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려서부터 계명을 잘 지켜 온 한 부자 관원이 있었습니다. 그는 영생을 얻기 위해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계명을 지키라고 말씀하셨는데, 그는 어릴 때부터 계명을 잘 지키며 이미 그렇게 살고 있다는 대답을 하였습니다. 예수께서는 이어서 그에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고 하시며,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 주고, 너는 나를 따르라”(눅 18:22)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는 근심하며 그 자리를 떠났습니다.
부자 관원의 생각에 ‘영생’은 경험과 지식으로 얻게 되는 스펙과 같이 자신의 인생 속에서 얻어지는 부가적인 것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가 종교나 신앙을 생각할 때에도 이처럼 부수적인 것으로 여기며 접근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지만 종교와 신앙은 그렇지 않습니다. 아니 그럴 수가 없습니다. 종교는 우리 인생에서 부가적으로 더해질 수 있는 무엇인가가 아닙니다. 우리의 정체성을 만들어가는 가장 본질적인 요소입니다. 종교는 신앙이라는 말로 표현하듯 우리의 믿음을 움직이기 때문인데, 우리의 믿음은 우리의 인생 전체를 이끌어가는 방향이며 힘이 되는 것입니다.
종종 말씀드리다시피 종교를 가지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은 없습니다. 각자가 믿는 ‘신’이 다를 뿐 사람들은 저마다의 ‘신’을 만들고, 그 ‘신’을 믿고 따르며 삶으로 살아갑니다. 분명한 종교를 가지고, 하나님, 부처님, 알라신을 믿기도 하지만, 종교처럼 느끼지 못한다 하더라도 부와 명예, 권력과 인정 등 각자의 필요로 의해 만들어진 신을 우상으로 삼고, 그것들이 자신의 만족을 채워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와 함께 그것들이 이끌어가는 방향, 그것들을 얻을 수 있는 방향대로 자신의 믿음을 세워 삶을 채워갑니다. 종교의 힘은 바로 그런 것입니다. 어떤 대상이든, 우리가 믿게 되는 ‘신’은 우리의 인생 전체를 이끌어가는 방향이며 힘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체성에 대해서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보다 ‘나는 누구의 것인가?’를 물어보는 것이 더 정확한 질문이며, 오늘 내가 무엇을 위해 나의 시간, 나의 정성, 나의 힘 등을 희생하고 있는지를 살펴보면 됩니다. 오늘 우리는 누구의 말을 듣고, 무엇을 따르는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부자관원의 모습처럼 나에게 필요한 무엇인가를 더하려고 하는 모습이 오늘 우리에게 이어지고 있지는 않습니까?
지난 시간에도 말씀드렸듯이 기독교 신앙의 방향은 내가 잘되기 위해, 나의 소원을 이루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내 욕심으로 채워졌던 모든 자리를 비워 하나님의 뜻으로 채워질 수 있게 하는 것이며,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 일이 진행 되어지지 않는다 하더라도 주어진 결과를 잘 받아들이고 그러한 결과 속에 담아놓으신 의미를 발견할 수 있도록 하나님의 뜻을 신뢰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그 신앙의 방향이 실제 삶에서 어떻게 드러나는지를, 바울의 2차 선교여행을 통해 살펴보려 합니다. 바울은 바나바와 갈라서게 되었지만, 실라와 디모데라는 멋진 동역자와 함께 하게 되었고, 더베와 루스드라, 이고니온을 거쳐가는 첫 여정에서부터 여러 교회가 믿음이 더 굳건해지고 수가 날마다 늘어가는 풍성한 일들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일, 이런 모습이야 말로 그들이 기대하던 모습, 교회가 기대하던 모습, 우리가 기대하던 모습, 즉, 선교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와 같은 일이 계속해서 이어지지는 않았습니다. 풍성하고, 멋진 일들만 이어지면 좋았겠지만, 바울의 선교 여정은 매끄럽게 진행되지 않았습니다. 계획에 없던 일, 생각하지 못한 일, 예상하지 못한 일들을 마주하게 되었고, 박해와는 또 다른 난관을 맞닥뜨리게 되었습니다. 사실 신앙은 모든 일이 잘될 때 드러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 더 분명히 드러나고 적나라하게 밝혀집니다. 오늘은 바로 그런 어려움 속에서 바울이 어떻게 반응하였는지 살펴볼 것입니다.
바라옵기는 오늘 함께 예배하는 우리 모두가 이 내용을 통해 바울의 모습을 살펴보며, 먼저 우리의 신앙은 무엇을 향해 있는지를 살펴보고, 오늘날의 인생을 어떤 모습으로 채우고 있는지도 돌아볼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또한 그와 함께 계획과는 전혀 다른 일들이 펼쳐질 때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를 살펴보며, 모든 상황 속에서 건강하고 온전한 믿음으로 반응할 수 있는 지혜가 더해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바울 일행은 루스드라와 이고니온 등 1차 선교여행에서 지나왔던 지역들을 돌아보았습니다. 아마도 그때 세워진 제자들을 만나고, 교회들을 살피며 위로와 격려로 그들의 믿음을 견고하게 했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제는 그들이 해야 할 일이 하나 더 생겼습니다. 예루살렘 회의를 통해 정해진 규례가 있었고, 바울 일행들은 여러 성을 다니며 그 규례들을 주어 지키게 하였습니다. 바울의 선교팀이 감당한 일의 결과를 사도행전의 저자는 이렇게 기록해놓았습니다. 우리 사도행전 16장 5절 말씀 같이 읽겠습니다. "이에 여러 교회가 믿음이 더 굳어지고 수가 날마다 늘어가니라"(행16:5)
2차 선교여행의 시작, 더베와 루스드라에서의 사역에 대해서의 평가는 상당히 긍정적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주의깊게 살펴봐야 할 부분이 하나 있습니다. 지금 바울의 팀은 선교여행을 시작한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 특별한 사건에 대한 기록도 없습니다. 디모데의 할례와 예루살렘 회의에서 결정된 규례를 지키게 한 것이 전부입니다. 그런데 사도행전의 저자는 마치 모든 사역이 마무리 된 듯 급하게 단락을 마무리합니다. 만약 앞으로의 일에도 동일한 결론이 이어졌다면 묶어서 표현을 할만한 내용이지만, 여기서 일단락을 마무리 짓는 것은 앞으로의 분위기가 달라짐을 예고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울 일행은 소아시아로 이동하여 사역을 이어가려고 하였습니다. 바울의 개인적인 감정이나 생각에 의한 판단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지금껏 그래왔듯이 사울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움직이려고 했을 것이고,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기 위해 그렇게 나아가려고 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막으심을 느꼈습니다.(6절) 그들은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무시아 앞에서 다시 북쪽의 비두니아로 향하려고 하였지만 그 역시 예수의 영, 즉, 성령께서 허락하지 않았습니다.(7절)
성경에서의 표현은 ‘못하게 하다.’, ‘허락하지 아니하다.’ 등으로 매끄럽게 표현되어 있기도 하고, 무엇보다 우리와 상관 없는 일처럼 보이기에 별것 아닌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는데, 만약 우리 인생에 이런 일들을 맞닥뜨리게 된다면 어떻겠습니까? ‘성령께서 진급을 못하게 하다’, ‘예수의 영이 합격을 허락하지 아니하다.’ 처럼 말이죠. 이런 일은 스스로가 느끼기에도 또 다른 사람이 보기에도 분명 실패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즉, 지금 성령께서는 바울에게 실패처럼 느낄 수 있는 상황, 또 실패처럼 보일 수밖에 없는 상황을 주신 것입니다.
거기다가 더 큰 문제가 있었는데, 바울은 지금 혼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전에는 바나바가 함께 했었지만, 이제는 바울 홀로 한 팀의 실질적인 리더가 되어 팀을 이끌고 있는 상황입니다. 실라와 디모데라는 동역자가 있기는 하였지만, 그들은 어찌보면 바울만 믿고 따라 나선 자들 아닙니까? 그런데 팀의 리더인 바울이 어디로 가야할지 모른 채 헤매이는 상황이 된 것입니다. Plan A가 안 되고, Plan B로 변경을 했지만 그 역시 진행할 수가 없는 상황이 된 것입니다. 지금 바울의 팀은 길 한복판에서 어디로 가야할지 몰라 방황하며 왔다 갔다하는 그런 상황을 맞이한 것입니다. 막힘없이 일정을 소화해 내는 것이 지도자의 역량이라면, 지금의 바울은 정말로 무능한 리더의 전형적인 모습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바울의 특별함은 여기에서 발견됩니다. 바울은 성령께서 막으시는 곳, 허락하지 않으시는 일을 억지로 하지 않았습니다. 선교는 자신의 뜻을 펼치는 일이 아니라 철저하게 하나님의 일하심을 드러내는 과정이었기에 바울은 자신에게 주어진 지금의 시간, 목적 없이 떠도는 것 같이 방황하는 지금의 시간은 실패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더욱 자신을 맞추어 가는 소중한 시간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이런 과정을 무시할 때가 너무나도 많이 있습니다. 실제로 제가 있었던 사역의 현장에서도 계획과 일정, 성과 중심으로 일하는 경우를 많이 보았습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 ‘이 사역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성령께서 개입하실 여지가 있는가?’라는 의문이 더해질 때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일이라고 하면서도 하나님의 뜻에 귀 기울이기보다는 우리의 지식과 경험을 앞세워 우리의 방식대로 처리할 때가 많이 있고, 너무나도 치밀해진 계획 속에서 성령님께도 틈을 내어드리지 못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누군가가 교회를 회사처럼 느끼는 것은 바로 그러한 일 때문입니다.
하지만 바울의 선교팀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철저한 계획보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모든 것을 맡기고 있었습니다. 길이 막혀도 불평하지 않았고, 방향이 바뀌어도 당황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하나님 앞에서 마치 “말씀만 하십시오. 시키는대로 하겠습니다.”라고 하는 듯 보였습니다. “주님 말씀하시면 내가 나아가리다 주님 뜻이 아니면 내가 멈춰서리다"라는 찬양의 가사처럼 바울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라면 어떤 말씀이라도 반응할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하라는 것을 하고, 하지 말라는 것을 하지 않는 가장 기본적인 원리를 지켜가며 단순해졌고, 그 단순함은 바울과 선교팀을 더욱 자유롭게 했습니다. 계획대로 되지는 않았지만 잘 되어도 또 생각처럼 되지 않아도 하나님이 책임지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기에 불편함도 부담도 없었을 것입니다.
모든 것이 막힌 것 같이 답답한 상황 속에서 하나님은 바울의 선교팀을 새로운 길로 이끄셨습니다. 처음 계획과는 전혀 다른 곳, 바울의 선교팀은 드로아라는 곳에 도착하게 되었습니다.(8절) 본문에서는 간단하게 기록되어 있지만, 드로아에 도착하기까지 쉽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드로아는 안디옥에서 약 500~600km정도 떨어진 곳으로 약 20일 정도를 부지런히 걸어야 도착할 수 있는 곳이었고, 루스드라의 사역을 마치고 출발할 때부터는 약 반년 정도가 소요된 시점입니다.
이곳에서 머무르고 있던 어느 날 밤, 바울은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와달라고 하는 환상을 보게 되었습니다.(9절) 사도행전에서의 '환상'은 단순한 꿈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특별한 메시지를 주시기 위해 사용하시는 특별한 수단입니다. 바울은 직감적으로 그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아시아는 지금의 튀르키예이고, 마게도냐는 지금의 그리스 지역인데, 바울은 ‘아시아’의 땅끝을 계획하고 선교여행을 떠났지만, 하나님께서는 튀르키예를 넘어 그리스로, 아시아를 넘어 유럽으로 그들을 인도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바울의 여정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2차 선교여행은 계획대로 되지 않았고, 길 한복판에서 방향을 잃은 채 방황해야 했습니다. 학자들에 의하면 루스드라를 떠나 브루기아와 갈라디아를 지나 무시아 앞에 이르렀다가 비두니아로 향하려는 여정만 해도 약 1,200km에 달했다고 합니다. 더군다나 그들에게 주어진 더 큰 문제는 목적지가 분명하지 않았다는 것이죠. 하루하루 걸음을 내딛지만,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없는 막막한 시간 속에서 그들은 더욱 힘들었을 것이고, 더욱 피곤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믿음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바울의 선교팀은 멈춰섰지만 낙심하지 않았고, 하나님께서 막으신다면 그 또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 믿었습니다.
우리의 삶에도 바울의 선교팀이 경험했던 무시아의 시간과 비두니아의 막힘과 같은 상황이 주어질 때가 있습니다. 계획이 어긋나고, 방향이 보이지 않으며, 길이 닫히는 순간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때가 바로 우리의 신앙이 더 분명하게 드러나는 시간입니다. 모든 것이 잘될 때는 감춰져 있던 우리의 실체가,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릴 때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화려한 성취의 무대에서는 잘 믿는 것처럼 보여지고, 누군가를 속일 수도 있지만, 아무 것도 붙잡을 수 없는 바닥의 자리에서는 내가 무엇을 의지하고 있었는지에 대한 진짜 믿음이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막막함과 답답함 속에서 누군가는 “왜 닫으셨습니까?” “왜 이렇게 하십니까?”라고 하며 하나님을 원망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향해 참된 신앙을 가진 자들은 “하나님, 그럼 이제 어디로 가야 합니까?”라고 물어보며 하나님의 음성에 더욱 귀 기울입니다. 닫힌 문 앞에서 고집을 피우거나 원망하는 대신, 신실하신 하나님을 의지하며, 내 생각보다 크고 위대한 일을 이루어가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며 그분의 음성에 귀를 기울입니다.
바울의 선교팀이 그러했습니다. 그들은 실패처럼 보이는 길에서도 하나님의 손길을 믿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방해하는 분이 아니라 새 길을 열어주시는 분이심을 신뢰 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계획에는 전혀 없었던 '마게도냐'라는 새로운 문을 열어주셨습니다. 아시아를 넘어 유럽으로, 그들의 생각보다 더 넓은 곳으로 인도하셨으며 복음이 전해지는 새로운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인생에도 막히는 길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의 시작일 때가 있습니다. 닫힌 문은 우리를 멈추게 하지만, 그 멈춤 속에서 하나님은 새 일을 행하십니다. 그분은 우리를 실패의 자리로 이끄시는 것이 아니라, 새 일을 이루어가시는 또 다른 현장으로 우리를 초대하시며, 진짜 신앙을 드러내는 자리로 우리를 부르십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믿음은 모든 것이 잘될 때의 믿음이 아니라, 아무것도 되지 않을 때에도 더욱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는 믿음입니다.
바라옵기는 오늘 함께 예배하는 저와 여러분이 그런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의 삶이 멈춘 것 같은 그 자리에서도 분명 새 일을 준비하시고 이루어 가실 것입니다. 막혀도, 멈춰도, 답이 없어도 불평과 원망, 낙심과 좌절로 인생을 채워가는 것이 아닌 바닥을 치는 그 자리에서도 "하나님, 그럼 이제 어디로 가야 합니까?”라고 물으며, 하나님의 말씀에 더욱 귀 기울임으로 하나님께서 이루어가시는 새일을 더욱 충만하게 경험하는 그런 사람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신뢰하며 믿음으로 주의 길을 걸어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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