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강해

<사도행전 강해30>안디옥 교회(사도행전 11:19~30)

남편, 아빠...그리고 목사 2026. 7. 10. 23:22

혹시 이 사진의 인물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신은 죽었다'는 유명한 말을 남긴 철학가 ‘프리드리히 빌헬름 니체’입니다. 니체는 기독교를 비판하긴 했지만, 그가 남긴 ‘신은 죽었다’는 말은 ‘신은 없다’ ‘나는 신을 부정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신은 죽었다.’는 말은 자신의 저서 즐거운 학문에 등장하는 문장으로 ‘신은 죽었다. 신을 죽여버렸다. 우리 모두는 신을 죽인 자들이다. 살인자 중의 살인자인 우리는 어떻게 스스로를 위로 할 것인가?’라는 문장의 한 부분인데, 절대적 진리라고 할 수 있는 선과 악의 기준이 사라지고, 인간의 가치체계가 선과 악의 자리를 대신하게 된 인간의 모습을 비판하면서 한 말입니다. 니체는 스스로에 대해서도 철저하게 비판하였는데 ‘나는 인간이 아니다. 나는 다이너마이트다’라고 할 정도였습니다.

 

  니체는 비판적인 사고를 하는 철학가로서 ‘망치를 든 철학가’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기존에 절대적이라고 믿어 왔던 전통적인 가치관, 즉 낡은 가치관을 깨뜨려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던 철학가였습니다. 니체는 당시의 유럽사회가 예수의 정신이 아닌 낡은 종교적 전통성으로 채워지고 있는 것이 원인이라는 생각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니체의 망치는 단순히 파괴하기 위한 도구는 아니었습니다. 기존의 가치와 사상을 두드려보고 본질적인 의미가 잘 지켜지고 있는지를 시험하여 낡고 병든 것들을 깨뜨리기 위한 도구였습니다. 제가 니체의 사상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가 고민한 인본주의적인 사상에 대해서는 절대로 동의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기도 합니다. 다만 그의 '망치'는 오늘 우리에게도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언젠가 설교 중에서 ‘회심’은 일회성이 아니라 우리의 인생 여정에서 끊임없이 이어져야 되는 일이라고 한 적이 있습니다. 신앙은 니체의 망치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 혼과 영과 골수와 관절을 찔러 쪼개기까지 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끊임없이 우리를 두들기고 있음을 경험하고, 그로 인해 깨어지고 다듬어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라옵기는 오늘 함께 예배하는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 말씀의 망치 앞에 겸손하게 우리를 내어드려 당장은 아프고 힘들다 하더라도,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더 온전하게 다듬어지는 은혜가 있기를 소망합니다.

 

  고넬료를 만난 베드로는 또 한 번의 회심을 경험하였습니다. 유대인만이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이며 이방인은 개라고 생각하던 베드로가 깨어졌습니다. 17절의 ‘내가 누구이기에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행11:17)는 말은 하나님의 망치질에 또 한 번의 깨어짐, 부서짐을 경험한 자의 겸손한 고백이었습니다. 이런 베드로의 회심을 보고 예루살렘의 할례자들은 이렇게 반응하였습니다. 18절 말씀 같이 읽겠습니다. “그들이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하니라”(행11:18) 이것은 ‘우리들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하나님이 하신다니 어쩌겠어.’라는 태도가 아닙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는 표현으로 알 수 있듯이 ‘하나님 하신 일이 옳습니다!’라고 하며 하나님의 일을 이어가겠다는 태도입니다. 베드로를 깨뜨렸던 하나님의 망치는 이제 유대사회의 고여 있는 웅덩이를 깨뜨려 이방인들을 향해 흘러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먼저 오늘 본문 19절 말씀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그 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으로 말미암아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유대인에게만 말씀을 전하였는데”(행11:19) 스데반의 일로 예루살렘에 머무를 수 없게 된 그리스도인들은 유대와 사마리아 전역으로 흩어져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유대인들에게만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유대인들에게만 말씀을 전하면 된다고 생각하였을 것이고, 이방인들에게 말씀이 전해져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을 것입니다. 18절에서 19절까지 얼마의 시간이 흘렀는지 우리는 알 수 없지만, 긴 시간이 흐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20절에서 전혀 다른 상황이 펼쳐집니다. 안디옥의 헬라인들에게 주 예수를 전파하는 자들이 있었다고 소개합니다. 여기 헬라인의 '헬라'는 그리스를 지칭하는 단어인데, 신약성경에서는 단순히 그리스인만을 지칭하기 보다는 ‘이방인’을 대표적으로 지칭하는 단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무튼 이방인에게 주 예수를 전파하는 자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구브로와 구레네 출신의 사람들이었다고 합니다. 이들을 통하여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보십시오. 21절입니다.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많은 사람들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행11:21)고 합니다.

 

  오순절 성령 사건이 있은 후 주의 손이 함께 한 베드로, 그의 설교를 통해 삼천 명이 믿고 주께 돌아온 것처럼 구브로와 구레네 사람들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주께 돌아오게 된 것입니다. 사도행전 2장 42절에는 베드로의 설교를 통해 주께 돌아온 사람들의 모습에 대해서 이렇게 기록합니다.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행2:42) 가르침을 받고, 서로 교제하며, 기도하기에 힘썼다. 여러분 무엇이 떠오르십니까? 이 세 가지는 교회의 가장 중요한 본질이라고 할 수 있는데, 교회가 시작되었음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제 안디옥에도 이와 같이 교회가 형성된 것입니다. 빌립이 사마리아에 복음을 전하였을 때, 예루살렘 교회는 베드로와 요한을 보낸 적이 있었습니다. 이 회심의 역사가 정말로 성령의 역사인지에 대해 검증이 필요했고, 교회가 건강하게 세워질 수 있도록 돕기 위해서 온전한 지도자를 보낸 것입니다. 그와 같은 목적으로 예루살렘 교회는 안디옥 교회에 ‘바나바’를 보냈습니다. 바나바는 자신의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도운 사람이었고, 사울을 예루살렘 공동체와 연결해 준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또한 위로의 사람이라고 불릴 정도로 따뜻한 사람이었습니다. 무엇보다 바나바는 구브로 출신이었고 헬라파 유대인이었습니다. 안디옥 교회를 위해서, 예루살렘교회와의 관계를 위해서, 앞으로 더 확장될 이방인 사역을 위해서 바나바는 안디옥 교회를 위한 최고의 적임자였습니다.

 

  안디옥 교회를 찾아간 바나바는 그곳에서 일어난 일이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임을 확인하고 기뻐하였습니다. 목회자와 교회의 지도자들, 교회를 섬기는 자들이 기뻐할 때가 언제입니까? 대단한 일을 펼쳐가고, 유명해질 때가 아닙니다. 교회를 지었는데 땅값 오르고, 유튜브를 시작했는데 대박이 나는 것으로 기뻐하지 않습니다. 그런 것으로 기뻐하는 교회라면 걱정해야 하고, 두려워해야 합니다. 교회의 가장 큰 기쁨은 함께하는 공동체 속에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는 것을 볼 때입니다. 용서와 화합을 통해 거룩한 연합이 일어나고, 주의 말씀을 믿는 믿음을 통해 거룩한 순종의 일들이 이어지며, 절망 속에 있는 자들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거룩한 희망을 찾게 되는 것을 볼 때, 그것이 교회의 가장 큰 기쁨입니다.

 

  바나바는 안디옥 교회에서 그와 같은 모습을 보게 된 것입니다. 서로 다른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함께 지어져 가는 모습을 보며 큰 기쁨을 누리게 된 바나바는 안디옥 교회에 이렇게 권합니다. 23절 하반절 같이 읽겠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굳건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머물러 있으라 권하니”(행11:23下) 무엇을 하던지 굳건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머물러 있는 사람, 어디 있던지 굳건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머물러 있는 사람, 이 사람이 바로 성도 아닙니까? 그리고 굳건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머물러 있는 사람들의 무리가 바로 교회인 것입니다. 굳건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머무르며 더 온전한 성도가 되며, 더 온전한 교회가 되도록 권한 것입니다.

 

  안디옥 교회의 부흥은 놀라웠습니다.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믿고 주께 돌아왔는데, 또다시 큰 무리가 주께 더하여졌습니다. 물론 하나님 은혜의 역사이며, 성령님의 역사이지만, 이번에는 특별히 안디옥 교회의 지도자가 된 바나바를 통해 그 일이 이어졌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24절입니다.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여지더라”(행11:24) 개인적으로는 저를 참 부끄럽게 하는 말씀인 것 같습니다. 바나바와 같이 저도 좀 더 착하고,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다면 마일리지를 뛰어넘는 특별하고 거룩한 부흥이 우리에게도 있지 않을까 생각되는데, 좀 더 다듬어질 수 있도록 제가 먼저 하나님의 망치에 더 많이 깨어져야 할 것 같습니다.

 

  아무튼 안디옥 교회는 점점 왕성하여 갔습니다. 이제는 혼자서 교회를 감당하기가 어려울 정도가 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바나바에게는 안디옥 교회에서 함께 할 동역자가 필요했습니다. 그때 바나바에게 한 사람이 떠올랐습니다. 사도들에게 직접 다리를 놓아주었던 ‘사울’이었습니다. 일단 사울은 신학적으로는 누구에게도 뒤처지지 않은 정도로 소양이 잘 갖춰진 사람이었습니다. 지금 막 세워진 안디옥 교회에 신학적인 교육을 위해서는 사울이 적임자였습니다. 무엇보다 사울은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하나님의 그릇이었기에 안디옥의 이방인 사역에 함께 할 수 있는 최고의 적임자였습니다.

 

  잠깐 사울의 이야기를 하자면, 사울은 원래 유대교의 촉망받던 인재였습니다. 그런데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를 만나게 되었고, 회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사울을 변화시켜 주셨지만, 예루살렘 교회와 사도들은 그를 선뜻 받아들이기가 어려웠을 것입니다. 바나바가 겨우 중재를 하여 사울을 예루살렘 사도들에게 데리고 갔지만 회심은 인정을 하더라도 함께 사역할 수 있도록 자리를 내어주는 것은 어려웠을 것입니다. 예루살렘 교회에서 설 자리가 없었던 사울은 어쩔 수 없이 고향 ‘다소’로 내려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소에서 사울은 10년간 있었지만, 그곳에서 어떻게 지냈는지는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인간적인 추측에 불과하지만, 고향 다소에서의 10년이라는 시간도 결코 쉬운 날들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예루살렘으로 유학에 가서 유대교의 미래로 여겨질만큼 잘 나가던 아들이었는데, 어느날 이상한 종교에 빠져서 모든 지위와 자리를 잃어버린 채 집으로 돌아온 아들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요? 또 동네 사람들의 불편한 시선과 수군거림도 있지 않았을까요?

 

  하지만 사울이 다소에서 보낸 10년은 의미 없이 보낸 시간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사울은 다소에서의 10년을 통해 앞으로의 사역을 위한 준비를 철저하게 했을 것입니다. 신약성경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서신서만 보아도 사울이 어떤 고민을 하였는지가 드러나 있고, 자신에게 허락된 하나님의 은혜를 어떻게 정리하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학문적인 준비보다 더 확실하게 준비된 것이 있었습니다. 그동안 사울은 자신의 열심과 최선을 자랑하며 살아가던 사람이었지만, 이제는 그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며 나의 나 된 것은 오로지 주의 은혜라라는 고백으로 살아가는 자가 되었습니다. 모세가 광야 40년의 시간을 통해 하나님께 온전히 쓰임 받을 수 있는 자가 되었듯이, 아마 사울도 다소에서 보낸 10년의 시간을 통해 하나님께 온전히 쓰임 받을 수 있는 자가 된 것입니다.

 

  대단한 지식, 대단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 개인의 삶에서는 개인이 원하는 바를 이루는 데 분명 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무리 속에서, 집단 속에서, 공동체 속에서는 그것만으로는 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해가 되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사울은 ‘다소’에서의 시간을 통해 하나님 안에서라면 한마음 한뜻으로 연합될 수 있도록 은혜의 사람, 겸손의 사람, 순종의 사람으로 준비가 된 것입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환상의 콤비를 이루었습니다. 바나바는 따뜻한 사랑으로, 바울은 풍성한 지식으로 안디옥 교회의 성도들과 함께했을 것이며, 안디옥 교회는 바나바와 바울을 통해 건강한 신앙으로 잘 성장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함께 한 사역의 결과에 대해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26절 하반절입니다.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행11:26) ‘그리스도인’이라는 단어가 성경에 처음 등장하는 장면입니다. 이 말이 ‘예수쟁이’라는 말처럼 세상 사람들이 조롱하는 식으로 불렀던 단어인지, 그냥 교회 다니는 사람을 포괄적으로 일컫는 단어인지는 정확하지 않습니다. 다만 확실한 것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믿음이 그들의 정체성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란 말은 헬라어로 ‘크리스티아노이’라고 합니다. 그리스도를 뜻하는 ‘크리스토스’와 ‘~에게 속한 자들’을 뜻하는 ‘이아노이’가 합쳐진 단어입니다. 헤롯을 추종하는 자는 헤로디아노이, 가이사를 추종하는 자는 가이사리아노이, 네로를 추종하는 자는 네로니아노이라고 하는데, 안디옥의 제자들을 크리스티아노스, 즉 그리스도의 추종자, 그리스도께 속한 자로 불렀다는 것은 그들의 모습을 통해 그리스도가 분명히 나타내어지며 증거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안디옥 교회는 정말로 이상적인 모습을 가지고 있는 교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복음이 전해지지 못하였던 이방인에게 복음이 전해졌고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복음을 믿고 주께 돌아왔습니다. 예루살렘교회는 그들과 함께 할 적합한 지도자를 파송하였고, 큰 무리가 주께 더하였졌습니다. 안디옥 교회는 여기서 더 나아갔습니다. 사울을 동역자로 초청하였고 바나바와 사울의 멋진 동역의 결과는 안디옥 교회가 세상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는 결과로 이어졌습니다. 안디옥 교회는 서로 다른 사람들이 굳건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머물며 성도로 자라났습니다. 그리고 그 성도들은 그리스도인이라는 칭함을 받으며 함께 교회로 지어져 갔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부흥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명품 가방을 메고, 명품 옷을 입고, 외제차를 타고 다닌다고 해서 그 사람의 가치가 올라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사람다운 사람의 모습, 그리스도로 예정하신 삶의 모습이 회복되는 만큼 우리의 가치가 회복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교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화려한 예배당과 멋진 시스템이 있다고 해서 누가 그것들을 칭찬하나요? 그런 것은 사실 하나님의 영광과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아무것도 없을지라도 성도다운 성도들의 모습이 나타날 때, 교회다운 교회의 모습이 나타날 때, 성도와 교회를 통해 그리스도의 모습이 나타나 "저 사람들이 진짜 그리스도인들이다!"라는 말이 세상으로부터 나오게 된다면 그것이 진짜 회복이며 부흥이지 않겠습니까?

 

  오늘 함께 예배하는 저와 여러분이 안디옥 교회의 모습을 생각하며, 감탄하고 박수치는 것으로 끝나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나아가야 할지를 고민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일단 저부터 바나바와 같은 사랑이 있도록 또 바울과 같은 지식과 사명감으로 이 사역을 이어갈 수 있도록 겸손하게 엎드리겠습니다. 더 온전한 모습으로 교회를 섬길 수 있도록 부끄럽지 않은 목회자가 되도록 하나님 앞에 엎드리겠습니다. 함께 예배하는 우리 성도님, 우리 형제님들도 같은 마음으로 동참해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 교회에 다른 특별한 것, 대단하고 멋지고 화려하고 세련된 것은 없더라도 함께하는 우리가 그리스도로 하나 된 공동체임은 당당하게 드러낼 수 있도록 함께 해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구원의 역사가 그렇듯, 그리스도인이라는 것도 변화되는 것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어떤 망치를 통해, 무엇이 깨뜨려지며 어떻게 성장해 나가는지입니다. 바라옵기는 오늘 함께 예배하는 우리 모두가 진리의 망치 앞에 겸손히 우리를 내어드릴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안디옥 교회 같은 모습이 온전히 갖추어지지는 않더라도, 안디옥 교회와 같이 그리스도인으로 칭함 받을 수 있는 성도의 모습으로, 또 교회의 모습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는 믿음의 백성으로 성장해 갈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무엇보다 우리 교회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믿음의 공동체로 성장해 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