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강해

<사도행전 강해29>최선이 아닌 순종으로(사도행전 11:1~18)

남편, 아빠...그리고 목사 2026. 7. 10. 08:38

  많은 학자들이 공통적으로 이야기하는 사도행전의 핵심 사건이 있습니다. 먼저는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 성령 사건이고, 두 번째는 다메섹 도상에서 사울이 회심한 사건이며, 세 번째는 우리가 계속 살펴보고 있는 베드로와 고넬료의 만남입니다. 사도행전에서 이 이야기들을 핵심 사건으로 꼽는 이유가 있습니다. 사도행전은 '확장'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은 개인이 확장되어 교회의 문을 연 이야기를 담고 있고, 교회가 확장되어 이방인의 문을 연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우리는 나를 확장 시키기 위해, 내가 머물고 있는 곳을 확장 시키기 위해 '최선'이라는 수단을 이용합니다. 하지만 '최선'이 꼭 우리를 꼭 확장 시켜 주는 것만은 아닙니다. 때로는 우리의 최선이 우리를 더욱 고집스럽게 만들며, 협소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또한 원래 나아가야 할 방향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게도 하는 것 역시 최선의 결과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우상을 만들어 섬긴 것도 역시 그들 나름의 최선을 다한 결과였습니다. 유대인들이 복음서와 사도행전의 바탕이 되고 있는 문화를 만들어 간 것 역시 그들의 최선 때문이었습니다.

  오늘 우리의 모습은 지난 날의 최선들이 만들어 놓은 결과입니다. 분명 무엇인가를 이루기 위해 최선을 다한 것도 있을 것이고, 좀 더 눕자, 좀 더 자자고 하며 최선을 다해 게으르게 보낸 시간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오늘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겉으로 드러난 모습뿐만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 우리의 믿음은 선한 것들을 잘 품고 있으며, 선한 일들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발판이 잘 만들어지고 있습니까?

  사도행전에서 이야기하는 '확장'은 인간의 최선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최선을 버리게 하고, 하나님의 최선이 우리를 통해 나타내어질 수 있도록 합니다. 사도행전의 '확장'은 이 세상에서 이야기하는 부와 명예, 인정 등의 성공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모든 확장은 하나의 방향으로 귀결되는데, 바로 '하나님 나라'입니다. 이기적인 탐욕을 버리고 공동체를 만들어 가며, 시대와 전통을 뛰어넘어 더 광범위한 공동체로 확장되어가는 이야기가 바로 사도행전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라옵기는 오늘 말씀을 살펴보는 이 시간, 저와 여러분이 확장되어지는 은혜가 있기를 소망합니다. 무엇보다 더 온전한 마음과 믿음, 그리고 삶으로 나아가고, 더 온전한 공동체로 확장되어져가며, 하나님 나라를 향해 더 온전한 모습으로 나아가는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1 유대에 있는 사도들과 형제들이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함을 들었더니 2 베드로가 예루살렘에 올라갔을 때에 할례자들이 비난하여 3 이르되 네가 무할례자의 집에 들어가 함께 먹었다 하니(행11:1~3)"

  유대에 있는 사도들과 형제들의 귀에 베드로를 통해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는 것도 큰 일이지만, 유대인들에게는 베드로가 이방인들과 접촉을 하였다는 소식이 더 큰 문제로 느껴졌을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예루살렘에 도착하자 예루살렘 교회의 유대인들 중 보수적인 사람들, 성경에서 할례자라고 칭하는 이들은 베드로가 유대 사회의 정결법을 무시한 채 이방인들과 교제했다는 이유로 비난을 하였습니다. 여기 나온 할례자들은 자기들이 옳다고 믿는 것을 지키기 위해 나름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그들과 같은 유대인이었다면 그들의 생각을 지지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성경을 통해 좀 더 객관적으로 그 일들을 살펴보게 되지 않았습니까? 우리의 눈에 그들의 최선이 지금 행하고 있는 일이 어떤 것입니까? 책 한권만 읽은 사람이 가장 무섭다고 하는 것처럼 열방을 넘어서고 있는 복음의 행진을 한 줌의 지식과 신념으로 가로막고 있는 것 아닙니까?

  베드로는 자신이 왜 이방인들을 만나게 되었는지, 그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밖에 없었는지와 그들에게 침례를 주게 된 이유에 대해서도 설명을 합니다. 베드로는 환상을 통해 하늘로부터 정한 짐승과 속된 짐승이 모두 들어 있는 보자기가 내려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잡아먹으라는 음성과 함께 하나님이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고 하지 말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보자기에 들어있는 정한 짐승과 속된 짐승은 오늘 본문의 표현을 빌려 보면 할례 받은 유대인과 할례 받지 않은 이방인을 의미하는 것인데, 하나님께서는 그들도 깨끗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이방인들 역시 하나님이 창조하셨기에, 이방인들 자체가 부정한 존재는 아니었습니다. 더군다나 유대인들이 그렇게 강조하던 율법에도 이방인들을 만지면 더러워진다고, 부정해진다고 되어 있는 곳은 없습니다. 그저 유대인들이 자신들만의 기준을 세운 결과일 뿐입니다. 유대인들이 이런 문화를 만들고 전통을 만든 이유가 무엇일까요? 거룩과 정결을 지키겠다는 열심, '최선'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들의 최선은 '확장'시켜 간 최선이 아니었습니다. 타인을 배재하며 자신을 고립시킨 최선이었을 뿐입니다.

  베드로도 유대인이었습니다. 환상을 보기 전만 해도 베드로 역시 다른 유대인들과 같은 문화 속에서 같은 기준을 세우고 있었으며, 같은 전통을 따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환상을 보게 되었습니다. 환상을 보게 된 베드로에 하나님은 이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12절 상반절입니다. “성령이 내게 명하사 아무 의심 말고 함께 가라 하시매”(행11:12上) 베드로는 유대인으로서의 정체성이나 자신의 '최선'을 고집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최선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으로 걸음을 옮겼습니다.

  베드로는 이어서 고넬료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갑니다. 고넬료 역시 베드로를 자신의 집으로 청해야 하는 목적과 이유를 몰랐습니다. 그저 하나님께서 보내신 천사가 명령하는 대로 순종했을 뿐입니다. 겸손한 모습으로 베드로를 맞이한 고넬료는 베드로가 전한 메시지에도 겸손하게 반응하였습니다. 베드로가 전한 내용은 간단했습니다. 로마의 반역자로 고발을 당해 얼마 전 십자가에 달려 죽임을 당한 예수가 메시아, 곧 그리스도라는 것이었습니다.

  고넬료가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로마의 반역자를 따르는 일이었기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어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고넬료는 로마의 백부장이기 전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였습니다. 고넬료가 베드로를 청할 때 목적과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한 가지는 확실히 믿고 있었습니다. 14절입니다. “그가 너와 네 온 집이 구원 받을 말씀을 네게 이르리라 함을 보았다 하거늘”(행11:14) 고넬료는 베드로를 통해 자신은 물론 온 집이 구원 받을 말씀을 듣게 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베드로가 고넬료의 집에 도착하였을 때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행10:33)라고 했던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었습니다.

  베드로가 고넬료의 집에서 복음을 전할 때 특별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앞의 10장을 보면 "베드로가 이 말을 할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셨다"(행10:44절)고 되어 있는데, 11장에서 베드로는 이 일에 대해 예루살렘교회의 유대인들에게 이렇게 설명합니다. 11장 15절입니다. “내가 말을 시작할 때에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기를 처음 우리에게 하신 것과 같이 하는지라”(행11:15) 여기에서 처음은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서 사도들에게 처음 성령이 임하셨던 때를 의미하는데, 이방인들에게도 그때와 마찬가지로 성령이 임하였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환상을 경험하고, 또 다른 환상을 경험한 이방인을 만나 하나님의 말씀을 전함으로 이방인에게도 자신들에게와 같이 성령이 임하는 일을 경험한 베드로는 어떻게 확장되어졌을까요? 예루살렘의 할례자들에게 이 내용을 전하며 마무리하는 베드로의 이야기를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17절입니다. “그런즉 하나님이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그들에게도 주셨으니 내가 누구이기에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 하더라”(행11:17)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무엇인가 대단하고 멋진 것을 하나님 앞에 올려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통하여 당신의 일을 드러내실 수 있도록 하나님의 말씀에 겸손하게 반응하는 것입니다.

  제가 일반대학교에서 신학대학교를 편입할 때 나름 치밀한 계획을 세우고 있었습니다. 3학년으로 편입을 하니까 일단 2년은 이곳에서 학교를 다니고 1년 정도 잘 준비를 해서 유학을 다녀와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신학대학교를 다닐 때 경제적으로 정말 힘들었거든요. 굉장히 치열하게 또 열심히 살았습니다. 근거리에서 진행되는 예배, 세미나 자리는 거의 다 참석을 했었고, 누군가가 교회 사역에 도움을 요청할 때에는 배움의 기회라 생각하고 달려갔습니다.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모습이 좋게 봐주어서인지 편입 동기들이 정말로 많이 도와주었고, 특별히 편입하면서 알게 된 목사님 한 분은 사역에 대한 도움은 물론이고, 유학을 잘 준비할 수 있도록 영어학원도 아주 저렴하게 다닐 수 있도록 소개해 주셨습니다. 학교를 졸업하고 본격적으로 유학을 준비하게 되었습니다. 교회 사역은 주말에만 하면 되었고, 주중에는 영어학원과 아르바이트를 하며 약 반년 정도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어느날 도서관에 앉아 공부를 하고 있는데 문득 ‘지금의 최선은 무엇을 위한 것인가?’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가더라구요.

  내가 회복된 것과 같이 누군가가 회복할 수 있는 교회를 꿈꾼다고 생각을 했지만, 정직하게 제 마음을 돌아보니까 뭔가 남들보다 조금 더 대단한 것을 배웠다는 이유로 특별한 영향력을 행사하고자 하는 그런 마음들이 있더라구요. 즉, 세상에서의 성공과 같이 대단한 스펙을 쌓아 인기를 얻고, 멋진 모습으로 목회를 이어가고자 했던 마음들이 저에게 있었던 것입니다. 고민이 점점 더해지던 어느날 모 선교단체에서 진행되는 선교단체의 한 프로그램에 참여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저는 또 한 번의 회심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목회라는 영광스러운 직책을 성공을 위한 수단 정도로 인식하고 있던 저의 모습을 보게 되었고, 저의 최선이 하나님의 뜻과 얼마나 멀어지고 있었는지를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저는 저의 인생에 유학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마음에 새기게 된 것들이 있습니다. 맡겨진 영혼을 이용하지 말고, 그들을 세우는 일에 집중하자. 허락하신 교회를 이용하지 말고, 교회가 세워지는 일에 집중하자. 본질적으로 이 두 가지였습니다. 교회에 양해를 구하고 유학과 아르바이트 등 주중에 하던 모든 것들을 내려놓고 교회로 돌아갔습니다. 당시 청소년부를 담당하고 있었는데, 제가 교회에 있으니까 아이들이 거의 매일 교회로 오더라구요. 특별한 것 없이 아이들과 밥을 해서 먹고 놀았습니다. 아이들과 거의 매일 만나며 놀았을 뿐인데, 저는 그때 목회가 왜 영광스러운 일인지를 처음 깨닫게 되었습니다. 아이들 중에는 교회에 오면 집에 가는 것을 꺼려하던 아이들도 있었습니다. 2년째 그 아이들을 담당하고 있었지만, 사실 각자의 형편은 잘 몰랐거든요. 그런데 같이 밥을 먹고 놀기도 하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까 그때서야 그 아이들에 대해서 조금씩 알게 되었습니다. 어린 시절 부모님이 이혼한 후 거의 매일 술주정하는 아빠와 함께 지내는 자매도 있었고, TV에서나 나올법한 쓰레기 집에서 생활하고 있던 남매도 있었습니다.

  형편을 알게 되니 아이들에게 무엇을 해주어야 할지, 어떻게 그 아이들을 섬겨야 할지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아이들을 알기 시작하니 함께하는 모든 시간들이 점점 즐거워졌습니다. 아이들이 달라지기 시작했고, 예배의 분위기가 달라지기 시작했으며, 교회가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무엇보다 제가 가장 많이 달라질 수 있었습니다. 20대 후반의 젊은 나이 목회에서만 누릴 수 있는 보람과 성취감을 제대로 누릴 수 있게 되었는데, 유학에 대한 생각은 어떤 미련도 없이 깔끔하게 지워졌습니다. 이 일은 지식만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을 품어야 할 수 있는 일임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만약 끝까지 저의 길을 고집하며 유학의 길에 올라 스펙을 쌓고, 남들 앞에서 자랑할 만한 것들을 배워왔다면 어땠을까요? 물론 지금보다 더 나은 목회자가 될 수도 있었겠지만, 높은 확률로 저는 어깨에 힘을 주고 다니며 목회자가 아닌 목사의 탈을 쓴 괴물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있으라고 하시는 자리보다 내가 있고 싶은 자리에 있고 싶었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일을 하기보다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더 하고 싶었습니다. 교회를 꿈꾸며 목회의 길을 시작하고, 최선을 다해서 공부를 했으며, 사역의 기술들을 익혀왔었습니다. 하지만 냉정하게 이야기하면 그동안의 저는 성도들을 이용하던 자였고, 교회를 이용하던 자였습니다. 본질적으로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시는 일을 가로막고 있던 방해꾼일 뿐이었습니다. 유학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마음을 붙잡으려고 했고, 하나님의 마음으로 교회를 붙잡으려고 했습니다. 저의 꿈을 내려놓게 되자 그 자리에 하나님의 꿈이 자리 잡히기 시작했고, 저의 일을 내려놓자 하나님께서 저를 통해 하시고자 하는 일들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한 목사님이 언젠가 하신 말씀이 큰 도전이 되었습니다. 큰 열차에 볼트를 조이는 일 하나 소홀히 한 것이 큰 사고로 이어질 수 있다고 하며, 보이지는 않더라도 자신은 그런 사고를 예방하는 볼트 하나처럼 살다가 가고 싶다고 하시더라구요.

  바라옵기는 함께 예배하는 우리 모두가 그런 인생이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있고 싶은 자리에 있기보다는 있어야 할 자리에 있으며, 하고 싶은 일을 하기보다는 해야 할 일들을 하는 그런 인생이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인생이 아니라 꼭 있어야 할 자리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충실히 감당하는 그런 인생들이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때로는 하나님께서 잘 보이지도 않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자리에 우리를 부르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곳에서 우리에게 맡겨진 일을 충실히 감당하다 보면 하나님께서 확장 시켜가시는 위대한 일을 우리도 경험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내가 누구이기에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고 한 베드로의 말처럼 오늘 함께 예배하는 저와 여러분이 욕심으로 말미암은 최선으로 얼룩져 하나님의 일을 가로막는 인생이 아니라 더욱 겸손한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 서 있음을 인정하는 믿음으로 순종하며, 하나님을 능히 나타내는 삶으로 나아가는 믿음의 백성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