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강해

<사도행전 강해43>한 영혼(사도행전 16:16~40)

남편, 아빠...그리고 목사 2026. 7. 20. 22:13

  바울 일행은 2차 선교여행에 '마게도냐'의 '빌립보'라는 지역에서 본격적인 선교를 시작했지만 상황은 녹록치 않았습니다. '빌립보'는 철저하게 로마화 된 도시였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사도 바울은 선교의 여정에서 유대인들과의 접촉으로 지역 선교의 문을 열었는데, 빌립보는 유대인 남자가 거의 없는 도시였습니다. 바울일행은 그곳에서 지내던 중 안식일을 맞이하게 되었고, 유대인 남자가 없어서 회당을 구성할 수 없던 지역이었기에 기도할 곳을 찾아 강 가로 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찾아간 강가 기도처에는 지역 여성들이 기도하기 위해 모여있었습니다. 회당이 없던 곳이었기에 아마도 신앙을 지키려고 힘쓰던 소수의 여인들이 모여있었을 것입니다.

 

  바울은 그곳에서 여인들에게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그 말씀은 '루디아'라고 하는 여인에게 특별하게 심어졌습니다. 하나님은 여인의 마음을 움직이셨고, 이 여인의 자신의 인생 전체가 뒤집어지는 경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루디아의 회심은 가족에게까지 이어졌습니다. 이것은 가장 가까이에 있는 가족에게까지 인정받을만큼 진정성 있는 회심이었다는 것이고, 가족에게까지 영향을 미칠만큼 큰 변화였다는 것입니다. 루디아와 그녀의 가족은 바울 일행을 자신들의 집으로 초대하였습니다. 단순히 한끼의 식사에 초대하거나, 하룻밤 잠잘 곳을 제공해 주는 초대가 아니었습니다. 빌립보에서 사역하는 동안 자신의 집을 선교 본부로 사용해달라는 초대이며 요청이었습니다. 이렇듯 루디아는 회심을 통해 자신의 전부를 내어놓았습니다. 바울이 전한 메시지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전해 듣게 되었고, 예수를 그리스도로 받아들이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루디아는 하나님의 엄청난 사랑을 깨닫고, 위대한 복음을 경험하며 자신의 소유에 대한 주권을 겸손히 또 온전히 주님께 내어드렸습니다. 자신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으로 사용 될 수 있도록 자발적인 기쁨으로 양도한 것입니다. 빌립보에서 바울은 엄청난 능력을 뽐내며, 거대한 사역을 행하지 않았습니다. 대형 집회를 통해 단번에 도시를 뒤집어 놓으려고 하지도 않았고, 사람들이 깜짝 놀랄만한 기적을 행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만나게 된 한 사람, 눈 앞에 있는 한 사람에게 집중하였고, 그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뿐이었습니다.

 

  1차 선교여행 지역을 돌아다닌 후 빌립보에 올 때까지 얼마나의 시간이 흘렀는지 잘 모릅니다. 하지만 오기 전에 길을 잃고 방황한 날들, 드로아에서 지내며 환상을 본 일도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흘렀을 것이고, 빌립보에서 루디아를 만난 것도 도착하자마자 바로 있었던 일은 아닐 것입니다. 루디아를 만날 때까지 어림잡아도 몇 개월 정도의 시간은 흘렀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즉, 여기 저기 돌아다니다가 드로아로 가서 빌립보로 건너와서 루디아를 만나기 전까지는 이렇다 할 사역의 기록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걸음을 옮기며, 환상을 따라 마게도냐까지 왔는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바울은 급해지지 않았습니다. 선교의 초심을 잃지 않았고, 선교의 본질을 잃지 않았습니다. 묵묵히 한 걸음씩 걸어갔고, 그렇게 걸아가는 가운데 루디아를 만나며 빌립보 선교의 물꼬를 트게 된 것입니다. 옛말에 천리길도 한 걸음부터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처럼 모든 일은 한 걸음부터입니다. 한걸음씩 묵묵히 가다보면 좋은 사람을 만나기도 하고, 좋은 기회를 만나기도 합니다. 계속해서 바울의 사역을 살펴보는 가운데 한 걸음, 그리고 한 영혼의 귀함을 깨달을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크게, 화려하게, 멋지게 나아가는 어떤 일을 추구하는 것이 아닌 어제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간 오늘, 오늘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기를 꿈꾸는 거룩한 지혜가 더해지길 소망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빌립보에서 만나게 된 또 한 명의 여인이 등장합니다. 먼저 만난 루디아는 빌립보에서의 첫 회심자가 되어 바울과 선교팀을 든든하게 지원해주었지만, 오늘 본문에서의 여인은 그 반대입니다. 빌립보 선교의 첫 훼방꾼으로 마주하게 되었고, 이 여인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먼저 16절 말씀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곳에 가다가 점치는 귀신 들린 여종 하나를 만나니 점으로 그 주인들에게 큰 이익을 주는 자라"(행16:16)

 

  여기 점치는 귀신은 직역하면 '퓌톤의 영'입니다. 퓌톤은 아폴로 신전에서 신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신탁의 뱀이나 용을 가리킵니다. 당시 사람들은 퓌톤이 신의 말을 전달한다고 생각하였는데 이 귀신이 들어와서 이 여종을 통해 점을 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 여종은 점을 쳐서 사람들의 앞날을 맞히고 많은 돈을 벌었지만, 그녀의 수익금은 주인들에 의해 착취되었습니다.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주인이 번다는 말처럼 그녀의 능력을 이용하여 돈을 버는 어떤 주인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앞 부분에서는 새로운 주인을 만나 자신의 재산을 자발적으로 내어놓게 된 여인 루디아를 소개하며, 지금 본문에서는 주인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약탈당하는 모습이 이어집니다. 누가는 똑같이 주인을 위해 자신의 것을 내어놓지만 상반되는 두 여인의 모습을 대조하며 이야기를 펼쳐갑니다.

 

  그런데 이 여인이 어느날 바울 일행을 따라와서는 이렇게 소리쳤습니다. 17절 말씀 같이 읽겠습니다.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라"(행16:17) 얼핏 보면 틀린 말이 하나도 없습니다. 어떻게 보면 바로 앞에서 만났던 루디아처럼 이 여인도 회심한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들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내용을 조금 더 깊이 살펴보면 제대로 된 내용은 하나도 없습니다. 먼저 그녀가 말한 '지극히 높은 하나님'은 여호와 하나님이 아니라 '하늘의 신 제우스'를 상징하는 말입니다. 또한 '종', '구원'이라는 표현 역시 마게도냐 사람들이 이해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즉, 17절 말씀을 의역하면 '이 사람들은 제우스가 보낸 사람으로 이 땅에서의 어려움으로부터 해방 될 수 있는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라'는 내용입니다.

 

  이 여인의 만행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18절을 보면 '이같이 여러 날을' 했다고 합니다. 바울은 귀신을 쫓아낼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귀신을 쫓아내매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낼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여러날 동안 당하기만 했습니다. 아마도 여종의 주인들과의 갈등을 피하기 위해서였을 것입니다. 얼마나 오랜 시간 참았는지 알 수는 없지만, 성경은 여러 날 이와 같은 일이 이어졌다고 하며 바울이 심히 괴로워하였다고 합니다. 아마도 정황상 이 여인에 대한 안타까움이 바울을 괴롭게 한 것 같습니다. 여러 날을 참던 바울은 결국 그 귀신을 쫓아내었습니다. 그러자 이 여종의 주인들이 난리가 났습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자신들의 밥그릇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이 여인은 주인들에게 존중받아야 할 인격이 아니라 이용해야 할 대상이며, 돈벌이 수단과 도구에 불과했습니다.

 

  바울은 이 여인에게 회복을 주기 위해서 귀신을 쫓아내었지만, 주인들이 본 것은 여인의 회복이 아니라 수익의 소망이 끊어지는 것을 보았습니다.(19절) 마가복음에는 예수께서 귀신을 쫓아내신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갈릴리호수 근처 ‘거라사’라는 지역에 도착했을 때 한 사람이 무덤 사이에서 달려 나와 예수님을 맞았습니다. 이 사람은 심각한 병자였습니다. 그는 밤낮으로 무덤 사이나 산속에 살면서 소리를 질러대고 돌로 자기 몸을 자해하며 살았습니다. 사람들이 쇠고랑으로 묶어두려고 했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이 사람을 지배하고 있던 것은 ‘군대’라는 이름을 가진 귀신이었습니다. 이 ‘군대’라는 말은 로마의 여단 규모 부대를 지칭하는 말입니다. 쉽게 말해 엄청 많은 수의 귀신이 그 사람을 지배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그 사람 안에 있던 귀신을 쫓아내었습니다. 그런데 그 귀신들은 근처에 있던 돼지 떼에게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귀신들의 규모가 군대였고, 약 2천 마리의 돼지에게 들어갔다는 것입니다. 그 돼지들은 바다를 향해 달려가 몰살하였습니다. 귀신을 쫓아내자 심각한 병자였던 사람은 온전해졌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를 낫게 하신 예수를 마을에서 쫓아내었습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한 사람의 회복이 아니라 그들에게 먹을 것과 돈을 가져다주는 돼지였습니다. 그들의 눈에 보이는 예수는 한 사람의 인생을 회복한 구원자가 아니라 그 마을에 경제적으로 타격을 안겨 준 방해꾼일 뿐이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거라사 지방이나 빌립보에서만 보여지는 모습이 아닙니다.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하다고는 하지만, 돈과 재물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이용할 수 있고, 돈과 재물에 손해가 된다면 얼마든지 포기할 수 있는 것 같은 인간의 보편적인 모습이며, 오늘 날 이 시대의 모습이자 이 시대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돈벌이 수단을 잃어버린 주인들은 바울과 실라를 붙잡아 장터로 끌고 갔습니다. 그리고 거짓으로 고소하고 여론을 왜곡하여 빌립보 감옥에 수감되게 만듭니다. 20~21절 같이 읽겠습니다. “이 사람들이 유대인인데 우리 성을 심히 요란하게 하여 로마 사람인 우리가 받지도 못하고 행치도 못할 풍속을 전한다 하거늘” 여종의 주인들은 그들이 진짜 귀신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굉장히 간교합니다. 이들이 지금 화가 난 이유는 반복해서 언급하듯 돈벌이 수단이 없어져서였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고발하는 내용을 보십시오. 마치 애국심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처럼 정치적으로 고소합니다.

 

  지금 바울이 한 일은 귀신들린 여인에게 새로운 인생을 허락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 주인들은 바울과 실라에게 로마를 부정하는 사람, 로마의 정체성을 뒤 엎는 사람으로 고발을 한 것입니다. 당시 로마의 황제는 클라우디우스였는데, 로마 종교의 회복을 위해 유대인들을 추방 계획을 세우고 있었습니다. 여종의 주인들은 아마도 이런 상황을 이용하여 바울과 실라를 고발하였을 것입니다. 이들의 고발로 인해 바울과 실라는 한 순간에 로마를 어지럽게 하는 사람들이 되어 매를 맞고 옥에 갖히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빌립보에서 바울 선교팀이 경험한 두 가지 사건은 우리에게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먼저 루디아는 하나님을 만난 기쁨 속에서 자신의 소유를 자발적으로 내어놓았습니다. 복음을 위해, 또 다른 사람을 살리기 위해, 하나님의 뜻을 위해 사용되기를 기뻐했습니다. 생명에 심어진 복음은 생명의 일이 이어지도록 생명의 원리로 나타났습니다. 반면 점치는 여종을 통해 나타난 일은 반대였습니다. 여종의 주인들은 자신의 만족과 유익을 위해 사람을 이용했습니다. 한 사람의 인생과 인격을 짓밟아 자신들의 이익을 챙기려고 했습니다. 이것은 이 땅에서 나타나는 하나님 나라의 원리와 인간의 죄로 만들어지는 경쟁 사회의 차이이기도 합니다.

 

  오늘 이 본문은 우리에게 너희는 어떤 나라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가? 어떤 나라의 원리대로 살아가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오늘 우리는 사람을 살리고 세우는 나라를 꿈꾸며 누군가의 회복을 위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면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꿈꾸며 하나님 나라를 살아가는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반면 성공을 위해,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누군가를 밟고 올라서는 것도 아무렇지 않게 여기며 손해와 불편을 실패라고 여기며 조금도 감수하려 하지 않고 있다면 인간의 죄로 만들어진 경쟁 사회를 살아가는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살아간다는 것은 결과를 중요시하는 세상의 원리와 극명한 차이를 보입니다. 복음이 루디아에게 전해졌을 때, 루디아는 하나님 나라를 꿈꾸며 하나님 나라의 원리대로 새로운 삶을 이어갔습니다. 하지만 점치는 여종에게 전해졌을 때는 전혀 다른 결과가 이어졌습니다. 여종의 주인들은 극대노를 하며 바울과 실라를 고발하였고, 바울과 실라는 매질을 당하고 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복음을 전하다가 주어지는 결과에 바울은 크게 연연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에게 중요한 것은 ‘어떤 결과가 주어졌는가?’가 아니라 주어진 상황 속에서 ‘어떤 순종을 하였는가?’였습니다.

 

  루디아의 회심으로 든든한 지원군이 생긴 것은 물론 큰 기쁨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점치는 여종에게 귀신을 떠나가게 한 후 매질을 당하고 옥에 갇히는 일이 낙심과 절망으로 이어진 것은 아닙니다. 바울에게 중요한 것은 루디아나 여종이 회복의 삶, 생명의 삶을 살게 되었다는 것이지 그에 따른 결과가 아니었습니다. 바울의 믿음은 옥에 갇힌 후에도 동일하게 이어집니다.

 

(25~27절)옥에 갇힌 바울과 실라는 한밤중에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였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지게 되었습니다. 간수가 자다가 깨서 보니 옥문들이 열려 있었는데, 죄수들이 도망한 줄 생각하고 자결하려고 하였습니다. 로마법에서 죄수를 도망하게 한 간수는 그 죄수가 받은 형량만큼 벌을 받게 되어 있었는데, 바울과 실라는 아마도 사형에 처할만큼의 형벌을 받았을 것이고, 간수는 사형의 형량을 스스로 감당하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에도 바울은 그 간수의 생명을 위해 소리를 질렀습니다.(28절) 그리고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를 묻는 간수와 그 집에 있는 사람들에게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31절)는 복음을 전해주었습니다. 바울을 통해 복음을 전해듣게 된 간수와 온 가족은 하나님을 믿으므로 크게 기뻐하였고, 침례를 받기도 하였습니다. 간수와 그의 가정에도 구원의 삶, 회복의 삶, 생명의 삶이 시작 된 것입니다.

 

  바울은 빌립보에서 루디아라는 한 여인이 회심할 수 있도록 도왔으며, 점치는 여종에게는 귀신이 떠나가게 하였습니다. 여종의 일로 옥에 갇혔기도 하였지만 옥에서도 바울의 선교는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곳에서도 간수와 그의 가정이 회복의 삶을 펼쳐갈 수 있도록 구원의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어떠한 조건과 환경도 바울의 선교를 멈출 수 없었고, 바울을 통해 전해지는 생명의 복음은 어디서나 능력으로 전해졌습니다. 예수님의 걸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께서는 결과에 연연하지 않았습니다. 한 영혼이 회복되는 것, 한 영혼이 살아나는 것이 예수님에게 가장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바라옵기는 오늘 함께 예배하는 우리도 예수님과 같이, 바울과 같이 거룩한 선교의 여정을 이어갈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우리가 원하는 세상적인 결과에 연연하기보다는 주어진 상황 속에서, 주어진 환경 속에서, 주어진 관계 속에서 한 영혼의 회복을 더욱 소중하게 여기며 살리는 인생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우리의 마음, 우리의 손짓, 우리의 걸음이 한 영혼을 향한 거룩한 빛이 되어, 거룩한 생명의 하나님 나라를 세워가는 믿음의 사람들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