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살로니가에서 바울 일행은 도망치듯 그 도시를 떠나야 했습니다. 회당의 유대인들로 인해 큰 박해를 겪었지만, 바울은 낙심하거나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런 유대인들이야말로 자신이 복음을 전해야 할 가장 중요한 대상이라고 여긴 듯, 바울은 베뢰아에 이르러서도 가장 먼저 회당을 찾았고, 그곳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베뢰아의 사람들은 데살로니가 사람들과 달랐습니다.(행17:11)성경은 그들을 “너그러운 사람들”이라고 소개합니다. 그들은 바울의 말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거부하지도 않았습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그것이 과연 그러한지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결과 헬라인 귀부인과 남자를 포함하여 많은 사람들이 믿음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평안은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데살로니가에서 바울을 쫓던 유대인들이 이 소식을 듣고 베뢰아까지 따라왔습니다. 결국 베뢰아의 성도들은 바울을 보호하기 위해 그를 떠나보내야 했고, 바울은 아덴으로 향하는 배에 몸을 실었습니다. 약 400킬로미터, 결코 짧지 않은 거리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실라와 디모데는 베뢰아에 남고, 바울은 홀로 먼 길을 떠나게 됩니다.
왜 바울은 혼자 떠나야 했는지, 왜 하필 아덴이었는지는 성경은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상황이 정리되면 다시 합류하려 했을 수도 있고, 새로운 선교의 길을 염두에 두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한 가지는, 지금 바울 앞에 펼쳐진 이 장면이 바울 자신도 예상하지 못했던 전혀 새로운 상황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이 장면은 창세기 12장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본토와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났던 아브라함의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인간적으로 의지하던 모든 것이 끊어지고, 오직 하나님만 의지해야 하는 자리. 바울 역시 실라와 디모데라는 동역자를 뒤로하고 홀로 길을 떠나며, 더욱 철저히 하나님만 붙들 수밖에 없는 자리에 서게 된 것입니다.
오늘은 바울이 홀로 도착한 아덴에서의 사역을 함께 살펴볼 것입니다. 이 말씀을 살펴보는 가운데, 우리는 바울이 어떤 마음으로, 어떤 시선으로, 그리고 어떤 방식으로 복음을 전하게 되는지를 함께 살펴보며 그리스도인의 삶, 믿는 자의 삶, 선교적 삶이 무엇인지를 돌아볼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그리고 그와 함께 아덴의 모습을 살펴보며 우리에게는 그와 같은 문제점이 없는지를 겸손한 마음으로 돌아보는 은혜의 시간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바울이 새롭게 찾게 된 '아덴'은 지금의 그리스의 수도인 '아테네'입니다. 아테네는 기원전 5세기 중반 페르시아의 침공을 막으며 최고의 황금기를 맞이하게 되었는데, 이 무렵 성숙한 민주주의가 자리잡고 있었고, 파르테논 신전이 세워졌으며,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로 이어지는 철학의 본산지였으며, 문화와 예술이 발달한 사실상 서구 문명의 발상지였습니다. 하지만 바울이 이곳에 도착할 때는 그런 황금기가 지나가고, 아덴은 로마제국의 변방 정도로 전락한지 오래였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것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아덴은 여전히 수천년의 역사를 간직한 흔적이 남아있었고, 지식과 문화의 중심지였습니다.
바울은 이곳에서 먼저 두 동역자인 실라와 디모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어딘가에 가만히 서서 기다렸다기 보다는 눈에 띄는 특별한 사역을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아마도 이곳 저곳을 다니며 도시의 모습들을 보았을 것입니다. 바울의 눈에 들어온 장면들은 너무나도 새로웠습니다. 언덕에 자리잡은 거대한 아크로폴리스를 비롯해 아테나 여신을 숭배하기 위해 세운 파르테논 신전이 보였고, 가는 곳마다 수많은 신전들과 제단들이 있었습니다. 당시 아덴에 어떤 것들이 있었는지 제가 자료들을 찾아보았는데 잠깐 열거를 해보면,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에게 바쳐진 아우구스투스 신전, 전쟁의 신 아레스를 위한 아크로폴리스, 농업과 결혼의 신 데메테르 신전, 술, 포도, 풍요, 황홀경의 신인 디오니스소스를 위한 디오니스소스 신전, 올림피아 제우스 신전, 포세이돈 신전, 아폴로 신전, 헤파이스토스 신전 등이 있었고, 제우스, 아폴로, 헤르메스 등의 신상은 가는 곳마다 기다리고 있었다고 합니다. 이 도시에는 그 나라 나머지 지역의 모든 신들을 합친 것보다 많았다고 하는데, 우스개 소리로 사람보다 신을 보는 것이 더 쉽다는 이야기가 들릴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참 이상하지 않습니까? 아덴은 분명 엄청난 지성의 도시, 예술의 도시, 문명의 도시인데 동시에 우상숭배가 만연한 도시였다고 합니다. 바울은 아마도 어린 시절부터 헬라 문화에 대한 교육도 받았을 것이고, 헬라의 철학에 대한 이야기도 많이 들었을 것입니다. 바울에게 아덴이라는 도시는 특별한 기대감을 갖게 한 도시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곳에서 바울의 눈에 먼저 보이게 된 것은 지성과 문명, 철학과 수사학 같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온 성을 가득 채우고 있던 '우상숭배'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허락하신 특별한 지성이 자신의 배를 불리고자 하는 우상숭배로 전락한 모습을 보고 바울은 격분하였습니다. 종교는 결핍에 대한 반응이라고 할 수 있는데, 아덴의 사람들은 도대체 무엇에 그렇게 결핍을 느끼며, 무엇을 채우고자 하였을까요? 힘, 사랑, 풍요, 지혜 등 아덴의 사람은 모든 것에 결핍을 느끼며, 그것을 채워줄 수 있을 것 같은 대상을 만들어가며 우상숭배를 했습니다. 바울은 그들의 우상숭배를 보며 어리석음도 보았겠지만, 그들의 마음에 자리잡고 있던 공허와 불안 등의 결핍도 보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의 격분은 분노에 의한 것이라기보다 안타까움에 의한 것이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았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공허함을 채워주신, 자신의 불안을 해결해주신 유일한 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17절)안식일에는 회당에서 전하였고, 평일에는 날마다 장터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전하였습니다. 그곳 사람들은 바울의 이야기를 귀담아 들었습니다. 하지만 베뢰아에서처럼 너그러운 마음으로 들은 것도 아니었고, 겸손하게 들은 것도 아니었으며, 그러한가하여 성경을 상고한 것도 아닙니다. 바울의 이야기는 그들에게 그저 새로운 사상, 새로운 철학에 대한 이야기였을 뿐입니다. 18절을 보면 당대 철학의 대표 학파라고 할 수 있는 에피쿠로스 학파와 스토아 학파가 나옵니다. 에피쿠로스 학파는 고통이 없는 평안한 삶을 최고의 가치로 삼았고, 신은 인간의 삶에 관여하지 않는다고 믿었습니다. 쉽게 말해 "인생은 한 번 뿐, 고통 없이 편안하게, 즐겁게 살자"는 생각이 그들의 철학이었습니다.
반면 스토아 학파는 세상은 이미 정해진 질서대로 흘러가니 담담하게 받아들이며 살아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스토아 학파는 자신들의 철학을 개가 마차에 끌려가는 모습으로 비유하기도 했습니다. '개'라고 하는 인생이 세상이라는 마차에 묶여 있다고 생각을 해보십시오. 마차가 움직일 때 어떤 개는 마지 못해 질질 끌려갈 수도 있지만, 어떤 개는 순응하며 자발적으로 따라갈 수도 있을 것입니다. 즉, 주어진 인생을 거스르지 말고, 순응하며 잘 따라가야 편안하게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철학입니다.
어떤 사람은 바울을 '말쟁이'로 생각했습니다. 어디서 잡다한 지식을 끌어모아 떠들고 다니는 허풍쟁이라는 뜻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바울이 예수와 부활을 전하여 이방 신들을 전하는 사람으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철학을 기준으로 바울의 이야기를 듣게 되면 자연스럽게 발생될 수 있는 반응들이었습니다. 하지만 바울의 이야기는 분명 그들이 지금까지 들어 본 적이 없었던 완전히 새로운 이야기였기에 그들은 흥미를 가졌습니다. (19절)그들은 바울을 붙들어 아레오바고로 갔습니다. 좀 더 전문적이고 본격적인 논쟁을 할 수 있도록 무대를 옮겨준 것입니다.
지금 이 아덴 사람들은 쉽게 말해 새것에 집착을 보이는 '얼리 어답터'와 같은 사람들입니다. 지금 자신들이 믿고 있는 신이 있지만, 새롭고 신선한 신이 나타나면 언제든지 갈아탈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사실 우상숭배가 그렇지 않습니까? 부자 되게 해 준다고 해서 어떤 신을 믿고 있었는데, 이 신보다 다른 신이 더 큰 능력을 가지고 있어서 더 확실하게, 더 빠르게 부자로 만들어 줄 것 같으면 언제든지 갈아타지 않습니까? 신앙의 목적이 신에 대한 경배와 찬양이 아니라 자신의 배를 불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배를 불리기 위해서라면 언제든지 갈아탈 수 있는 것이 우상숭배인 것이죠.
바울이 서 있는 아덴은 사상과 철학의 중심지가 아니었습니다. 그저 번성한 종교시장에 불과했습니다. 이곳의 사람들이 바울에게 보인 반응은 베뢰아 사람들과 같은 너그러움이나 겸손함이 아니었습니다. 그저 새것에 대한 호기심이었습니다. 그들의 생각에 바울은 하나님이라는 신상품을 소개하는 영업사원과 같이 여겨졌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의 생각은 바울을 굽히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든지 바울은 연연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22절부터 29절까지 이어지는 바울의 설교는 설교의 모범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잘 정돈되어 있습니다.
"22 바울이 아레오바고 가운데 서서 말하되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심이 많도다 23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가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24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25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이심이라 26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살게 하시고 그들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정하셨으니 27 이는 사람으로 혹 1)하나님을 더듬어 찾아 발견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계시지 아니하도다 28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하느니라 너희 시인 중 어떤 사람들의 말과 같이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 하니 29 이와 같이 하나님의 소생이 되었은즉 하나님을 금이나 은이나 돌에다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새긴 것들과 같이 여길 것이 아니니라"(행17:22~29)
바울은 먼저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심이 많도다’라고 하며 포문을 엽니다. 부정적이거나 공격적으로 한 말은 아닐 것입니다. 현지 분석에 의한 팩트를 그들에게 던진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말을 이어갑니다.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가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행17:23) 아덴 사람들은 온갖 신을 다 섬겼습니다. 그런데 혹시 자신들이 몰라서 놓치게 된 신이 있을까봐, 그런 신들에게 노여움을 사서 해를 입게 될까봐 ‘알지 못하는 신에게’도 제사 드리는 단을 만들어놓은 것입니다. 바울은 이제 그들이 알지 못하는 신에게 초점을 옮겨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로 옮겨갑니다.
바울이 이야기하는 신은 그들이 생각하는 힘, 돈, 쾌락 등 인간사에서 주어지는 수많은 필요들 중에 하나를 채워주는 신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창조주 하나님, 창조하신 세상과 세상의 모든 것을 생명으로 유지하시는 하나님, 창조하신 모든 것들에 선한 질서를 담아 다스리시는 하나님에 대해 전하였습니다. 그들이 생각하는 모든 신과 세상의 근본 되시는 하나님에 대해 설명을 한 것입니다. 바울의 설교는 설명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마지막 결론으로 심판하시는 하나님에 대해 선포합니다. 우리 30절 말씀 같이 읽겠습니다.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간과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에게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행17:30) 알지 못하던 시대는 과거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현재입니다.
아덴에게 과거와 지금 명백하게 달라진 한 가지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에 대해 듣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해 알지 못하던 때 아덴 사람들은 자신들의 필요를 따라 우상숭배로서 삶을 채워갔습니다. 그들에게는 옳고 그름의 문제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지금보다 나은 삶, 지금보다 많은 것을 가진 삶, 지금보다 성공한 삶이 필요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이제 그런 그들에게 창조주 하나님의 질서, 즉, 모든 세상과 인생의 기준이 전해진 것입니다.
여러분 다림줄을 아십니까? 수직으로 잘 세워져 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실 끝에 추를 달아 내리는 도구인데, 마음대로 쌓아 올려 삐뚤어진 담벼락에 다림줄이 내려지면 더 이상 쌓아 올리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삐뚤어진 것이 확인된다면, 해야 하는 일은 확실한데 삐뚤어진 담벼락을 허물고 다림줄을 따라 제대로 세워야 합니다. 아덴의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그들의 욕구를 충족 시켜줄 또 다른 신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인생을 무너뜨리고 있는 헛된 욕구, 그릇된 욕구가 허물어지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선포로 아덴 사람들에게 다림 줄을 내린 것입니다.
바울의 설교를 들은 아덴 사람들의 반응은 세 부류로 나뉘어졌습니다.(32절) 어떤 이들은 조롱했고, 어떤 이들은 더 들어보겠다며 판단을 미루었으며, 또 어떤 이들은 믿음의 자리로 나아갔습니다. 자신의 기준에 갇혀 있던 사람들은 복음을 거부하였고, 자신의 기준과 복음을 저울질하던 사람들은 판단을 보류했습니다. 그리고 더 이상 자신의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준 앞에 서기로 선택한 사람들은 복음을 받아들이며 하나님을 향한 신앙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는 아덴에서 이어진 선교를 살펴보았습니다. 먼저 바울의 선교는 무례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상황을 살폈고, 그들의 필요를 파악했습니다. 겉으로 보여지는 모습으로 그들을 정죄하거나 판단하는 것이 아닌 그들 마음에 채워지지 않던 빈자리를 발견했습니다. 바울의 이런 모습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선교가 어떤 모습으로 이어져야 하는지를 알려줍니다. 상대방을 배려하지 않는 일방적인 태도도 문제이지만, 무엇보다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누군가를 판단하거나 단정짓는 것이 아니라 그가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결핍을 발견하고, 그의 결핍을 충족시켜 줄 수 있는 하나님에 대해 지혜롭게 전하는 것이야 말로 선교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는 아덴 사람들의 반응을 통해 복음 앞에 서는 모습들도 살펴보았습니다. 아덴 사람들은 또 다른 신을 원하기도 하였지만, 정작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그릇된 욕구로 무너진 삶을 올바로 세울 수 있는 기준이었으며, 더 온전하게 삶을 세워갈 수 있는 올바른 기준이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릇된 욕구로 채워진 내일이 아닙니다. 모든 것이 무너지더라도 올바르게 세워질 수 있는 오늘입니다.
바라옵기는 오늘 함께 예배하는 우리 모두가 헛된 신을 쫓던 잘못된 마음을 겸손하게 내려놓기를 소망합니다. 우리를 도와줄 것처럼 다가오지만 결국에는 나를 무너뜨리고, 공동체를 무너뜨리고, 사회를 무너뜨리게 하는 우상숭배로부터 온전히 벗어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믿음으로 말씀의 다림줄을 내리고, 말씀이 육신되어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다림줄을 온전히 내려 진짜 우리를 살리는 하나님의 진리 안에서 거룩한 생명의 길 걸어가는 믿음의 사람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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