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는 함께 지어져가는 공동체입니다. 교회가 함께 지어져 가는 일에 가장 중요한 것은 '목적'입니다. 이 목적을 큰 틀로 정리하면 '하나님 뜻'으로 '하나님 나라'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일이 바로 지난 시간에 나눈 '선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선교는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대상이 온전한 모습으로 성장하며 독립할 수 있도록 아버지의 마음으로 돕는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교회는 함께 하는 이들이 자발적이고 온전한 모습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돕고 섬기는 공동체이며, 그렇게 하나 된 공동체가 또 다른 대상이 하나님 안에서 온전한 모습으로 성장하여 독립할 수 있도록 아버지의 마음으로 돕기 위해 함께 지어져 가는 공동체인 것입니다.
예루살렘교회에는 그 일을 가로막던 자들이 있었습니다. 이방인들의 교회인 안디옥 교회로 가서 '율법'과 '할례'로 대표되는 자신들의 전통을 강요하며, 이방인들 중에도 믿는 자들이 있다면 그 전통을 지켜야 한다고 가르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사도행전 초반에서의 유대인들과 같이 교회와 전혀 반대편에서 교회를 박해하던 자들이 아니었습니다. 회심을 했다고 하며 교회에 들어와 있던 자들이었습니다. 교회의 구성원이었으며, 교회와 함께 하던 자들이었습니다. 즉, 이 문제는 외부에서 발생 된 문제가 아니라 내부에서 발생 된 문제입니다.
이 일을 해결하기 위해 예루살렘 회의가 진행된 것입니다. 교회는 이처럼 서로 다른 사람들이 모여 하나가 된 공동체입니다. 교회로 모여 하나가 된 사람들은 단순히 외적인 모습만 다른 것이 아닙니다. 결혼을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결혼은 쉽게 말하면 남녀가 만나 함께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결혼은 단순히 남성과 여성이 만나는 것이 아닙니다. 각자가 걸어온 인생과 인생이 만나는 것이며, 각자의 세상과 세상이 만나는 것입니다. 교회가 하나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깊이에는 차이가 있겠지만 서로 다른 인생과 세상이 만나는 본질에서는 큰 차이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찰이 생기는 것은 당연한 일이며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정말로 서로를 너무 사랑해서 마찰이 없다면 다행이지만, 결혼한 부부가 "우린 부부싸움 같은거 안 해, 한 집에 있어도 우린 서로 아는 척을 안하거든"이라고 한다면 어떨까요? 싸우지 않는 것이 다행일 수 없는 상황입니다. 그처럼 교회 역시 서로를 너무 경계해서 마찰이 생기지 않는다면 건강한 공동체가 되기를 포기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다투지 않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이와 같은 마찰을 어떻게 조율하여 어떻게 해결해 나가는가입니다. 오늘 우리는 예루살렘회의를 이어서 살펴보며 그 안에서 발생된 마찰들을 어떻게 해결해 나갔는지에 대해서 살펴 볼 것입니다.
바라옵기는 오늘의 이 말씀을 통해 우리 교회도 서로의 생각이 건강하게 부딪히는 교회가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그리고 건강하게 해결해나가는 교회가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더 나아가 교회뿐만이 아니라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환경 속에서도 함께 하는 이들과 건강한 교류를 이어가며 건강한 관계를 세워갈 수 있는 건강한 지혜가 더해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베드로의 설교로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사람들이 하나가 되고, 처음 교회가 세워졌을 때 교회는 멋진 공동체가 되었습니다. 대부분이 유대인들이었기에 문화적 배경, 시대적 배경 등은 일치가 되어 있었고, 마찰이 발생 될 만한 요소들이 많지 않았습니다. 보수적인 유대교 신자들이 핍박을 하였지만, 교회는 오히려 서로를 위하였고, 더욱 굳건한 모습으로 하나가 되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그런 일들을 경험하며 건강한 모습으로 또 아름다운 모습으로 확장되어져 갔습니다. 처음에는 유대 사회 속에서만의 확장이었지만, 흩어짐을 경험하며 복음은 이방인에게까지도 전해졌고, 교회의 확장은 이방인에게까지도 이어졌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일이 있었긴 하지만 유대인 안에서의 확장은 마찰이 지금과 같이 내부적인 문제로 잘 이어지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교회가 이방인에게까지 확장 되어지며 각자가 가진 생각의 차이들이 수면 위로 드러나게 되었고, 이제는 교회의 내부적인 문제로 이어지게 된 것입니다. 교회 안에도 보수적인 생각을 가진 유대인들이 있었는데, 그들 중에는 그들이 지키고 있었던 율법과 할례의 전통이 이방인들에게도 동일하게 이어져야 한다는 생각으로 이방인들을 중심으로 모인 안디옥 교회에 가서 누군가를 가르치는 일로까지 이어지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보수적인 유대인이라 할지라도 그들이 그 일을 행한 목적은 교회를 무너뜨리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들이 가진 경험과 생각에서는 그런 일을 하는 것이 교회를 더욱 건강하게 하는 것이었며, 교회가 더 온전한 공동체로 성장해 가는 일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분명 목적은 순수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놓치고 있던 것이 있었습니다. 교회의 방향성에 대한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를 위해 한 마음 한 뜻으로 연합하는 공동체입니다. 그런데 교회의 연합은 획일화된 모습으로의 하나 됨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결혼을 한 부부에게 ‘남자가 지켜야 할 것’ ‘여자가 지켜야 할 것’ 등 어떤 정답지가 주어져서 꼭 그대로 살아가야만 한다면 결혼 생활이 행복하겠습니까? 결혼 생활이 재미있는 이유는 서로 다른 남녀가 만나 자신도 모르던 자신의 모습을 깨닫게 되며 그동안 생각하지 못하던 부분에서의 성장을 가져다 주기 때문입니다.
교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는 모이는 순간 똑같은 모습으로 만들어져야 되는 곳은 아닙니다. 서로를 위해 특별히 지켜야 하는 부분들이 있기 때문에 획일화 되는 것처럼 느껴지는 일도 존재하지만 각자의 고유함을 간직한 채 넉넉하게 서로를 품으며 하나 되는 공동체가 바로 교회입니다. 그런데 안디옥 교회에서는 이 방향을 놓치는 일이 발생한 것입니다. 바리새파 유대인들 중 어떤 사람들이 그들의 지식과 경험, 전통성 안에 교회를 넣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이 일로 인해 열리게 된 예루살렘 회의에서 율법과 할례에 대한 두 주장이 엇갈리며 팽팽하게 대립이 되었습니다. 베드로, 바울, 바나바 등은 이방인의 문을 연 하나님을 직접 경험하며 율법과 할례를 뛰어넘어 역사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자리잡은 상태였지만, 예루살렘에 있던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서로는 각자의 주장을 내세우며 다툼과 변론이 이어졌습니다. 한참 이야기가 이어지던 중 베드로가 고넬료를 만난 경험을 언급하며 하나님께서는 이방인에게도 우리에게와 같이 성령의 충만함을 허락하셨음을 이야기하였고, 그것은 율법과 할례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오직 주 예수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었음을 주장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바울과 바나바도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 행하신 ‘표적과 기사’를 언급하였습니다.(12절) 표적과 기사가 이방인에게 이어졌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친히 행하신 일에 대한 증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이방인 선교가 단순히 사람의 어떤 뜻이나 안디옥 교회의 자체적인 뜻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 이루어 가신 일임을 증명하기 위해 증언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참 진행 되었던 토론이 마무리되며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야고보’입니다. 야고보는 예수님의 형제인데, 열 두 사도에 포함되지는 않았지만, 예루살렘 교회 안에서는 굉장히 중요한 역할, 지도자의 역할을 맡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야고보가 예루살렘교회의 지도자로서 이 일을 맡게 된 경위에 대해서는 두 가지 추측이 존재합니다. 먼저 당대에는 대단한 업적을 세운 영웅이 죽게 되면 그 아들이 아버지의 역할을 이어갔다고 하는데, 예수님에게는 자녀가 없었기 때문에 형제 야고보가 예수의 권위를 물려받았을 것이라는 의견이 있고, 예루살렘에 큰 박해가 이어질 때 사도들은 그 자리를 피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때 야고보가 그곳에 남아 교회를 지키며 지도자로 부상했을 것이라는 의견도 있습니다.
아무튼 야고보는 예루살렘 교회에서 존경 받고 있던 지도자였고, 지금의 이 일을 매듭지을 수 있는 중요한 위치에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야고보는 “형제들아 내 말을 들으라”고 하며 발언을 시작합니다.(13절) 모든 내용을 결론짓겠다는 선언입니다. 야고보는 베드로의 주장을 정리하며 베드로가 고넬료를 만난 일은 하나님이 처음으로 이방인 중에서 자기 이름을 위할 백성을 취하시려고 그들을 돌보신 일이었는데, 이것은 단순히 베드로의 주장이 아니라 선지자의 말씀과 일치하는 것이라고 하며 아모스 9장 11~12절의 말씀을 인용합니다.
"그 날에 내가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일으키고 그것들의 틈을 막으며 그 허물어진 것을 일으켜서 옛적과 같이 세우고 그들이에돔의 남은 자와 내 이름으로 일컫는 만국을 기업으로 얻게 하리라 이 일을 행하시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암9:11~12)
우리 16절 17절 말씀 같이 읽겠습니다. “이 후에 내가 돌아와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으며 또 그 허물어진 것을 다시 지어 일으키리니 이는 그 남은 사람들과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모든 이방인들로 주를 찾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행15:16~17) 원문이라고 할 수 있는 아모스 9장 11~12절과는 조금의 차이가 있지만 아마도 당시의 유대인들이 보고 있던 성경의 번역본 중 하나였을 가능성이 크고, 무엇보다 내용의 해석에는 지장을 주지 않는 차이입니다.
간단하게 정리하면 본문에 나온 ‘다윗의 장막’은 메시아 시대에 완성될 성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단순히 혈통적인 다윗의 왕국, 즉, 유대인의 이스라엘이 회복되고 그 안으로 이방인들이 들어오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을 넘어서는 전혀 새로운 나라, 더 완전한 하나님 나라가 이 일로부터 시작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이 가지고 있었던 편협한 사고방식의 결과가 무엇이었습니까? 지금 그들이 함께 믿고 있던 예수를 죽이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일들은 꼭 유대인들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종종 말씀드리는 것처럼 ‘책 한 권 읽은 사람이 제일 무섭다’고 하지 않습니까? 책 한 권 읽은 사람은 그것을 전부로 여기는 사람을 뜻하는 말입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다른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오히려 다른 이야기들은 그 사람에게 틀린 것이 되어버리기도 하죠. 아모스서의 말씀은 유대인들이 이미 알고 있던 말씀이었을 것입니다. 문제는 그들이 이 말씀을 몰랐기 때문이 아니라, 이 말씀을 자기들만의 생각으로 해석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헤르만 헤세의 소설 ‘데미안’을 보면 이런 문장이 나옵니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유대인들은 이제 율법주의, 선민사상 등 자신들만을 중심으로 한 세계를 깨뜨려야 했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 그들이 갇혀 있던 알을 깨고 나와야 했습니다. 더 이상 그들을 중심으로 한 하나님 나라가 아닌 하나님께서 이루어가고자 하시는 진짜 하나님 나라를 향해 그들의 생각을 열어야 했고, 그들의 발걸음을 옮겨야 했습니다.
야고보는 이어서 결론을 내립니다. 우리 19절에서 21절까지 같이 읽겠습니다. “19 그러므로 내 의견에는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들을 괴롭게 하지 말고 20 다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라고 편지하는 것이 옳으니 21 이는 예로부터 각 성에서 모세를 전하는 자가 있어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그 글을 읽음이라 하더라”(행15:19~21)
이것은 어떻게 보면 유대인들의 소송을 기각한 것입니다. 예루살렘회의가 시작 된 이유는 유대인들이 이방인 교회와 이방인 선교에 상실감을 안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 반대가 되었습니다. 그들이 그토록 소중하게 여기던 율법과 할례가 더 이상 쓸모없는 것처럼 야고보를 통해 결론이 내려졌습니다. 그런데 야고보는 옳고 그름으로만 이 문제를 매듭짓지 않았습니다. 서로를 배려하며 합의점을 찾을 수 있는 결론을 내립니다.
야고보는 먼저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 돌아오는 이방인들을 괴롭게 하지 말라고 합니다. 야고보의 판결은 유대인들만을 향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방인들을 향해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라는 권면도 이어갑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 당연히 지켜야 할 것들이기는 하지만 야고보가 이와 같은 권면을 한 이유는 21절에 기록된 내용처럼 유대인들이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율법을 읽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즉, 율법 준수가 구원의 절대적인 길은 아니지만, 율법 준수를 통해 하나님에 대한 자신들의 신앙을 지켜가고 있는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배려하기를 부탁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케스트라를 본 적이 있으십니까? 바이올린, 첼로, 콘트라베이스 등 다양한 악기들이 어우러져 아주 멋진 소리를 냅니다. 저는 교회 공동체가 오케스트라와 같다고 생각합니다. 교회는 서로 다른 삶의 배경과 신앙의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성경이라는 악보를 들고, 지휘자 되신 하나님을 따라, ‘하나님 나라’라는 곡을 연주하는 공동체입니다. 이곳에서는 자신의 소리만 절대적이라고 생각하며 내어서는 안 됩니다. 멋진 연주를 할 수 있는 실력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합주에서 어우러지지 못한 채 자신만을 드러내는 것은 오히려 소음이 될 수 있습니다. 그처럼 내 경험, 내 지식, 내 생각을 절대적인 것이라 생각하며 내세우는 순간 오히려 연주를 망치는 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오케스트라에서 한 곡이 연주될 때 모든 악기가 같은 소리를 내지는 않습니다. 각자의 악기가 정해진 자리에서 자신의 소리를 냅니다. 악기도 다르고, 멜로디도 다르지만, 하나의 곡을 연주할 때는 적절하게 어우러져서 멋진 소리를 냅니다. 그런데 처음부터 아름다운 소리를 낸 것은 아닐 것입니다. 무대에 올라가기 전에는 서로의 소리가 부딪히기도 하고, 여러 가지로 맞지 않아 혼란스러운 순간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의 곡을 연주하기 위해 부서지기도 하고, 깨어지기도 했을 것입니다. 멋진 곡을 연주하게 된 것은 그 과정들을 거쳐온 결과입니다.
다 나누지는 못하였지만, 예루살렘 회의는 정말로 아름답게 마무리됩니다. 서로 다른 의견들이 있었지만, 유대인과 이방인은 운명 공동체, 복음 공동체,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로서 손을 마주 잡으며 하나가 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을 수용할 만큼 성장했고, 이방인은 유대인을 성장할 만큼 성장하였습니다. 또한 유대인과 이방인의 하나 됨을 통하여 주의 몸 된 교회가 성장해갔고, 더욱 성장해 갈 수 있는 새로운 발판을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우리 교회도 이와 같은 모습이 이어질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특정한 누군가의 모습이나 가르침을 따라 획일화되지 않기를 소망합니다. 언제라도 서로 다른 소리를 편안하게 낼 수는 있지만 서로를 위해서라면 자발적으로 배려할 수 있는 공동체가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무엇보다 서로 어우러질 수 있도록, 하나님 안에서 멋진 모습으로 하나 될 수 있도록 하나님의 뜻 안에서 함께 다듬어지는 공동체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또한 저는 우리 교회가 어느 누구라도 포기하지 않는 공동체가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어우러지기 싫어서 소리를 내지 않는다면 당사자도 교회를 통한 성장을 포기하는 것이겠지만, 교회도 그 사람만큼의 성장의 기회를 놓치게 되는 것입니다. 서로 다름은 멀어짐의 기회가 될 수도 있지만 성장의 기회가 될 수도 있습니다. 부딪히게 된다면 깨어질 수도 있지만, 그것은 각자를 새롭게 조율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합니다.
바라옵기는 오늘 함께 예배하는 우리 모두가 편협한 사고방식으로 고집스럽고, 좁아지며, 뾰족해지는 것이 아니라 폭 넓은 사고방식으로 더 많은 것들을 품을 줄 알며, 넓어지고 부드러워질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또한 그런 우리들로 인하여 함께하는 우리 공동체도 예루살렘 회의가 멋지게 마무리 된 것처럼 하나님의 지휘 아래 멋지게 어우러져 허락하신 자리에서 아름다운 소리를 내며 하나님 안에서 위대한 공동체로 성장해 갈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