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의 시작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께서 금하신 동산 중앙의 열매를 먹게 된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처럼 되고자 하였기 때문입니다. 이 일은 그들의 자녀 가인과 아벨에게도 동일하게 이어졌습니다. 가인과 아벨은 죄로 인해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부모의 영향을 받아 하나님께 행하는 일 만큼은 최선을 다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집안의 장손이자, 두 형제의 형인 그리고 정말로 최선을 다한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으시고 동생 아벨의 제사를 받으셨습니다. 대충 제사를 드렸다면 마음에 불편함이 없었겠지만, 가인은 하나님께서 받으실만한 최상의 것들을 준비하여, 나름 최선의 제사를 드렸습니다.
문제는 바로 여기에서 발생하였습니다. 가인의 생각으로는 자신이 최선을 다했기 때문에 또 장자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당연히 자신의 제사를 받으실 것이라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내가 최선을 다했으니 그 결과는 내가 원하는대로 이어져야 한다.' 이것은 자신들의 부모가 에덴동산에서 저질렀던 죄, 그들이 하나님처럼 되고자 한 일의 또다른 모습이기도 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람들이 종교를 가지는 이유는 자신이 원하는 일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마음 때문입니다. 기독교 신앙을 가질 때에도 그런 마음으로 접근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창조하신 분이라면 다른 신들보다 더 뛰어난 것 아니야?라는 생각을 가지면서 말이죠. 그런데 기독교 신앙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자신이 바라는 일이 이루어지는 것에 대한 것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자신이 바라는 일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에 대해 더 분명한 답을 제시해줍니다.
잠언 16장 9절을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 이 말씀은 사람이 자기의 인생에 대해 스스로 계획한다 할지라도 그 걸음이 선한 걸음이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는 우리가 계획한 길을 따라감에 있어 모든 과정들을 하나님의 뜻으로 채워야 한다는 의미가 있지만, 또한 우리가 세운 계획의 결과가 우리의 뜻대로 되지 않을 때 그 일조차도 하나님께서 선한 길로 우리를 인도하고 계신 과정임을 믿어야 함을 포함하는 내용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신앙의 본질은 내가 세운 계획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내 걸음을 어떻게 인도하시는지를 신뢰하는 것입니다.
오늘부터 우리는 바울의 2차 선교여행, 선교여행의 2막을 함께 살펴보게 될 것입니다. 2차 선교여행에서는 준비 과정에서부터 다양한 일들이 일어났고, 또 그 시작에도 예상하지 못한 일들이 이어졌습니다. 어려움으로 이어질 수도 있는 일이었지만 그들은 조건과 상황에 굴복하지 않았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랐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주어진 모든 일들을 통해 새로운 일들을 이루어가셨으며, 또 그들에게 주어진 모든 일들을 합력하여 선으로 이룰 수 있도록 인도하셨습니다.
바라옵기는 이 시간을 통해 함께 말씀을 나누는 우리 모두에게 그런 지혜가 동일하게 더해질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눈앞에 주어진 조건들, 당장의 상황에 굴복하지 않으며, 주어진 모든 일들을 통하여 선을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다시금 새롭게 일어나, 성장과 확장을 경험할 수 있는 은혜의 시간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무엇보다 우리에게 주어진 일들을 하나님 안에서 받아들일 수 있는 선한 믿음이 더해질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지난 시간 우리는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에게 율법과 할례를 주장하는 일을 두고 모인 예루살렘 회의에 대해 함께 살펴보았습니다. 예루살렘 회의를 통해 유대인과 이방인의 문제는 나름 잘 조율되고, 잘 해결이 되었습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이방인들 중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들을 괴롭게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결론이 내려졌고, 이방인들에게는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라는 권면이 주어졌습니다.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있었던 장애물이 제거되며 선교의 새로운 장이 마련된 것입니다.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하나 되는 것은 그동안 불가능한 일로 여겨 지던 일이었고, 절대 해결되지 못할 것 같은 엄청난 문제였습니다. 하지만 예루살렘 회의를 통해 조율이 되었고, 이방인에게 복음이 전해지는 일과 교회가 세워지는 일에 대해 예루살렘 교회가 공식적으로 승인하는 방향으로 정리가 된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제 이방인을 향한 선교의 문이 활짝 열렸다고 생각하며 앞으로 거칠 것 없이 이방인 선교가 이어질 것이라고 예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2차 선교여행을 앞두고 뜻밖의 장애물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1차 선교여행 당시 구브로 섬에서 버가에 이르렀을 때 선교 팀원 중 한 사람이었던 '마가'가 팀을 이탈하여 예루살렘으로 돌아간 일이 있었습니다.(행14:13) 2차 선교여행을 떠나며 바나바는 '마가'를 참여시키고자 하였지만, 바울은 반대를 하였습니다. 문제의 크기로만 보면 앞서 예루살렘 회의 주제였던 유대인과 이방인의 문제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작은 일이었지만, 이 문제는 잘 조율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냥 약간의 의견 대립이 일어난 정도가 아니라 절대 끊어지지 않을 것 같은 두 사람, 서로에게 없어서는 안 될 존재로 생각되었던 바울과 바나바가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설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두 사람 중에 어느 누군가에게 큰 잘못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저 주어진 상황을 받아들이는 해석이 달랐으며, 의견이 달랐을 뿐입니다. ‘마가’는 바나바의 조카였습니다. 그런데 바나바가 그렇게까지 고집을 피운 것은 단순히 조카였기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바나바는 우리가 잘 알고 있듯 위로의 사람이었고, 사랑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아마도 마가를 위로하고 격려하여 지난번의 실패를 만회할 수 있도록 돕고 싶었을지도 모릅니다. 아마 마가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을지라도 바나바는 충분히 지금과 같은 결정을 했을 것입니다.
바울의 입장을 이해하기 어려운 것도 아닙니다. 선교 여행은 쉽지 않습니다. 마가는 그 여정을 힘들어했고, 견디지 못해 팀을 이탈하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런데 마가가 팀을 이탈한 후 이고니온과 루스드라, 더베에 이르기까지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엄청난 고난이 이어졌었습니다. 쫓겨나기도 하고, 도망치기도 하고, 죽을뻔한 위기도 넘겼습니다. 바울의 생각에 1차 선교여행에서 약한 모습을 보였던 '마가'가 2차 선교여행에서 그와 같은 고난을 겪게 된다면 잘 감당할 수 있을지에 대해 의문이 생겼을 것입니다.
바나바는 마가가 걱정되어 함께 하려고 한 것이며, 바울은 마가가 걱정되어 두고 가려고 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을 하십니까? 사실 우리에게도 이와 같은 일이 주어진다면 우리 안에서도 다양한 의견들이 나올 수 있고, 마음을 하나로 모으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이런 생각은 정말 조율하기가 어렵습니다. 옳고 그름의 문제도 아니고, 또 어느 것이 더 낫다고 하기도 애매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서로 양보할 수 없었던 그들은 각자의 입장을 고수하며 갈라서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원래 바나바와 함께 1차 선교여행 때 세워진 교회들을 다시 돌아보려고 하였습니다.(행15:36) 하지만 마가의 문제로 바나바와는 갈라서게 되었고, 바나바는 마가와 함께 구브로 섬으로 떠났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원래의 계획대로 일을 행하려고 하였습니다. 이번에는 ‘실라’라는 사람과 함께하게 되었습니다. 선교의 준비 과정에서 삐그덕 거리는 일이 발생하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일이 실패의 결과로 이어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 둘의 갈라섬은 더 멋진 모습으로 선교가 이어질 수 있는 소중한 기회가 되었습니다. 이런 표현이 맞을지 모르겠지만 선교팀은 두 팀으로 확장 되어졌고, 멋진 선교의 동역자들도 더해졌습니다.
이제 2차 선교여행을 떠난 바울 일행은 수리아와 길리기아를 지나며 교회를 견고하게 하였습니다.(41절) 수리아와 길리기아에는 교회가 언제 세워졌는지 명확하지는 않지만, 바울은 지나가는 길에 있던 교회를 그냥 둘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1차 선교여행지에 들렸던 더베와 루스드라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루스드라가 어떤 곳인지 기억나십니까? 나면서 걷지 못하던 앉은뱅이를 치유한 사건으로 인해 바나바와 바울이 제우스와 헤르메스로 추앙받게 된 곳입니다. 두 사람은 그것을 합당하게 여기지 않았으며 완강하게 거절하였습니다. 바울은 자신들에게 그런 일을 행하는 무리를 향해 옷을 찢고 무리 가운데 뛰어 들어가서 하나님에 대해서, 복음에 대해서 전하였었습니다. 보통은 이런 일이 있으면 ‘허다한 무리들이 바울의 말을 믿고 하나님께 돌아와 주를 찬미하였고, 구원받는 자가 날마다 더하여졌더라’는 반응으로 이어져야 했겠지만, 루스드라에서는 전혀 의외의 결과가 이어졌습니다.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그들을 추격해 온 유대인들이 있었는데, 그들이 돌로 바울을 친 것이었습니다. 아마도 바울은 돌을 맞고 기절을 한 것 같습니다. 바울이 죽었다고 생각한 유대인들은 그를 성 밖으로 던져버렸습니다. 신적인 존재로 추앙받다가 시체처럼 여김을 당하여 버려진 곳, 루스드라는 바울에게 그런 곳이었습니다. 돌에 맞아 쓰러졌던 바울은 얼마 후 정신을 차리게 되었는데, 비교적 안전하다고 생각할 수 있는 고향 다소로 향하지 않고, 왔던 길을 되돌아 가기를 선택합니다.
그 경로에는 얼마전 자신이 죽을뻔한 루스드라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곳에 가야만 하는 분명한 목적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루스드라, 이고니온, 안디옥으로 돌아가며 그곳에 있던 제자들과 교회에게 이런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사도행전 14장 22절입니다.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행14:22) 복음을 전하여 사람들 앞에서 보여진 바울의 모습은 고난을 당하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에게 그 모습이 마지막으로 기억된다면 어땠을까요? 그동안 바울이 전한 복음보다 바울의 고난이 더 뚜렷하게 기억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1차 선교여행을 마무리하며 자신의 고난을 마지막으로 기억하고 있는 교회를 다시 찾아가 그들의 믿음을 지켜주고, 고난의 의미에 대해서 알려준 것입니다.
바울은 2차 선교여행에 원래 계획했던 대로 1차 선교여행에서 방문했던 지역을 돌아봅니다.(1절) 먼저 더베와 루스드라에 이르렀습니다. 시간이 지났다 하더라도 죽을 뻔했던 곳인데, 그곳을 다시 가는 일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복음을 전했고, 자신이 전한 복음으로 제자들이 세워졌고, 교회가 세워졌기에 마땅히 돌아봐야 하는 곳이기도 했습니다. 바울은 그곳에서 디모데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디모데는 바울에게 있어 평생의 동역자였으며, 영적인 아들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특별한 사람이었습니다. 성경은 디모데에 대해서 특별한 설명을 덧붙이는데, 일단 그가 제자였다는 것이고, 루스드라와 이고니온에 있는 형제들에게 칭찬받는 자였다고 합니다.(2절)
바울은 디모데를 자신의 사역에 참여시키려고 하였는데, 특별한 일을 행합니다. 우리 3절 말씀 같이 읽겠습니다. “바울이 그를 데리고 떠나고자 할새 그 지역에 있는 유대인으로 말미암아 그를 데려다가 할례를 행하니 이는 그 사람들이 그의 아버지는 헬라인인 줄 다 앎이러라”(행16:3) 바로 앞 예루살렘 회의에서 율법과 할례가 구원의 필수조건은 아니라는 결론이 내려졌습니다. 하지만 그런 결론이 내려졌음에도 불구하고 디모데에게 할례를 행하게 한 이유는 디모데의 구원을 확증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유대인에게 할례는 태어난지 8일이 되는 날 유대인으로서의 정체성과 소속감을 몸에 새기는 징표 같은 것으로 매우 특별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디모데는 유대인이기는 하였지만 ‘루스드라’라는 이방 지역에 살고 있었고, 아버지가 헬라인, 즉 이방인이었기에 할례를 받지 않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한 목사님의 표현을 빌려보면 할례를 받지 않은 유대인은 ‘동그란 삼각형’이라는 말처럼 허용될 수 없는 것이라고 하는데, 지금의 디모데는 루스드라와 이고니온에 있는 형제들에게 칭찬을 받은 것처럼 이방인에게는 큰 문제가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에게는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바울은 디모데와 동행하기로 결정하며, 앞으로 디모데가 선교를 통해 만나게 되는 다양한 환경들 속에서 특별히 유대인들로부터 공격을 받거나 유대인들과의 교류 속에서 장애가 될 수 있는 조건을 제거하였습니다. 특별히 유대인들을 만나게 되었을 때 문제가 발생하지 않도록 할례를 행함으로 기본적인 조치를 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바울은 2차 선교여행의 계획을 세우기는 하였지만, 그 일이 계획대로 이루어지지는 않았습니다. 우리의 인생에도 바울처럼 예상치 못한 일들이 일어나며 계획이 틀어지게 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좋지 않은 결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바울은 바나바와 갈라서게 되었지만, 훌륭한 동역자인 ‘실라’와 함께하게 되었고, 루스드라에서는 ‘디모데’라는 동역자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바울의 계획과는 달랐지만, 특별함으로 채워질 수 있는 소중한 사람들을 만남으로 멋진 선교의 일이 이어질 수 있도록 인도해 주셨습니다.
또한 바울은 선교여행 속에서 지켜야 할 것들을 철저하게 지켰습니다. 아담과 하와 그리고 가인의 문제는 그들 스스로가 하나님처럼 되려 한 교만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달랐습니다. 그는 철저하게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로서 하나님의 뜻을 따르며 선교의 일을 감당했고, 디모데에게 할례를 행한 것과 같이 사회 속에서 서로를 배려하며 지켜야 할 것들도 잘 지켜갔으며, 이방 교회에 예루살렘 회의를 통해 내려진 결론을 지키게 함으로 교회가 정한 규칙도 잘 따랐습니다. 이와 같이 신앙의 본질은 내가 세운 계획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걷는 것이며, 내 걸음을 어떻게 인도하시는지를 신뢰하는 것입니다.
선교의 사람이 된다는 것, 선교의 공동체가 된다는 것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계획을 세운다 하더라도 내가 그 일의 주인이 되어서 원하는 결과를 얻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어야 합니다. 허락하신 모든 과정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르며 그 결과를 맡기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른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주어진 상황 속에서 우리가 지켜야 할 것들을 잘 지켜가는 것입니다. 예배 잘 드리고, 말씀을 외우고, 기도하며, 찬양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우리에게 허락하신 공동체 속에서 함께 약속 한 것들을 지켜가고, 우리에게 허락하신 사회 속에서 지켜야 할 것들을 잘 지켜갈 수 있어야 합니다.
‘선교’라는 두 글자가 굉장히 멀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결과를 맡기는 일,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일, 즉,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르는 일은 교회 된 우리에게 가장 기본적인 일입니다. 선교의 사람, 선교의 공동체가 되는 것은 크고 먼 일이 아니라 교회로서 기본적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이라는 말입니다. 바라옵기는 오늘 함께 예배하는 모든 분들이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걸음을 더욱 신뢰하며, 그 인도하심안에서 선교의 사람으로 더욱 온전히 자라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그리하여 함께하는 이들의 믿음을 서로가 더욱 굳건하게 하고, 믿음의 굳건함을 확장시켜 가며, 구원 받는 자가 날마다 더하여 질 수 있도록 은혜의 일을 펼쳐가는 믿음의 공동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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