신의 삶에는 그런 것들이 개입되지 않기를 바라고, 오히려 그런 것들을 불편해 하는 상태가 바로 유대의 사회의 모습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태초에 그리스도 안에서 예정하셨던 것들이 상실된 상태가 바로 이런 결과로 이어졌던 것입니다.
만약 이런 분위기 속에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지 않았다면 어땠을까요? 철저한 경쟁 속에서 위로 올라가는 것만을 전부로 여기며, 그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사회의 분위기가 지속된다면 말이죠. 그들이 만들어 놓은 그런 모습이 점점 발전해가며 2000여년의 시간이 흘러 오늘을 맞이하게 되었다면 오늘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사회의 모습은 어떤 모습일까요? 정의와 사랑의 가치가 떨어지며 만들어진 사회, 기독교적인 관점으로 신앙을 잃어가며 만들어온 최근 몇십 년간의 대한민국 모습만 본다 하더라도 점점 더 살기좋은 나라가 되고 있는 것 같이 보이지는 않습니다. 이런 모습으로 브레이크 없이 발전해가며 2000년 정도 역사가 이어진다면 4025년의 대한민국은 너무 무섭지 않습니까?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절대적인 목적은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 품으셨던 계획, 그 뜻의 회복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알려주기 위함이고, 인간의 몸으로 어떻게 실현 가능한지를 몸소 보여주기 위함이었습니다. 즉, 당신처럼 살아감으로 인해 우리는 다시 에덴동산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함인 것입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그 일을 알 수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세상의 가치에 눈이 어두워진 사람들은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불편하게 여겼습니다. 유대인들, 특별히 그들의 지도자였던 바리새인들에게 예수는 자신들의 뜻을 이루지 못하게 만드는 걸림돌일 뿐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당시 사람들은 결국 하나님의 뜻,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재산과 자리와 명예를 지키기 위해 정직, 정의, 사랑과 같은 것을 포기하는 모습은 우리와 멀리 있는 일은 아닙니다. 마치 정직하게 살면, 정의롭게 살면, 사랑하면서 살면 어떤 결과를 맞이하게 되는지 똑똑히 보라고 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습니까? 만약 예수님의 인생이 단순히 이렇게 끝나버렸다면 예수는 그저 4대 성인 중 한 사람이거나 다른 사람보다 특별한 삶을 살아가다가 안타깝게 죽음을 맞이한 그런 사람에 불과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예수를 다시 살리셨습니다. 그들이 죽인 예수가 바로 자신의 뜻이며, 자신의 아들임을 온 천하에 증명하신 것입니다. 즉, 정직, 정의, 사랑, 겸손, 순종 등 예수가 보여주신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뜻임을 증명하신 것입니다. 사도행전의 역사를 이어가는 제자들의 믿음은 바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보여주신 이러한 일을 가장 기본에 두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자신들의 앞길을 가로막는 불편한 인물이었습니다. 또 누군가에게는 예수가 존경스러운 인물이기도 하였지만, 자신에게도 그와 같이 십자가가 주어질까 두려워 선뜻 따라가지 못한 자들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함께 살펴볼 사도행전 속의 제자들은 달랐습니다. 그들은 예수께서 맞이하신 십자가 너머에 있는 부활의 영광, 구원의 영광을 본 자들입니다. 비록 예수는 십자가를 맞이하였지만, 예수께서 남기신 것들이 나를 살리고, 민족을 살리며, 나라를 살리고, 시대를 살릴 수 있음을 보게 된 자들입니다.
인간의 모습, 인간의 욕심을 생각하면 2000년 전의 그 일이 지금까지 이어져 온 것은 기적 중에 기적입니다. 당장 내 통장에 꽂히는 돈 몇천 원, 몇만 원에 이상이 생기는 일에는 세상이 무너진 것처럼 목소리를 내지만, 누가 정의가 사라진 사회를 안타까워하며, 누가 희생과 사랑이 사라진 오늘날을 안타까워합니까? 이런 시대와 사회의 엄청난 일들을 변화시켜 왔던 것은 큰 변화가 아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일을 이어왔던 것은 대규모의 어떤 일이 아니었습니다. 사도행전을 살펴보면서 계속 나누게 될텐데, 주의 교회는 세력을 모으고, 힘을 모으는 등의 큰 규모를 내세운 적이 없었습니다. 정의와 사랑이 사라진 것을 안타까워하며 가장 어두웠던 시대의 한 구석에서 애통하는 마음으로 믿음을 지켜왔던 한 사람, 그 한 사람으로 인해 민족이 변화되고, 그런 사람들이 하나 둘씩 모이며 작은 교회가 형성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로 인해 나라가 변화되는 기적의 일들이 일어나기도 하며 여기까지 온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실 당시의 모습처럼 어두워져 가는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뜻이 회복되기를 구하며 애통하는 마음으로 기도하는 한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되어 성령으로 명하신 일을 행함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흔적을 남기는 주의 몸 된 교회를 찾고 계십니다. 바라옵기는 오늘 함께 예배하는 우리가 주님이 찾으시는 그런 사람, 그런 교회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눈에 보이는 십자가 때문에 포기하거나 굴복하지 않고, 십자가 너머에 있는 영광을 바라보며 나아가는 무리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한 손에는 복음, 한 손에는 사랑을 들고 거룩한 부흥을 꿈꾸는 무리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2000년 전 유대 사회에는 그리스도의 제자들로 인해 교회가 세워지며 그리스도의 계절이 왔습니다. 2025년을 살아가는 우리로 인해 먼저는 우리가 머물러 있는 이 교회, 더 나아가 우리의 부대, 더 나아가 우리가 머물고 있는 곳곳에 그리스도의 계절이 올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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