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1장에는 침례요한의 아버지인 사가랴와 관련된 내용이 나옵니다. 1장 5절부터 20절까지의 내용입니다. 내용이 조금 길지만 보다 정확한 이해를 위해 메시지 성경으로 이 내용을 함께 살펴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유대 왕 헤롯이 다스리던 때에 아비야 반열에서 직무를 맡은 제사장이 있었다. 그의 이름은 사가랴였다. 그의 아내는 아론의 후손으로 이름은 엘리사벳이었다. 이들 부부는 주의하여 계명의 도를 지키고 하나님 앞에서 깨끗한 양심을 품고서 바르게 살았다. 그러나 엘리사벳이 임신을 할 수 없어 그들에게는 자식이 없었고 이미 나이도 많았다.(눅1:5~7)
마침 사가랴가 자기 차례가 되어 하나님 앞에서 제사장 직무를 수행하고 있었는데 그가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가 분향하는 일을 맡게 되었다. 그것은 평생 한 번 오는 일이었다. 분향 시간에 회중은 성전 바깥에 모여 기도하고 있었다. 그때 하나님의 천사가 예고도 없이 성소의 분향단 오른쪽에 나타났다. 사가랴는 두려워서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눅1:8~12)
천사가 그를 안심시켰다. “사가랴야, 두려워 마라. 하나님께서 네 기도를 들으셨다. 네 아내 엘리사벳이 아들을 낳을 것이다. 너는 그 이름을 요한이라고 하여라. 너는 기뻐서 사슴처럼 뛸 것이며 너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그의 출생을 즐거워할 것이다. 그는 하나님께 큰 인물이 될 것이다.(눅1:8~14)
그는 포도주와 맥주를 마시지 않을 것이며 모태에서 나오는 순간부터 성령으로 충만할 것이다. 그는 이스라엘의 많은 아들딸들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할 것이다. 그는 엘리야의 방식과 능력으로 하나님의 오심을 알리고 자녀를 행한 부모의 마음을 녹이며 완고한 회의론자들의 마음에 뜨거운 깨달음의 불이 타오르게 할 것이다. 그는 백성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맞을 준비를 하게 할 것이다.”(눅1:15~17)
사가랴가 천사에게 말했다. “그 말씀을 믿으라는 말입니까? 나는 늙은 사람이고 내 아내도 늙었습니다.”(눅1:18)
그러자 천사가 말했다. “나는 하나님의 파수꾼 가브리엘이다. 나는 너에게 이 기쁜 소식을 전해 주려고 특별히 보내심을 받았다. 그런데 네가 내 말을 믿지 않으니 네 아들이 태어나는 날까지 너는 말을 하지 못할 것이다. 내가 너에게 한 말은 하나님의 때가 되면 그대로 다 이루어질 것이다.”(눅1:19~20)
이 말씀에는 침례요한의 아버지이자, 제사장이었던 '사가랴'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사가랴와 엘리사벳 두 부부는 하나님의 계명과 도를 지키고 하나님 앞에서 깨끗한 양심을 품고 바르게 살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정확하게 어떤 문제가 있었는지는 알 수가 없지만 그의 부부에게는 자식이 없었고, 이제는 나이도 많이 들어버렸습니다. 어느날 사가랴가 하나님 성소에 들어가 분향하는 일을 맡게되었는데, 이 일은 평생에 한 번 돌아오는 일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때 천사가 아무런 예고 없이 사가랴에게 나타났습니다. 사가랴는 두려워서 그 자리에 얼어 붙어버렸지만, 천사는 사가랴에게 두려워말라 하나님께서 너의 기도를 들으셨다고 하며, 말을 이어갔습니다. 천사가 사가랴에게 전한 말의 핵심은 '네 아내 엘리사벳이 아들을 낳을 것인데 그 이름을 요한이라고 하여라'였습니다.
천사는 엘리사벳이 낳게 될 아이가 어떤 사람인지 이야기를 하는데, ‘모태에서 나오는 순간부터 성령으로 충만하며, 이스라엘의 많은 아들 딸들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할 것이라는 등’ 그 아이로부터 놀라운 일이 이어지게 될 것이라는 예언을 합니다. 천사의 말을 다 들은 사가랴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그 말씀을 믿으라는 말입니까? 나는 늙은 사람이고 내 아내도 늙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여기서 잠깐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지금 이 내용을 보면 사가랴가 천사의 말을 믿었다는 것일까요? 믿지 못했다는 말일까요?
잠시 돌아가서 천사가 처음 나타나서 사가랴에게 한 말을 돌아볼까요? "천사가 그를 안심 시켰다. 사가랴야 두려워마라 하나님께 네 기도를 들으셨다"(눅1:13) 천사가 지나가다가 우연히 사가랴를 만나게 된 것이 아닙니다. 사가랴의 간구를 듣고, 그 간구를 이루어주기 위해서 찾아온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의 간구를 이루어주기 위해 찾아온 천사를 만나자 못 믿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자식을 달라고 오래 기도를 하면서 정작 자식을 주겠다고 하는 말은 믿지 못하는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신앙은 단어에서 그 의미를 표현하고 있듯 믿음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믿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내 믿음의 크고 작음이 아닙니다. 믿음의 대상입니다. '나의 믿음은 무엇을 향해 있는가?' '나의 믿음은 무엇을 바라보는 믿음인가?'하는 것입니다. 조금 전에 함께 살펴 본 내용의 사가랴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였지만, 실제 그의 믿음은 하나님을 하나님답게 바라보는 믿음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부족해 보입니다. 그의 믿음에서 가장 중심에 있었던 것은 인간의 인생에 보편적으로 주어지는 한계였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살펴볼 사도행전 12장에서도 조금 전에 살펴 본 ‘사가랴’의 모습과 같이 조금은 이상해 보이는 믿음의 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라옵기는 오늘 이 말씀을 통해 함께 예배하는 우리 모두가 진짜 믿고 있는 것은 무엇인지에 대해 점검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그리하여 더 온전하고 올바른 믿음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가 더 온전한 성도로서, 더 온전한 교회 공동체로서 한 걸음 더 성장해 갈 수 있는 귀한 은혜의 시간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교회를 박해하기로 작정한 헤롯 왕은 야고보를 죽였고, 더 나아가 베드로까지 죽이기 위해 옥에 가두었습니다. 하지만 갇혀 있던 베드로에게 하나님의 천사가 나타나 감옥에서, 또 헤롯 왕의 계략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베드로는 죽음이 코 앞에 다가와 있었지만, 엄청난 위기 속에서도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믿음 때문이었는지 편안하게 잠을 청하고 있었는데, 잠결에도, 무의식 중에도 천사의 음성에 순종하였고, 감옥을 벗어난 후에야 겨우 정신을 차리게 되었습니다.
감옥을 벗어난 베드로는 마가라고 하는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으로 갔습니다. 그곳에서는 여러 사람이 모여 기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5절에서 교회가 베드로를 위해 간절히 기도했다는 내용으로 보아 지금 이곳에서는 헤롯 왕에게 잡혀가 죽음의 문턱까지 간 베드로를 위해 교회는 간절히 기도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죽음의 위기 속에서 베드로가 담대한 믿음을 지킬 수 있도록, 고난과 박해 속에서도 교회가 담대한 믿음을 지킬 수 있도록 함께 기도했을 것이고, 그와 함께 하나님께서 베드로를 살려주셔서 다시 교회로 보내달라는 기도도 했을 것입니다.
집 앞에 도착한 베드로는 대문을 두드렸습니다. 대문 두드리는 소리를 듣고 로데라는 여자 아이가 나왔는데, 가만히 들어보니 ‘베드로’의 목소리였습니다. 베드로의 목소리를 들은 로데는 너무 기뻤습니다. 얼마나 기뻤는지 거의 정신 줄을 놓아버렸습니다. 문 앞에서 베드로가 서 있는데, 문을 열어줄 생각보다 안에서 기도하던 사람들에게 들어가 외쳤습니다. “베드로 아저씨가 살아서 돌아오셨어요!” "베드로의 음성인 줄 알고 기뻐하여 문을 미처 열지 못하고 달려 들어가 말하되베드로가 대문 밖에 섰더라 하니"(행12:14) 그런데 기도하던 사람들의 반응이 뜻밖이었습니다. 우리 15절 말씀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그들이 말하되 네가 미쳤다 하나 여자 아이는 힘써 말하되 참말이라 하니 그들이 말하되 그러면 그의 천사라 하더라”(행12:15)
다시 말해 이런 상황인 것입니다. 마리아의 집에 모인 교회는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기도 내용을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추측해 보면 이런 내용이었을 것입니다. “주여, 우리의 사도 베드로가 헤롯 왕에게 잡혀가서 이제 죽음을 앞두고 있습니다. 모든 상황 속에서 믿음의 담대함과 마음의 평안함을 잃지 않게 해 주시고, 우리 교회도 담대하게 이 믿음을 지켜가게 하옵소서. 그리고 주님, 주의 뜻이라면 우리가 순종하고 따라가겠지만, 그래도 베드로를 살려주시고, 우리에게 돌려보내 주셔서 주의 뜻을 이루어갈 수 있게 해 주시옵소서” 이렇게 한참을 기도하던 중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습니다. 로데라는 아이가 그 소리를 듣고 나갔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정신 나간 듯이 달려 들어오며 외쳤습니다. “집사님, 권사님! 베드로 아저씨가 살아서 돌아왔어요!” 그러자 기도하던 사람들은 이렇게 반응하였습니다. “얘야!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조용히 기도나 해”, “하나님, 저렇게 정신 나간 소리를 듣지 않게 해주시고, 저런 헛소리가 아니라 베드로를 진짜 살려주셔서 우리에게 보내주시옵소서”
여러분, 설교 서두에 언급한 사가랴의 이야기, 그리고 지금 사도행전 12장의 베드로가 돌아온 이야기 속에서 혹시 이상한 점을 발견하지 못하셨습니까? 이 두 가지 상황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바로 이상한 시간 차입니다. 먼저 사가랴에게 천사가 오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요? 사가랴와 엘리사벳이 평소와 같이 잘 살아가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엘리사벳이 임신하게 되었다면 이 부부는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요? 사가랴와 엘리사벳은 나이가 많았지만, 아이를 위해 날마다 기도하였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기도를 들으신 것일까 기적과 같이 아이가 생겼다. 이야기가 이렇게 이어졌다면 어땠을까요?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로 사람들은 마가라 불리는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에서 기도를 하고 있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간절한 기도를 들으신 것일까? 천사의 도움을 통해 기적과 같이 풀려난 베드로가 그들의 눈앞에 나타났다. 이렇게 이야기가 이어지더라도 전혀 이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의 생각에는 더 자연스럽게 느껴집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사가랴에게는 천사가 개입하게 하셨고, 베드로의 사건에는 ‘로데’라는 여자아이가 개입하게 하시며 묘한 시간 차를 두셨습니다.
이 시간차를 통해 분명하게 드러나게 된 것이 있습니다. 바로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믿음의 실체입니다. 사가랴는 천사를 만남으로 인해 그가 가지고 있었던 믿음의 실체가 무엇인지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사가랴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였지만, 그 믿음의 중심에는 하나님이 아닌 스스로에 대한 한계가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교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교회는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었지만, 어쩌면 그들이 더욱 믿고 있었던 것은 헤롯 왕의 무자비함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또한 얼마 전 야고보가 죽임을 당했고, 절대 풀려날 수 없을 것 같은 베드로의 상황을 더 믿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자신들이 가진 경험, 지식, 생각 속에 어떤 한계를 설정해 두고 그 한계 안에서는 얼마든지 하나님을 믿고 있지만, 한계 밖에 계신 하나님, 한계보다 크신 하나님은 믿지 못하고 있던 모습들을 드러낸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학교 다닐 때 수학을 참 좋아했습니다. 제가 수학 공부를 하면서 나름 지켜갔던 것들이 있었는데, 첫 번째로는 공식과 같은 것들을 단순히 암기하는 것보다 원리를 파악하고 응용을 잘할 수 있도록 이해하는 것이었고, 두 번째로는 단순히 많은 문제를 푸는 것보다 틀렸던 문제를 또 틀리지 않도록 오답 노트를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오답 노트는 답안을 체크하며 빗금이 그어지는 문제들을 중심으로 작성해 갔는데, 오답 노트라는 이름대로 이름대로 틀린 문제를 다시 풀어보며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이 목적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저의 방식에는 문제가 하나 있었습니다. 어떤 시험에서는 잘 몰랐던 문제였지만 찍어서 맞히는 문제들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당연히 오답 노트에 그런 문제들은 적지 않았습니다. 문제는 그러한 것에서 발생했습니다. 지금은 운이 좋게 맞혔지만, 다음에 또 그와 같은 문제가 나온다면 또 맞힌다는 보장이 없었던 것입니다. 차라리 틀려야 되는 문제라면 확실하게 틀렸어야 무엇이 문제인지를 살펴보며 하나라도 더 배울 수 있었을 것인데, 틀려야 되는 문제를 맞히고 나니까 당장의 점수는 조금 좋았을지 몰라도 다음 시험에서는 그와 같은 문제가 나오더라도 확실하게 맞힐 수 있는 능력을 키울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해 살펴본 시간 차가 그와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단순히 사가랴나 초대교회의 불신앙을 지적하여 ‘으이구! 믿음 없는 것들아! 니가 그러고도 제사장이야? 니가 그러고도 교회야?’라고 하며 절망에 빠뜨리려고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앞으로 벌어지는 일들 속에서 진짜 믿음으로 반응할 수 있도록, 또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의 일하심을 경험할 수 있도록 그들의 문제를 드러내신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의 첫 단추는 우리의 연약함, 부족함, 완전하지 못함을 인정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이것은 믿음의 영역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대로도 괜찮다고 생각하거나, 믿음이 좋다고 자부하는 모습은 우리에게 별로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본인의 믿음 없음을 인정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머리를 숙이는 것이 더 온전한 길로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철저한 경쟁 사회 속에서, 또 체면을 중요시하는 우리 나라의 문화 속에서 우리는, 우리의 문제점, 우리의 틀린 부분이 드러나게 될까봐 늘 두려워합니다. 하지만 실패하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연약함과 부족함이 드러나는 시간이며, 성장의 기회입니다. 문제를 알아야 고칠 수 있는 것이고, 틀렸다는 것을 알아야 정답을 향해 나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에서는 끊임없이 회심에 대한 기록이 이어집니다. 특히 베드로의 모습을 기억해보십시오. 멋진 모습들도 있었지만, 그의 시작에는 예수님을 부인하던 모습이 있었고, 사도행전에서 초대교회의 위대한 역사가 이어지는 동안에도 유대인의 관습에 매여 이방인을 용납하지 못하던 모습들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베드로가 잠결에도, 무의식 중에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정도로 온전한 믿음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스스로의 생각에 한계를 두고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아닌, 모든 조건과 상황, 모든 경험과 생각을 뛰어넘어 역사하시는 하나님 그대로의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가지게 되었음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2장에는 베드로의 그런 모습과 교회의 모습을 절묘하게 교차시킵니다. 이것은 베드로의 믿음을 부각시키는 것이기도 하지만, 교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알려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전에 베드로가 가지고 있었던 조건과 상황, 경험과 생각에 매여 어떤 한계 속에서만 믿음을 펼쳐가고 있던 초대교회의 모습을 드러내며 교회가 앞으로 어떤 회심을 경험해야 하는지, 또 어떤 믿음으로 나아가야 하는지를 드러내는 것이기도 합니다.
바라옵기는 오늘 함께 예배하는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믿음의 시간 차를 잘 극복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때로는 우리의 연약함, 우리의 부족함이 여지없이 드러나기도 하겠지만, 하나님 안에서 우리의 모습을 정직하게 인정하고,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그런 시간들을 잘 이겨내며 우리의 한계를 뛰어넘어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믿음으로,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온전한 믿음으로 성장해 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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